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P pix(DPA pix)/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Tayseek Kwon 2019. 3. 22. 03:59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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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Tungus Event/The Great Tungus Explosion) 



이 기록은 사탄의 실존을 입증하는 것이요
이는 사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 되는 것이요
용이 사탄이라는 이런 모든 사실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밝혀주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증거요
성경이 주제로 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성경이 밝히는 대로의 그리스도 구원의 진실성을 확증함이다



1  사건의 개요
2  현대과학도 못푸는 수수께끼라고 말하지만
3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①
ㅡ"진로(進路)를 바꾸었다"ㅡ
 

4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②
ㅡ대사(大蛇)/용(龍)의 형상ㅡ

5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③
ㅡ추락한 후 "어디론가 유유히 갔다"ㅡ

6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④
ㅡ인명(人命) 피해 전무(全無)ㅡ

7   체를 밝히는 열쇠 
ㅡ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 팀의 늑장 출동ㅡ

8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⑥
ㅡ1908년을 기준한 그 전후의 지구촌 상황ㅡ

9   정체를 밝히는 열쇠 
당시 24세의 한 원주민의 증언
ㅡ"앞에 두 눈 달리고 뒤에 불길 뿜는 장작 같은 것이 공중에 날아가"ㅡ

10   몇 가지 고찰점
11  퉁구스카, 나즈카, 스톤헨지 기타
 
12  용(龍)의 정체 - 사단

13
조선 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영귀(靈鬼) 현상

14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1

사건의 개요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폭발"이라 되어 있으나 해설자의 분석으로는 "충돌(衝突)"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싶어 붙인 이름이다. "우주 공간에서부터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듯 아주 사정없이 내리 박힌 것이므로 "대충돌"이다. "하늘에 할거하던" "용 곧 옛 뱀"과 그 일당이 하늘로부터 아주 되게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용 곧 옛 뱀 즉 마귀 또는 사단"(계 12:9/20:2)이란 것은 성경의 표현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의 대군세(大軍勢)와 대판으로 전쟁을 벌인 끝에 대패하여 지상(地上)으로 경황없이 쫓겨 내려와 처박힌 것이 지구상의 시간으로 1908년 6월.정확히는 30일 오전 7시 17분. 어떤 기록에서는 8시 10여분 된 것으로도 적고 있다. 위치는 중앙 시베리아 북위 60도 55분 동경 101도 57분. 포드카메나야 퉁구스카 강(江) 근처. 이하는 모두 목격자들의 진술과 증언에 의한 것이다. 이 시각 햇빛이 무색할 정도의 아주 밝은 불덩어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열과 섬광을 발산하면서 천둥같은 파열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TNT 10~15 메가톤 급의 대폭발음. 그것도 서너 차례. 그리고는 뭔가 요란스럽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거센 폭풍이 들이닥쳤다. 폭발 지점에서 400㎞ 떨어진 마을에서의 증언이다. 이 결과 폭발 중심으로부터 반경 32㎞ 내의 모든 시베리아 소나무들이 방사형으로 쓰러졌다. 시꺼멓게 타 버린 채ㅡ. 2,000평방킬로의 면적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 버린 것이다.


대충 잡아 대전을 중심으로 하면 부여, 강경, 무주, 황간, 전의. 속리산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 가히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후 항공기로 그 곳 상공을 비행하면서 관측한 결론이고, 그 전에 실지 답사한 조사 팀의 주장대로 하면 반경 60㎞, 거의 일만 평방킬로에 달하는 면적이다.


현장에서 640㎞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는 서 있던 말이 쓰러질 정도였다. 그 폭발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불기둥이 보인 후 세 번 정도의 천둥 소리 같은 게 들린 것은 폭발 지점으로부터 400㎞ 떨어진 곳이었다고 앞에서 지적했지만,어떤 기록에서는 750㎞에 걸친 먼 지역에까지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한다.


폭발과 더불어 땅 위 수십미터 높이까지 눈부시게 빛나는 불덩어리가 불끈 솟구치더니 무서운 속도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처음 이 "달걀형(卵形)의 불덩이는 고비 사막 쪽에서 "날아와" 시베리아 내륙의 광활한 원시림 지대를 저공으로 스쳐 칼데라 분지의 습지에 내리 박힌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폭발이 있기 이틀 전 프랑스의 한 천문학자가 천체 관측 도중 망원경으로 "자그마하고 이상한 천체를 포착했는데" 어찌나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지 포착되자마자 그 시야에서 즉시 사라져 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사 간행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란 책의 퉁구스 대폭발에 관한 기사를 보면, 폭발 현장 가까운 64㎞ 지점의 한 농부는 그 시간 "자기 집 계단에 앉아 있다가 섬광이 번쩍 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으나 불로 지지는 듯한 열 기운을 느꼈고,불덩이가 사라진 얼마 후에는 한바탕 돌풍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계단에서 나동그라졌으며, 의식을 잠시 잃었다가 큰 천둥 소리에 깨어났다"고 했다. 또 그 이웃의 한 농부는 "불덩어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얼굴을 돌렸는데도 귀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직경 64㎞ 내의 모든 동식물이 궤멸되었고 1,500마리의 순록 떼도 몰사한 것으로 목격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보고 되었는데, 그 일대는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의 모든 나무는 죄 쓰러져 있었으나, 오히려 폭심점에 위치한 나무들은 벌거숭이로 타 버리긴 했어도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상당한 높이에서 공중 폭발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2
현대과학도 못풀어내는 수수께끼라고 말하지만


