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아주 그릇되게 알아 온 구원론/구원관

Tayseek Kwon 2019. 4. 7. 07:30

아주 그릇되게 알아 온 구원론/구원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는다(요일 5:16) 


다시 강조하지만 얼핏 생각할 때 범죄자를 위해 우리가 기도했으니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범죄자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해야지

왜 기도자에게 생명을 주실까 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절 끊긴 상태입니다. 

죄가 가로막아 은혜(자비, 긍휼)가 없고 진노만이 있는 급박한 상황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범죄자와 직접 상관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절단되고 격리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범죄자와 하나되어 있는(하나되기로 작정하여 기도하고 있는) 

기도자와 상관하시므로 그 기도자를 통해 즉 그 "산 제물"

(희생 제물이기는 하나 살아 있는)"(롬 12:1)됨을 통해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희생" 제물의 뜻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함께 하나로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심에 있는 것이지 

대신 죽으심이 아닙니다.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는 사람이 아닌 짐승의 죽음으로만 착각되어서 

"대신"이라는 불필요한 의미가 각인되었지만, 

사람 곧 대칭 아담이실 때는 아담과의 하나됨 

즉 아담이 그러하면 그러하고 저러하면 저러할 수밖에 없는 의미 그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 하나됨을 인하여 대칭 아담이 되시어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신 결과로 

역시 그 하나됨을 인해 그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범죄자에게가 아닌 기도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고 그 덕에 우리가 살아남 

즉 영생하게 되는 이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대칭 아담과 하나됨을 인하여 그 죽음이 내 죽음,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그 생명이 내 것이 됨으로 인한 구원(영생)입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됨의 원리원칙의 적용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 나 따로, 주님 따로가 아니라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반드시 주님을 위함으로써만 

이 하나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즉 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침, 

내게 주심으로써 주님의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시지 않음과 같습니다. 죽으셨으니까. 나 위해 죽으셨느니까. 

고로 내가 그 생명이 되어 드려야 하고 

그래서 주님의 본을 따라 나 역시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 위해서만 살 때에 

이 복되고 거룩한 하나됨이 성립 유지되어 나의 영생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즉 자아중심이 되지 말아야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거나 죽거나 하지 말아야 하고 

따라서 머리를 위하고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래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희소식을 너무 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대신 죽으심"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 

자기 위해 모든 욕심 다 채우면서 영생한다는 환상에 젖어 

자기를 속여 온 것입니다. 

이 모두 성경을 읽지 않고 

더욱 열심히 부지런히 찾지 않고 구하지 않고 두드리지 않고 

남의 말에만 의존한 결과입니다. 

남의 말에 의존함은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행동한 것과 같은 되풀이입니다. 

아담이 여자의 말만 듣고 죽음에 이른 비참한 결과의 반복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