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화급하다

Tayseek Kwon 2019. 3. 30. 12:50






굳이 "신학"이라는 말을 선호한다면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을 "서방 신학"이라 이름 붙여 배제하고

"성경 신학"이라는 카테고리를 신설해야 할 판.

에덴, 아담이 초자연계 영역(영계)의 존재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상에 대한 완전 무지,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님의 재림이

대칭/對稱아담("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기 때문에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조차 설명 못하는 것,

등 열거하기에도 바쁠 허점을 안고

쓸모 없이 비대해지기만 한 병적인 것이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식으로

오늘날 전멸 일보 직전에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소돔 고모라죄(동성 성행위죄)에게 격살/激殺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보루는 한반도 교회입니다.

1907년 세계적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이룩한 교회,

오늘날까지 70여년간의 수난을 통해

세계 교회 명맥 유지의 밑거름이 되어 온 북한교회,

이런 귀한 요소가 바로 이 시대적 사명의 신호탄입니다.



........................................................................


"죄인의 괴수"를 현행범으로서의 죄인됨을 말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착각합니다.

로마서 7장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 체험이라고 믿는 이들이

특별히 그러한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경우 "죄인"은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죄인임을 자각하고 그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

고로 차후부터는 죄를 다시는 짓지 않습니다.

사람의 의지만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구원자"란 뜻)님의 은혜로 ①과거 죄 용서받고

그렇게 깨끗하게 된 바탕 위에 ②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대칭 아담(예수님)과 둘이 하나됨을 인해 범죄 전 아담처럼

창조됨, 새로이 창조된 것을 가리킴입니다.

대칭 아담과 함께 죽어 무덤에 들어갔으므로

죄를 지을 죄의 기반인 "죄의 몸이 멸해진" 것(롬 6:6).

이렇게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해 지금 살아 있으니

<새로이 창조되었은즉>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으로 창조하실 리도 없고

가만 두면 저절로 죄를 짓게 되어 있는

약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실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로 짐짓 고의로 즉 죄인 줄 알면서도 죄 짓는 일은

아주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믿기 전 율법 아래 있던 상태(롬 7:24)와

은혜 아래 즉 대칭 아담(마지막 아담)과 둘이 하나돼 있는 상태가

천양지 차이로 달라져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왔으나

이제는 내 스스로 나의 몸을 쳐 복종시킵니다(고전 9:27)

그러므로 바울의 "내가 죄인의 괴수"란 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는데

구원받게 될 그런 죄인(회개하게 되는)들 중에서

내가 두목이었다,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죄인들이 두목이라는 말도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죄 짓는데 겸손히 말해서 "괴수"라 함도 아니고

죄와는 완전히 결별한 하나님 앞 의인으로 있기 때문에

요한 사도나 바울 사도나 모두 한결같이 경고하여

죄를 짓지 말라는 엄중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성경을 아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합니다"(요일 3:8).


사람이 멸망하도록 사탄이 시험하는 갈래를 따지면

정확히 3가지로 요약됩니다(눅 4:1-12).

이것을 다시 간추리면 세상 삶에 대한 사랑이 그 하나요

그 둘째는 생명의 법칙(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 위하는)

관련인 바 즉 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어기게 만드는 것.

그래서 하나님 위해야 하는데 나 위해 내 욕심 채우기 위해

하나님 허락 없이 돌덩이를 떡으로 만들어 먹자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위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심을 믿기 때문인데

이를 의심하게 만들어 과연 그런가 시험하는 불신의 자세

즉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

여기에 보태서 사탄의 시험은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입니다.

이 세상 삶을 미워 않고 미련을 가진 자마다 천국은 차단이니

이 자연계 삶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당연히 가증스러운 흉물일 수밖에.

왜냐면 이렇게 비참하게 살도록 애초 창조하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이런 식으로 살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런 육체의 삶이 정상인 것처럼 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죽는 인간>을 만드실 리 있나요?

사는,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지? 당연하지 않나요?

능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비하하는

사탄의 계략에 휘말려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고로 세상 삶을 사랑하는 자는 필멸입니다(요 12:25).


모든 죄는 이 생명의 법칙에 대한 "범법" 행위

(the transgression of the law)입니다(요일 3:4).

요한 사도가 분명히 정의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도 이 범주에 속하지만

왜냐면 하나님의 금하시는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는 행위에 해당되니 (이 세상이 에덴의 선악과에 해당)

내 욕심대로 행하여 나를 위하고

마땅히 하나님 위해야 함에도 위하지 않음이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특별히 "세상 사랑"으로서 강조하고 있음에

우리는 극력 유의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현실적이고 <치명적>이라는 뜻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바로 이 연유 때문이며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 해도 못들어간다"(눅 13:24)는

무서운 경고가 바로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