이 "대
충돌" 때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이 이르렀다고 기도를 올리는 등 대소동과 혼란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수수께끼"는 20세기 첨단과학으로도 풀지 못하는 숙제가 되어 있다. 당시 지구에 일어난 자기(磁氣) 변동의 기록을 보면 대기권에서 원자탄이 폭발했을 때 생기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타났고, 1958년과 1959년 사이에 현장을 답사한 조사 팀들은 사고 지역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고 보고 했으나 1961년에 현장을 정밀 조사한 결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거대한 운석이 낙하한 것으로 쉽게 결론을 내리는 이들도 있으나, 운석이 떨어져 생긴 지구 최대의 상처라고 믿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거대한 운석공(隕石孔ㅡ폭 1.2㎞, 한복판의 깊이 186m)과 같은 구덩이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여러 사람이 여러 모로 상상해보고 그 정체를 밝히려 하나, 진상 규명을 위한 그들의 접근은 모두가 "자연현상"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못한 채 그 테두리 안에서만 헤매고 있으니 옳은 해석이 나와질 수가 없다. 그나마도 폭발이 일어난지 상당기간이 지난 1921년부터 비로소 관심의 대상이 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과학적인, 준과학적인, 또는 과학인 체 하는 갖가지 이론과 가설이 120여종을 넘는다고 한다. 물론 이 중에는 "그것은 용"이라는 주장도 물론 들어 있는 모양이다(9. 정체를 밝히는 열쇠  참고-이 증인의 증언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한 듯)그러나 계시록에 있는 대로 "하늘에 대전쟁이 있어 용이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쫓겨내려 온 것"으로 (이런 해석은  이 글이 처음이 아닐 수는 있어도) 해설자는 강력히 주장하는 이다.




3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①
ㅡ"진로(進路)를 바꾸었다"ㅡ 


그런데 조사 탐험대가 목격자들의 목격담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결과 특이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 "불덩어리"가 지상(地上)을 향해 일정한 방향으로 돌진해 오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래 기록을 보면 지상으로 떨어지면서도 방향을 바꾸고 또 퉁구스에 떨어지기 직전에도 충돌 지점을 정확히 잡기 위해 방향을 조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스스로 내려오다가 그처럼 정확성을 기한다고 노력하느라 방향 조정을 했다면 그렇게 조심한 보람이 있어 그처럼 가공할 만한 경천동지의 폭발음이라든가, 섬광이라든가, 사위를 싹쓸이 하듯이 불살라 버린 그런 대폭발, 대충돌은 일으키지 않았으리라. 이것이 상식적인 정확한 판단이다. 장소를 가리느라 그렇게 노력하는데 어찌 그렇게 갑작스럽게 충돌하는 것처럼 일대 수라장을 일으켜 놓겠는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갑작스럽게 충돌하다보니 그런 일대 충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도 격돌 지점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방향을 바꾼 것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가 아니므로 타력에 의한 것이고 그렇다면 해답은 오직 하나다. 영물들이 하는 일도 인간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우리의 상식을 과히 벗어나지 않는다.


즉 사단 곧 용(龍)이 자기 힘이나 의지로써 그런 식으로 이 지상으로 내려올 리는 만무하므로 미가엘과 그 수하 천사들과의 대접전에서 패하여 만신창이가 된 그가 두 천사가 양 옆에서 끼고 천상에서부터 지상으로 번개같이 내려오듯이 하다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지대를 정확하게 조준하기 위해 그렇게 방향을 되풀이하여 고쳐 잡았다는 결론밖에 없다.


양 옆에 끼고 있었든 여럿이 함께 덩어리지어 몰려 왔든 간에 인간의 눈에 목격된 것은 사단 곧 용이요 옆에서 이 사단을 사로잡아 정확한 지점에다 정통으로 내리 꽂아 메어쳐 버린 천사들은 목격자의 눈에 보이지 아니한 것이니 이는 사단이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자기를 추스를 수 없었고 천사들은 그와 반대로 평소와 같이 자기 품위를 유지한 채였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영물들의 몸의 형태와 상태는 이 자연계의 육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능력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으나 특수 상황에서의 그 과정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 즉 대판 싸움의 결과로 만신창이 또는 인사불성이 된 상태의 사단의 형체는 인간의 눈에도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평소와 같이 의식적으로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 할 경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에 의해 지상으로 되게 메어치자마자 그 충격으로 그리고 그 몸이 영적인 것이라 자연계(땅과 공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충격이 가해지자 즉시 그런 굉장한 반응이 일어났고 그 충격에 스스로 깨어난 사단은 싸움에서 받고 지상으로 메쳐진 결과로 받은 그 상처 그대로를 안고 흐느적거리며 대서양 쪽 아마 멕시코의 그 "마의 삼각지대"쯤으로 나아가 거기서 몸을 가눌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면, 충돌 현장으로부터 서쪽 약 5,000㎞ 상격해 있는 폴란드의 한 천문대에서는 폭발 전 거대한 불덩이 하나가 폴란드 상공을 가로질러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그들의 관측 일지에 기록하고 있고, 또 폭심부로부터 320㎞나 떨어진 시베리아 중앙의 한 작은 마을의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서쪽 하늘에 한 파란 불빛이 수직으로 낙하하다가 약 10분 뒤 세로로 길게 뻗은 형태가 되어 마치 하늘을 둘로 갈라놓는 듯 하더니 앞 부분이 땅에 닿는가 싶은 순간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렸고, 그 뒤로는 거대한 검은 구름이 피어 올랐다는 것이다.


