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정체(초자연계 존재)/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회복된 아담의 심판권 행사

Tayseek Kwon 2019. 4. 3. 23:59





회복된 아담의 심판권 행사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terror)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했습니다. 


"인자(사람의 아들, 사람)"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요 5:27) 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 즉 對稱 아담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만물을 "다스린다"(창 1:26,28) 함은 심판하는 의미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고로 범죄하여 죽음으로써 이 심판하는 권세도 당연히 상실한 것이니, 때문에 바울 사도는 아레오바고 전도에서 이 사실을 적시하여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않으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들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다"(행  17:30,31) 하고, 그 이유를 밝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 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 대목을 통해서도 첫 사람 아담이 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죽음(자연계 존재로 전락함으로써)을 인하여 심판자로서의 아담의 자리가 공석(空席)이었음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죽음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다시는 아담이 자연계 존재였다는 어림도 없는 미신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며 진리 안에서의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바울의 지적도 아담의 빈 자리를 그 누구도 채울 수 없어 심판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제 "정하신 사람" 곧 대칭 아담께서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아담이 되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닮은꼴이 되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이 죄인으로서의 죽음 즉 사형수로 처형되는 과정이 필수였기에)을 완수하심으로 말미암아 대칭 아담이 되시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였던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죽으시는 것이난공사(難工事)였고 문제일 뿐 부활은 자동으로 되는 일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니까. 마침내 이 죽음을 이루시고 모든 것을 극복하시어 승리하신 것입니다. 명실상부한 "아담"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계시록에서 연거푸 말씀하시는데 바로 메시아 예수님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고난 받기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로 되어 있는 자가 이 세상 삶을 탐하고 부(富)를 거머쥐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핑계됨은 언어도단이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심이요 이상 하나님의 뜻에 대한 드러내놓고 자행하는 반역 행위임이 명백합니다. 고로 엄중히 반역죄로 처단하시는 것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부자의 불꽃 가운데로의 직통 진입입니다. 


한 몸 체제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 철칙이기 때문에 지금은 고통을 받는 때라 이 생명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명약관화의 진리입니다. 우리 양심이 또한 이를 증언하는 바로서 이를 무시하는 자 결코 무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산다"고 하는 궤변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가령 기독교 교역자로서 거부(巨富)에 속하는 이들 중에 빌리 그래함이 속해 있다고 합니다만 이 단 한 가지만 해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속성을 감추지 못합니다. 아무리 포장하고 위선으로 가장해도 여우 꼬리는 보여지게 마련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 하는 말(설교 등)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능력(기적적인 초능력을 가리킴이 아니님ㅡ자기 부인은 예수님과 둘이 하나되는 초능력을 떠나서는 처음부터 불가능)으로써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고전 4:19)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