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성령 세례

방언 (1)

Tayseek Kwon 2019. 3. 30. 07:42





방언 (1)




이미지: 텍스트




막 16:17에서는 "방언"이 아닌 "새 방언"임에 유의해야. 

이 현격한 차이를 무시하게 되면 엉뚱한 해석으로 흐르게 됨.


지금이라도 이런 "방언파"가, 

절대로 이것이 없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고 못박으신 말씀 곧 눅 14:25-35 

즉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신 이것만 강조해도 

필자는 그들의 소위 "방언"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주저 없이 인정할 것임. 달리 말하면, 

이제까지 이 "방언"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이 말씀을 따르라고 강조한 역사가 없습니다. 

말뿐이라면 그런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 

그 삶의 양식이 그 말씀을 따른 것임을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 등) 

나타내는 열매가 필수입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다른 것 다 접어두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여부를 가름하는 확실한 증거이니

유념하실 것. 하나님께로서 난 성령의 역사이면 

반드시 주님이 강조하신 모든 말씀과 일치할 수밖에 없으니까. 

불일치는 "다른 영"(고후 11:4)임을 스스로 입증함인 것. 

방언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위의 말씀을 무시하고는 

구원과 무관한 자기 처지임을 때 늦기 전에 각성해야.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 


이 핵심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이런 시대의 조류를 따라 

"방언"과 같은 혼란 사태가 극성을 부리는 것.


오늘날 악령들이 초대교회 방언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 당시를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어. 

그러면 당시 방언 등의 현상이 나타났던가?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 정도였다면 

만일 방언이 성령 역사/役事에 필히 수반되는 것이었다면 

왕성하게 방언 현상이 일어났을 터. 

그런데 악령들의 이러한 모방행위가 성행하는데 

뒤늦게 성령으로 말미암는 "방언"이 

새삼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경쟁도 아닐진대 

전혀 무의미한 것. 

1907년에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 

오늘날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음.


(하나님의 영을 "성령<님>"이라 호칭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 또는 성자 하나님처럼 

개체적으로 계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 분이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이 경우 "아버지"시라고 부르거나 

"주님(예수님)" 하고 부르듯이 할 수가 없다는 뜻.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표현됨에서도 알 수 있는 것. 

일곱 분이 계신다고 일일이 "님"으로 부를 수 없음과 같은 것.)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할 정도입니다. 

십자가 외면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등(눅 14:25-35) 

주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빈 말이기에 그렇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얼마든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의 문은 닫혀져 있지 않고 열려 있으니 

들어오라는 의미입니다. 단 이제까지의 구원받았노라는 

기존 관념을 완전히 깨뜨려야 가능합니다. 

그 누구의 말대로 하지 말고 성경의 척도대로 

자신을 재어보아 

미달한다 싶으면 지체 없이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자, 

자기의 영생, 영원 운명을 무시하는 

만고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신을 받은 경우 대개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구원받아 성령에 참여한 사람이 만일 그렇게 된다면 

히브리서의 엄중 경고대로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구원받았는데 이렇게 되었다"는 

마귀의 속살거림에 현혹되지 말고 

과감히 회개하여 새 창조를 받으시면 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를 명심하면서ㅡ.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영적 문제를 너무 방만하게 대수롭지 않게 

아주 간단히 취급하여 생각합니다. 

치명적입니다. 

실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충실한 기도생활 그리고 

성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노정에서는 장사가 없습니다. 왕도/王道도 없습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이 

성령 충만한 바울의 경고입니다. 

나는 서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섰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조심하라는 것이니 

사정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