700명 이상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체가 낙하할 때 진로를 변경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이칼호(湖)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도중에 진로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바꾼 것으로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증언은 폴란드의 그 천문학자의 관측일지와 일치한다. 이미 앞에서 폭발이 있기 이틀 전 프랑스 한 천문학자가 빠른 속도의 낙하 물체를 포착했다 했는데 이 퉁구스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점 하나는 참작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즉 영물이 그 스스로 움직일 때와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을 상실했을 때의 경우가 판이하다는 것. 스스로 움직일 때는 가히 빛의 속도처럼 우리 눈에 잡히지 않으나 그 능력을 상실했을 때는 인간의 시야에 잡히는 물체와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즉 사단이 이미 자기 능력을 잃고 다른 천사들에 끌려 내려왔을 때는 속도도 느릴 뿐 아니라 그 형체가 완연히 드러나지게 되어 있고 그 속도도 빠르기는 하지만 관측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퉁구스 낙하 물체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 물체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지만 이틀 혹은 그 이상이라도 걸릴 수 있는 것은 빛의 속도와 같은 자체 능력을 잃고 천사들이 그렇게 물체처럼 된 사단을 끌고 내려오는 것이라 더딜 뿐만 아니라 그래서 인간의 시야에 잡힐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영물들이 만일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 내에 이르렀을 거리. 영물이 그렇게 자신의 힘을 상실한 것은 그 때의 사단의 경우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속도는 천사들이 그렇게 반(半) 물체화된 사단을 끌고 오는 탓이었으리라. 끌고 오는 대상이 우리같은 자연계에 속한 물체 같으면 순식간이었을 것이나 상대가 사단으로서 큰 용 곧 영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우리로 말하면 반 주검이 되어 무기력화된 영물을 끌고 오는 판이었으므로 사단의 모습 자체는 비록 영물로서 빛과 불을 뿜어대는 그대로였으나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인간에게 노출된 것이 퉁구스 대 충돌의 전모이다.


그리고 또 어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게 꼬리(연기 같은 것이 아니고 벨트 모양)를 가진 것이 길이가 500 마일(800여미터)에 걸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아래로 내려오다가 그 한 부분이 마치 튀어 오르려는 듯이 위쪽으로 틀어졌다고도 한다. 이 위쪽으로 틀어져 꿈틀거린 것은 왜일까. 부딪치지 않으려는 용의 반사적인 몸부림일까. 인사불성이라도 완전한 의식불명이 아니니 땅에 부딪히려는 찰나 지면 가까이 깔린 대기층 같은 그 무엇에 확 와 닿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아래 영문은 인터넷에서 베낀 것인데 참고하시기 바란다. 대략 번역하면 이렇다. 현장 시간으로 정확히 정각 7시 15분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달리던 열차 위로 불기둥이 치솟아 푸른 하늘을 가르며 초속 대략 1마일(1.6킬로)로 날아가면서 땅을 뒤흔드는 통에 기관사는 객차 한량이 탈선하는 줄 알고 급정거를 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기겁을 한 승객들이 모두 놀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 불덩이는 북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열차가 서 있던 곳에서 북쪽으로 약 560킬로 떨어져 있던 이벵크라는 유목민들은 그 때 지축을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또 하나의 아침 태양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밝은 것이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이 해 같은 것은 둥근 것이 아니라 원통형이었다(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나타내는 것을 말함이니 정확히 측면에서라면 긴 막대기일 것이고 정면에서는 공(球)과 같을 것이며 그 중간인 비스듬한 측면이면 원통형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조종이나 되는 것처럼 방향을 꺾는 것이었다. 즉 시베리아 횡단 열차 위를 스쳐 지나가서는 45도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240킬로를 가다가 다시 45도 각도로 반대 방향으로 틀어 역시 240킬로를 더 진행한 후 퉁구스 골짜기에서 폭발한 것이다.


The momentous event happened at 7.15 a.m. local time on the last day of June 1908. At that precise moment, an object brighter than the morning sun ripped through the atmosphere over Siberia. A trainload of passengers on the trans-Siberian railway stared in horror at the towering pillar of flame roared through the clear blue skies at a phenomenal velocity of around one mile per second. The sonic boom given off by the sky invader shook the railway track, convincing the engine driver that one of his coaches had been derailed. The driver jammed on the brakes and as the train screeched to a grating halt, the mysterious fiery object thundered north. The trembling train passengers listened in relief as the overhead danger became fainter, and many of them looked out the windows of the carriages and eyed the vapor trail with bafflement.


Almost 350 miles to the north of the train, the nomadic hunting tribes of the Evenki people felt the ground shake violently as they witnessed what seemed to be a second sun racing across the heavens. only this sun seemed to be cylindrical. By now, the immense apocalyptic object had been seen to change course as if it was being controlled or steered. After passing over the terrified travelers of the trans-Siberian train, the object made a forty-five degree right turn and traveled 150 miles before performing an identical maneuver in the other direction. The tubular shaped object then proceeded for another 150 miles before exploding over the Tunguska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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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②
ㅡ대사(大蛇)/용(龍)의 형상ㅡ

두 번째 특이한 점은 그 "불덩이"의 형상이다.폭심 지역으로부터 동남방 400㎞ 이상 떨어진 마을의 농부들에 의하면,북서쪽 지평선 위 하늘에 청백색의 발광체를 보았는데 그 형상은 마치 굴뚝을 옆으로 비스듬히 뉘인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들보(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 beam)의 형상이었다.


