과유불급(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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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하나로 계시니까 기도할 때 누구를 지칭해 불러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로서 계시니까
어떤 호칭을 써도 즉 어느 분께 기도해도 무방합니다.
"내가 기도를 응답한다", "아버지께서 들으신다" 등으로
표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고로 그런 일에 헷갈릴 필요는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계시니까
하나님이라 하면 성부 하나님을 가리킴이 일반적입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형상"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홀로 계셔도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자/母子 관계로 계시니(혹은 모자 관계로 계시기 때문에)
둘(두 분)이 하나로 계시는 것입니다.
굳이 "母子"로 표현한 것은 "아버지", "아들"이시니까
마치 성별이 있으신 양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고
(한국에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이단 세력도 있어)
심지어는 남성우월주의로 오해하는 이들까지 있어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해서 표현/묘사하되
여자가 생김으로써 아담이 남자가 되어 있기에
그렇게 남성으로 통일시켜 나타낸 것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다른 의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안짓고의 포인트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을 뿐이니
혼동하지 마십시오.
범죄라는 것이 이토록 무섭고 엄청난
생명의 파괴 행위임을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신물이 나도록 경험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의 노래
생명(삶)의 법칙 혹은 사랑의 법칙은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없으니 네가 봐주고
너 역시 그러하니 내가 보아 주고 위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 서로는 불가분
불가분이니까 둘의 하나됨
또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있음으로써 네라는 존재가 있음이니
나는 갑, 너는 을로서의 모자/母子 관계
즉 내가 너를 파생/派生했고 너는 파생되었고.
그래서도 또한 둘은 하나로 통한다.
서로가 이와 같이 필요불가결의 존재이니까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우리>를 이룸인데 이 관계가 확대되어
몸과 머리의 한 몸 관계를 형성함이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체제.
이와 같이 창조주께서 머리 곧 어버이되시고
그 모든 피조물이 몸을 이루어
창조주께서는 피조물 위하시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하며
창조주이신 머리의 분부를 받들어
또한 함께 지체/肢體된 이웃을 위함이
생명(영원한 삶)의 법칙인 것이다.
이 생명의 법칙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
이 대칭/對稱 아담을 머리로 모시고
영원히 한 몸의 구조에서 그 지체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모두가 예외없이 평등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방법 곧 법칙이요 계명.
그래서 전적으로 머리가 몸을 위하는 의미로
예수(대칭 아담)님께서 그 자신을 송두리째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 나 위하신 죽음
나 위하신 부활, 나 위하심으로 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의 모든 권세, 권위.
이것이 대칭 아담의 의미.
고로 영원히 예수님은 나 위해 존재하심.
따라서 사랑의 법칙에서 일방적인 것은 없어
나도 전적으로 주님 위해 살고 존재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이요
자아중심과는 대칭되는 의미로 상극인 것.
만일 내가 그럼에도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욕심을 부릴 때
이것이 범법 행위요 죄요 악이 되는 것이다.
"율법행위"
하나님의 계명 지킴 등 모든 선행과 의로운 행실은
구원 받은 다음 즉 대칭 아담과 둘이 하나됨을 이룬 연후에
나의 구원과는 상관 없이
단지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의를 행함이 옳기 때문에
행해질 때 비로소 그 본연의 가치를 드러냄이다.
.................................
그렇지 않고는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자아중심의 발로/發露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율법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이것을 거꾸로 뒤섞어 반죽을 만들어놓고는
지금까지 독극물/毒極物로서 퍼 먹인 것이고
많은 사람이 이것을 마치 생명의 양식인 양
주는 대로 삼켜 온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음의 당위성으로서의
모든 생명의 법 준수를 "구원받으려는 율법행위"로
뒤집어 씌워 거의 질실사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도 천국 갈 사람이 없으니
사탄의 일차 목표는 달성되었던 것.
오직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사랑으로 절로 우러난 순종으로
생명의 법대로 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는 삶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화답하는 것이 순리.
이 순리를 따르면 생명(영생)에 역행하는 일이 없다.
짝의 원리에서 대칭되는 둘은 성질이 정반대
짝의 원리에서 대칭되는 둘은 성질이 반드시 정반대이므로
이해하기도 아주 간편합니다.
이 세상의 지배자가 악마 곧 "이 세상 신/神"(고후 4:4)인 이상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고 이 강함의 대칭이 약함이고
(그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성경은 명시ㅡ고후 13:4),
그 "남으신 고난"(골 1:24)에 동참하게 되어 있는
우리 역시 <그 안에서 약하다> 했으니(고후 13:4)
이러한 시점에서 <강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든
선에 대칭되는 악, 진리에 대칭되는 비진리
곧 거짓으로 분류하면 틀림 없습니다.
............................................
분명한 것은 진리가 이 세상에서
강한 자로 인식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이 사실에 실족해 걸려 넘어가지 않으면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니까
진리 스스로가 자기를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리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위치해보는 것이니
한 때만 그러한 이 한 때를 무사히 넘기는 자 복이 있습니다.
참되고 옳은 자를 가려내기 위해
그렇게 잠정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니
우리 모두 정신차려야 합니다.
창조의 하루
"엿새 일하고 이레되는 날에 내가 쉬었으니
너희도 제7일째의 날에 쉬라" 하신다고 해서
그 "6일"을 우리가 아는 6일로 알아듣는 것을
맹꽁이 성경 해석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사람이신가?
사람이시라면 그렇게 해석해도 된다.
<하나님이 아시는 하루>와 <우리가 아는 하루>가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우기는 미련함밖에 안된다.
필자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성경에 꼭 명시해야 하는 것인가.
말이란 알아들으면 되는 것뿐이다.
성경에 우리가 아는 하루가 아니라고 이미 명시했으면
그대로 알아들으면 되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또 무엇을 기대하기에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가.
창조의 "하루"를 우리의 하루로 환산하면
도대체 얼마가 되는지 현재의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고 감을 잡을 수 없음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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