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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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yseek Kwon 2019. 4. 1. 17:48








또 다른 3위1체 원리의 심볼 또는 로고이다. 주종, 대소, 인과 관계를 표현하는데 업고 안은 것을 나타낸 모습으로서 이 "업고 안은 것"이라 한 것은 노자가 그의 도덕경 12장에서 한 말이다. 노자의 표현은 갑이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었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양은 안고 있고 음은 업고 있다는 뜻으로서(萬物負而抱陽) 의미는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전자는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후자는 그냥 양은 크고 음은 작은 것으로만 말하나 전자는 그렇게 된 원인을 밝힘이니 즉 갑(양)이 을(음)을 낳았다, 파생시켰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인과 관게를 말함이므로 세상은 창조주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노자의 사상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안고 있고(엄마가 아기 안듯) 작은 자는 큰 자를 업고 있으니(연로하신 어버이를 자식이 업어드리듯) 이렇게 한 덩치가 되어 있는 모습을 가리켜 어버이라고도 못하고 자식이라고도 못한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 음양조화의 이원론이나 혹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의 차이점은 3위1체 원리는 갑과 을은 파생시키고 파생되어 나온 관계를 명시한다는 데에 있으니 인과율이 이로써 하나의 법칙으로서 최종 정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이다.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이 된 나는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내 안에 계시므로 즉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내 안에 사시므로ㅡ이 관계를 요한은 "하나님의 씨"로 표현하고 있다-요일 3:9) 것이다. 이상 그림과 같이 나는 마지막 아담과 둘이 하나됨으로써 불가분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나 없이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실 수 없고 그리스도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 그리스도를 보라, 바로 내 모습이시다. 나를 보라,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그래서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니(롬 14:7/고후 5:15)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빌 1:21). 때문에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하는 것"(고전 10:31)이다. 이 말씀을 허수히 들을 일이 아니니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기 자신을 그와 같이 부정함이 되는 까닭이다. 왜냐면 주님 친히 제2의 나 자신이 되어 계심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주님'을 살고 주님은 '나'를 사시니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바로 그 관계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는"(고후 10:5) 일상생활이다. 즉 "생각 자체를 미워함이니",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시 119:113" 했기 때문이다. 영역(KJV)에서의 "vain"은 번역자가 끼워 넣은 것일 뿐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일체의 생각을 미워함이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As he thinks, so is he"(잠 23:7)라고 한 그대로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한 것이다.


둘이 하나됨이 갑은 을을 보고 을은 갑을 봄으로써 서로 상대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그런 하나됨의 삶이 골격이라 했거니와 우리가 성령을 모심을 가리켜 성경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했는데 이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시 16:8)를 인용한 것이다. 전자는 주님이 나를 위하시는 모습이 되어 있고 후자는 내가 주님을 위하는 모습이 되어 있는데 위의 이치대로 하면 같은 뜻이다. 즉 갑으로 말하면 을을 안은 것이요 을로 말하면 갑을 업은 것이다.


갑을 기준하면 을을 위함이요 을을 기준하면 갑을 위함이다. 이것을 양면성의 동시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 구원받음이니(요 20:21,22) 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명 받은 자의 위치이요 상태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으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일하려고 세상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후 6:1)고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즉 생각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일 일이지 이 세상 살려고 하면 부적격자로 탈락된다.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께서 이 세상 살려고 하셨던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심으로써 이 점에서는 우리가 주님이나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부적격자로 탈락되는 사례로 말하면,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로 일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2,23)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신 바다.


그들은 모두 자타 공인으로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것은 과거이고 현재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치 않은 것"(:21)이다. 시종일관해야지 과거에 사는 이들이 많은 것이 언제나 비극적 현실이 되어 있다. 믿음의 요체는 사랑이요 사랑은 항상 오늘에 있지 과거에 있지도 않고 미래에도 있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에 살지 않고 과거에 사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늦기 전에 경고를 받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