그런 물체가 서서히 지평선 위로 내려가다가 괴이한 빛을 아래로 방출하는가 싶더니 그 후 벼락 치듯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천지를 뒤흔드는 듯 했다고 한다. 또 남서 쪽으로 300㎞ 가량 떨어진 한 마을에서의 증언으로는, "대포 소리 같은 것을 듣고 그 쪽을 바라보니 큰 몽둥이 같은 것이 상공에 떠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 원통형 즉 굴뚝 같은 것은 넓게 잡아 5,60m의 폭에 550m 정도의 길이로서 무지무지하게 큰 물체였다고 한다. 그런 형상의 물체는 앞서 지적한 대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것은 물론이다. 그런 원통형을 정면으로 멀리서 보면 한 개의 알이나 공과 같은 불덩어리일 것이요, "굴뚝"과 같다고 한 것은 측면에서 바라본 형태일 것임을 이미 지적했다. 또 다른 목격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큰 몽둥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측면이라도 비스듬히 보았을 때와 바로 보았을 때가 다르다. 바로 보면 굉장히 긴 것도 비스듬한 각도에서 보니까 뭉툭하게 그 길이가 보다 짧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세로로 길게 뻗은 형태로 마치 하늘을 둘로 쪼갠 것과 같았다" 한 것은 완전한 측면에서 본 것이다.


그런 기다란 물체가 유연성이 있는 것이었느냐 아니면 경직된 꼬장꼬장한 막대기 같은 것이냐 하는 것도 유념할 일이다. 다시 말해 후자의 경우라면 무생물의 경우라 하겠으나 전자의 경우에는 생물체로서, 바꾸어 말하면 큰 뱀, 곧 용과 같은 그런 몸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신비한 물체"가 전자에 해당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은, 그 폭발(충돌) 전후로 그 물체가 세차게 구불텅거렸기 때문이다. 이는 그 떨어진 자취로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 첫째는 전인미답의 시베리아 원시림이 쓰러진 상태다. 폭심부라고 여겨지는 칼데라 분지(盆地)를 중심으로 해서만 그와 같이 방사형으로 쓰러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지 가까이 있던 나무만 새까맣게 타거나 뿌리째 뽑혀 나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몇 킬로 또는 몇 십 킬로 떨어진 지점에서도 분지 바로 옆의 나무 못지 않게 격심한 피해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즉 불과 몇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원시림은 도리어 아무 피해 없이 말짱한데, 몇 십 킬로나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이 굉장히 넓은 범위에 걸쳐 새까맣게 타서 숯덩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사 팀의 한 공중 파일럿의 말을 빌리면, 그와 같이 피해가 심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마치 호랑이의 털 무늬처럼 얼룩덜룩하게 무늬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다. 때문에 조사 팀의 조사 결과 보고로는 "낙하한 물체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 그 한 부분은 무서운 열을 발산했으나, 다른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한 열을 발산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했을 정도다.


이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쫓긴 "큰 용"이므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 기진맥진한 채 땅으로 내리 떨어졌으나, 원래 성경의 표현대로 "구불구불한" 용으로서 딱딱하게 길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굴뚝이나 큰 몽둥이" 형상이 아니라 구불거리는 생물체이므로 먼저 머리가 땅에 닿으며 불을 뿜고, 그 충격에 몸체가 구불텅거리며 머리 쪽이 공중에 솟구침과 동시에 그 구불텅거리는 몸뚱이가 땅에 다시 닿으려는 순간 그 닿으려는 부분들은 강하게 반동을 일으키며 불을 내뿜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 번 구불텅거림과 동시에 순식간에 몸을 날려 공중으로 솟구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폭발(충돌)음이 8차례나 들렸다 하는 증언이 있는 것을 보면 소리가 들린 대로 용의 길다란 몸이 여덟 군데를 구불텅거리며 부딪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부딪쳐도 돌이나 쇳덩이 같은 것이 아니라 생물체의 몸(더군다나 영물로서의 신령한 몸)이므로 부딪친 자리에 운석이 떨어질 때처럼 웅덩이와 같은 흔적은 남기지 않은 것이다. 신령한 몸으로서 극도의 유연성이 없는 것이라면 그 정도의 우람한 체구인데 흔적이 없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땅에 부딪치지는 않고 부딪치려는 순간 몸의 반동으로 강력하게 열을 내뿜으며 그 힘으로 몸을 솟구쳤다고 보는 것이다. 폭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증인들에게는 서너 차례 폭발음이 들렸다 하나 원거리에 있는 폭발음은 여덟 차례 정도였다 하는 그런 차이는 있다. 멀리에서는 가까이 있을 때보다 소리의 간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용이 지상에 메어치진 모양은 마치 물에다 돌을 던지면 파문을 일며 원형으로 퍼지는 것 같은 모양으로 그 일대가 파괴된 것이 아니라, 30㎞에 달하는 거리에 이르기까지 몇십 킬로에 걸치는 <넓은 벨트 모양>으로 불타고 그을려 쓰러진 나무들로 그 참담한 피해 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비행 상공에서 폭발 지점을 내려다 보며 표시한 지도를 보면 그 파괴된 범위가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뭉뚱그려진 덩어리 모양이나 공(球) 같은 물체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굉장히 크고 긴 것이 낙하했음을 밝히는 것이다. 길되 딱딱한 무생물체가 아니라 구불떵거리는 생물체 곧 대사(大蛇)의 형태임을 암시하지 않는가.


여기 나온 사진은 소위 UFO라고 하여 찍은 것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 여기서는 단지 광채가 나지 않고 화염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뿐이지 퉁구스 사건 당시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한 그 증인들이 묘사한 형체와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용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소위 미확인 비행물체란 것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런 줄로 알고 지어낸 이름일 뿐이다. 용은 영물인데 광채가 나지 않을 수도 있는가 하겠지만, 영적인 몸(신령한 몸)은 의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광채가 나는 터이지만 의식적으로 광채를 내지 않기로 하면 그리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타난 형태의 길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즉 용이 움직임에 따라 다시 말해 정면으로 대하면 길게 비스듬하게 대할 경우 짧게 나타날 수 있다. 길게 쭉 뻗은 모양새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는 것은 UFO로 사람들이 착각할 줄 알고 모습을 드러낸 것. 즉 UFO로 지금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NASA에 포착된 용(곧이어 소개되는)은 구불텅거리는 모습인데 이는 사람 눈에 띄지 않으니까(사실은 셔틀 디이스카버리 호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줄은 모르고) 안심하고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기 위해 사가랴에게 나타난(눅 1:12) 또는 주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형상이었을 뿐이다(:29). 사가랴는 지성소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는데 갑자기 나타났으므로 두려워한 것이고 마리아에게도 천사가 현란한 광채로 나타났다면 본능적으로 당장 무릎을 꿇을 따름이지 "이런 인사가 어찌 된 일인고" 하고 의아해할 여유도 없었으리라. 삼손의 모친에게 나타난 천사도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 중 하나로 나타났으나 단지 그 "용모가 심히 두려웠다"는 것뿐이었다(삿 13:6).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도 그런 용모였을지도 알 수 없다. "무서워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이다. 


 

5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③
ㅡ추락한 후 "어디론가 유유히 갔다"ㅡ


또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이 거대하고 "기다란" 무엇은 일단 지상으로 번개같이 떨어져 내리다가 별안간 방향을 바꾸었고 지상으로 다가가면서부터는 스스로 어떤 에너지를 분사(噴射), 그 격렬한 반사작용으로 지상에 추락하는가 하는 순간 급격히 다시 상공으로 치솟은 후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생물체든 무생물체이든 자연법칙ㅡ여기서는 물리법칙ㅡ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면, 급속도로 떨어지는 하늘에서의 낙하 물체가 가속도고 질량이고 일절 무시하고 도중에 그 진로를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상한 따라서 초자연적 생물체이거나 아니면 그런 생물체의 조종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충돌" 후 "큰 몽둥이" 같은 것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고 말했는데 그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대충돌" 뒤 즉 6월 30일과 7월 1, 2일 사흘 밤에 걸쳐 서시베리아로부터 중앙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상공에 광채가 나는 이상한 물체 또는 빛이 서쪽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사흘 밤에 걸쳐 보여졌다 했으니,  폭발 지역에서부터 중앙 유럽을 다 지나가기까지 사흘쯤 걸렸다는 얘기이므로, 그리 빠르지도 않고 결코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용"은 서쪽의 어디론가를 향해서 지나간 셈이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으니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고공을 떠서 갔으나 그 강렬한 빛으로 해서 밤에도 환하게 밝았다는 것이다. 낮에는 태양이 비치는 시간이므로 그런 특이한 광채가 감지되지 못했을 뿐이다. 하필 서쪽만을 향하고 갔으니 대서양 쪽으로 간 것일까. 죽음의 "버뮤다 삼각 해역"이라 해서 유명한데, 그 곳과 관련이 있음 직한 일이다. 낙하한 후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이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고 하지 않고 그냥 공중으로 치솟아 사라졌다고만 한다.


이것은 낙하한 개체가 떨어졌을 때나 치솟을 때나 자기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강압적으로 내리 박혔다가 반사적으로 치솟아 올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즉 90도 직각으로 곧추 치솟으니 일정 길이로 치솟는 것이 보였으나 그것이 고공으로 빠른 속도로 올라감에 따라 목격자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같은 반사적 행동일지라도 영계(靈界)의 물체인 경우 잠재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자연물질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여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사흘 동안은 서유럽 그리고 시베리아의 서편은 밤이라도 대낮처럼 밝아 신문이나 책을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낙하 지점 동편은 그렇지를 않았다는 것이니 이는 그 빛 덩어리가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유유히 떠서 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앞에서 영물들은 의도적이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 몸은 자연적으로 광채를 방출하게 마련이라 했는데 이 경우 사단은 진창으로 심한 타격을 받아 의도적이고 무엇이고 전혀 그런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수 있다.


각종 증언에 따라 거기 맞는 해석을 하자니까 설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이기는 하나, 어떤 때 의식이 들 때는 스스로 광채 발산을 억제하다가, 서쪽으로 떠 가던 이 경우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어 모든 것을 방기한 채로 갔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한 광채가 발산되었는지 그 때의 내막이야 사단 자신이나 알지 우리가 어떻게 알랴.그래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기는 잡았어도 딴에는 아주 힘들게 흐느적거리며 갔던 것이 된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대낮 같이 빛 그대로를 쏟아내면서(이것은 의식적이 아닌 자연 그대로) 사흘 동안이나 힘들여 지나간 것이다.


6월 30일 오전 7시의 대충돌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 퉁구스카 인근 지역에는 이상 징후가 하늘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하늘의 전쟁이 끝나면서 갑자기 거기 그 곳에 용  곧 사단이 내리 박힌 것은 아닐 듯 싶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것을 알고 천사의 군단 중 일부 분견대 쯤이 그 곳으로 내려와 사전 점검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끝장이 난 것을 알아챈 일부 사단 수하의 악령들의 무리 곧 패잔 부대가 천사들이 휘몰아대는 막다른 골목인 이 곳으로 내리몰려 쫓기듯 내려와 서성거렸던 탓일까. 아니면 거기까지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일까. 낮처럼 밤을 환하게 비친 광명이 지상으로부터 80킬로 떨어진 구름에서 대부분 나온 것으로 증언하고 있고 이 구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6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④
ㅡ인명(人命) 피해 전무(全無)ㅡ

 

요즈음 인터넷 상에서 당시의 기록을 다시 점검해보니(2003/01/20)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그 대폭발의 후유증에 의한 것이고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희생자가 나지 않았다는 데에 그 중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중심부에 위치했던 한 나무꾼이 무사했다는 것이 보통 자연계 현상과의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폭심에서 15킬로 떨어진 곳에 있던 한 노인은 충격의 폭풍으로 12미터나 멀리 한 나무 속으로 날아가 팔을 형편없이 다쳤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1500 마리 정도의 순록 떼는 몰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퉁구스 폭발 당시 폭심(爆心)인 칼데라 분지 가까운 곳에 마침 퉁구스족의 한 나무꾼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던 것이다. 즉 사람은 죽지 않은 것이다. 칼데라 분지는 다름 아닌 퉁구스 폭발의 최중심부다.


만약 무생물인 운석 같은 것이나 떨어졌다면, 부상은 고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무생물은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데려가시는 방편으로 삼으실 수 있으나, 용 곧 사단이 자기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결국엔 영구히 "하늘"로부터 쫓겨나는 판에, 그 때문에 덩달아 사람의 목숨까지 해를 입는 "무질서"는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정신없이 쫓겨나 떨어져 내려오는 순간에도 잘못 떨어져 사람들이 밀집한 곳이거나 혹은 바다 속으로 추락하여 그 여파로 인명에 해를 준다면 안되겠기에 사단을 끌고 오던 천사(들)의 방향 바꾸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사단이 무슨 자비심이 있어 스스로 그렇게 방향을 틀어쥔 것이 아니다. 실상 아무 경황없이 지상으로 내리 박히는 판인데 이런저런 신경쓸 리도 없다. 사단을 사로잡아 지상을 향해 내리 꽂으려는 판에 방향이 잘못되면 안되겠기에 천사들의 조종으로 그런 위험 지대를 빗겨 가도록 하여 한적한 칼데라 분지 쪽을 향해 내리 박은 것이라 보면 틀림이 없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지상 충돌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에까지 일부러 육박해 왔다가 간신히 몸을 솟구친다는 것은 무슨 쇼가 아닌 이상 한 마디로 불가능하여 무의미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영물인데 용 곧 사단의 모습은 그렇게 기다란 청백색으로 나타나고 천사들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한다면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양쪽이 처한 상황이 다르다. 사단은 인사불성이나 그런 상태의 용을 끌고 내려오는 천사들은 그 고유의 왕성한 모습 그대로이니 초자연적인 영물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리 육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천사들을 비롯한 영물들은 자연법칙이 관장하는 인간 세계에 함부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모습을 드러내어도 볼 수가 없다. 일부러 인간에게 나타내려고 자기 모습을 조종해야 하는 것이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에 한하여 사람으로 모습을 나타낼 수는 있고 사단과 그 일당은 자기의 모습을 감춤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인간 파멸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 보면 자기 모습 즉 용으로서의 모양새를 드러내 보인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부득이해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저주 받아 배로 다니게 되고 흙을 먹게 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 또 용의 모습으로만 인간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을 속일 목적으로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난다고 바울 역시 그 편지에서 밝힌바 있다.


 퉁구스 사람이 해는 입지 않았지만 폭발 당시 기절 초풍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호기심에 복받쳐 칼데라 분지(폭발의 중심이라고 확인된 장소)의 습지 쪽으로 다가가서 보았더니, 하늘 높이 치솟는 수증기, 검은 연기, 소나기 내리 때리듯 하는 진흙탕으로 제대로는 보지 못했지만 습지 한가운데에서 하늘 높이 뿜어져 올라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용은 영물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시야에는 그 용의 전체 모습이 제대로 잡혀질 리 없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도 없이 퉁구스 폭발 때처럼 아무 경황 없이 당한 일이라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육안으로 관찰한 것인 만큼 거대한 용의 일부분만을 목격한 것이므로 그 물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는 용의 일부분이 그렇게 물줄기처럼 투명한 것으로 나타난 것인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사단은 영물인데 원칙적으로는 인간의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용으로서의 모습이 인간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저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고(애초에는 다른 영물들처럼 직립(直立) 보행이었으므로-영물들은 원래 인간을 위해 인간을 보좌하기 위해 대등하게 창조된 터였기에) 흙을 먹게 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으나 영역(英譯)에 보면,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육체를 만드실 때는 "흙(dust)"으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고 에덴낙원에서 각종 짐승들(영물들)을 만드실 때는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흙을 먹는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비슷한 즉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하면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되는 그런 고통스러움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단정해도 좋다. 어쨌든 사단은 이러한 약점을 감추기 위해 배로 다니는 굼뜬 동작에도 불구하고 전속력으로 움직여야 하니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계시록에서도 "큰 용"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당시 그 나무꾼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용이 아니라 용이 몸을 솟구치면서 올라갈 때의 엄청난 에너지의 초자연적 집합만을 직접 대했을 따름이다. 코앞의 거대한 몸집이 사람 눈에 잡혀질 리 없다.


이런 용도 천사가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환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이 일시 사람으로 변신하여 사람(여자)과 관계하여 자기 씨를 만들어내는(창 3:15) 짓거리를 자행한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의 "네피림"(6:4)이다. 다른 악령들도 물론 관여했다. 물론 의도적으로 자기를 인간에게 나타내었으므로 평범한 한 남자의 형상으로 그런 짓을 하다가 다시 제 모습으로 스스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퉁구스 충돌 때는 아무 경황 없이 당한 일이라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니 자기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여러 사실들에 대해 필요 없는 즉 분수에 넘치는 흥미를 느끼는 것은 금물이다. 실상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인생으로서는 <나의 구원>이 최대 관심사가 아니면, 아직 구원 얻지 못한 <다른 사람의 구원>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없다. 이런 저런 지식을 탐하고 누릴 여유도 없거니와 그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내일이 없는 인생에게 <오늘의 구원> 이상 가는 명제는 없는 것이다.
 


7
정체를 밝히는 열쇠 
ㅡ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팀의 늑장 출동ㅡ

 

위의 설명에서 사단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으로서 "영"(히 1:14)인데 마치 육체처럼 취급하여 설명해 온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기록에 사단이 아담 부부와 함께 저주를 받을 때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창 3:14) 것으로 저주하셨다. 바로 이 저주의 내용이 비록 사단이 영물(靈物)이지만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취급 받는 그런 것으로 앞에서도 설명했다. 더 자세한 것은 '12. 용(龍)의 정체-사단'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퉁구스 대폭발사건"에서 역시 못지 않게 기묘한 점은, 그런 무지무지하게도 엄청난 변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3,4,50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그 정체가 무엇인가 알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세계 정세가 러시아의 혁명을 위시해 점차 복잡다단해지기 시작하는 때이긴 했으나, 웬만큼 관심이 있어도 진상 규명이 있을 법한 일인데, 대운석(大隕石) 낙하로만 간단히 취급해 버리고 말았다가 뒤늦게야 여러 모로 생생한 폭발 흔적이  퇴색된 다음에야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조사 팀을 파견하는 등 수선을 피운 것이다.


때문에 그 사건의 엄청나고 해괴함에 비추어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자료는 고작 여기 소개하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이같이 늑장을 부렸다는 것은 무엇이든 호기심에 못견뎌 하는 인류의 공통적인 특징에 반(反)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세상 신(神)이 자기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함으로써,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냥 얼버무려 유야무야로 지나가게 하려 했던 결과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중요 증거들이 퇴색된 다음에야 빗장을 풀어놓은 셈이다. 1차 세계 전쟁(1914-18)이 일어났고 뒤이어 2차 대전(1939-45)이 일어난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성경의 예언대로 사단의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즉각 사건을 조사하여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도록 손쓴 것일까. 그리고 직접 관심을 기울였어야 마땅한 러시아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 "폭발"(이는 세상의 관점이고 우리는 "충돌"로 단언한다)의 주인공이 "지상으로 쫓겨난 <옛 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성경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런 글을 읽고 수긍하지도 않는다. 이 글을 읽었다 해서 동의한다면 그는 이미 성경을 믿는 사람이니 수긍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른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사단이란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이가 허다하여 사단을 막연히 어떤 '영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나 철통 같이 사단이 자기 정체를 감추고 있는지 알 만하다.


과거 선교사라 자처하고 한국에 나온 이들 중에서도 성경이 주장하는 귀신의 실체까지 믿지 않는 이가 있었다. 그러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라 자처했다. 그들 중에는 담배까지 즐기는 이들이 있었으니 알고 보면 놀랄 것도 못되지만. 그러니 사단이 그 "뱀"이요 그 "용"이라고 하면 불신자보다 더 황당하다고 하여 믿지 않는 판이다. 성경이 거듭거듭 이 사실을 강조해도 믿지 않는다(계 12:9/20:2).




8
정체를 밝히는 열쇠 ⑥
ㅡ1908년을 기준한 그 전후의 지구촌 상황ㅡ

 

사단과 그 일당이 천사장 미가엘과 그 휘하 천사들과 한데 어우러져 전쟁을 벌이는 것을 요한 계시록은 밝혔는데, 패배할 지경이고 보면 그 전부가 한데 엉겨 붙느라 이 지상 지배는 한 때 소홀히 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그 기간이 몇 십 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1908년 이전 몇 십 년 사이에 교회사상 괄목할 만한 대규모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세계교회가 인정하는 한국교회의 부흥(1907년), 그 이전에는 미국의 풀턴스트릿 기도회 부흥(the Fulton Street Prayer Meeting)이 그것이다(1857년). 교회 역사에서 믿음의 역사로 금자탑을 세운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헛슨 테일러(J.Hudson Taylor, 1832-1902) 등의 복음활동이 이 무렵 전개되기도 했다. 이것은 악령의 세력이 성령의 역사를 효과있게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전개하는 효과적인 통제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성령의 역사도 인간의 믿음과 그 심령의 순종 여하에 따라 비례하여 나타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반응하지 않는데 성령께서 단독으로 활동하시는 일은 없다. 사랑의 법칙에 의한 자유 의지 때문에 결코 강제하시거나 강압해서 일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8년 이후 세계 인류는 이전에 일찍이 없던 대규모의 학살, 살육을 회를 거듭하며 겪고 있다.


스페인 독감이라고 하여 5000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을 비롯해 1, 2차 세계대전, 러시아와 중국 대륙을 통한 소위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한 대 살육, 기타 등으로 이미 수없이 희생되었다. 물론 이 모든 불행한 사태는 하나님의 심판 차원에서 행해지고 욥기에서 분명히 밝히신 것처럼 사단이 아무리 분노하고 세상에 내려와도 그 자체로 이런 일을 인간 세계에 연출할 수는 없다. 모든 것 다 하나님의 심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살후 2:12).


장차 악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자처하게 하는 일대 사기극을 벌여도 심판 차원에서다(살후 2:12). 그리고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 심성이 더 여유있고 관용해져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 현상으로 치닫고 있다. 점점 더 거칠어지고 흉포해지고 조급해지고 짐승처럼 사나워 간다. 바울 사도의 예언 그대로다(딤후 3:3,4). 통제 불능의 무슨 나사 풀린 끔찍한 기계처럼 되어 간다.


악령들이 하늘과 땅에 분산되어 있었을 때와 이 지상 한 곳에만 밀집되어 있을 때와의 차이를 상상해보라.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단과 그 일당이 지상으로 내쫓기는 사실을 예언하면서 그 때에 지상에 "화가 있으리라" 한 것이다. "최첨단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각종 이기(利器)들이 그런 현상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양상이다. 이런 모든 진보발달은 사단이 그와 같은 최후발악적인 대규모의 속임수에 활용되어 철저한 인류 통제에 사용되어지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단을 통해 불의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단계라 했으니 더 무엇을 말하리요(살:12).




9

정체를 밝히는 열쇠 
당시 24세의 한 원주민의 증언
ㅡ"앞에 두 눈 달리고 뒤에 불길 뿜는 장작 같은 것이 공중에 날아가"ㅡ

 

(이상의 글은 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 간행 자료를 바탕으로 쓰는 것이나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우선 그 자료의 방대한 양에 놀라게 된다. 그 중에 보니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1908년 퉁구스 대충돌이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의 사단의 지상 추방이라고 단정한 것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사 간행 서책을 읽고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데 오랜 후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또 이같은 새로운 기록을 발견한 것이고 그래서 "그러면 그렇지!" 하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반 이바노비치 악시노프란 사람이 그로부터 59년 뒤(1967) 증언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그 기괴한 물체의 형상을 직감적으로 "마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작개비" 모양이라고 했으니 긴 형상이었고 그러므로 성경의 용어대로 "용(龍)"이었음이 분명하다.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기도를 하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 영문을 옮겨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가 정신을 차린 후 일단 거기를 떠났다가 다시 그 곳에 돌아오니 "마귀"가 비행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 큰 소리는 아니나 "트루우, 트루우" 했다 하니 (장대한 몸집과 땅으로부터의 고도를 감안하면 그리 작은 소리도 아닐 듯) 생각컨대 지상으로 내리 꽂힌 용이 정신을 차린 후 얼마 동안 슬피 흐느끼며 잠시 서성댄 것일까.


아무리 인간에게야 "신(神)"으로 군림하는 사단이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한 후 이 지구상으로 사정없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내리 처박힌 직후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싸움에 지고 난 다음의 비애를 그라고 아니 느낄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흐느껴 운 것이 아니라면 거친 숨을 몰아 쉬느라 또는 만신창이가 된 탓에 신음하던 소리였던가.


이 증언자가 증언하던 당시에는 90세가 넘은 무당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24였다 하니 66년전 사건 기억이 된다. 이 증언자가 증언하던 당시에는 90세가 넘은 무당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24였다 하니 66년 전 사건 기억이 된다. 나이가 젊은 때였으므로 당시에도 무당이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모종의 환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나 앞에서 열거한 대로 방향을 두 번씩이나 바꾼 것이라든지 그 모양이 원통 모양, 들보 모양, 굴뚝 모양 등 많은 증언자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는 점을 보아 환상이나 환각에 의한 것이 아님을 단정할 수 있다.


당시 생존 증언자 중 그와 두어 사람만이 유일하게 바로 현장에 있었던 당시의 목격자였기 때문이다. 증언자는 당시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그가 천주교 신자였는지 그리스 정교 교인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를 불렀다고 하는 것을 보아 직감적으로 "마귀"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증언자는 "비행기보다 빠르다" 했는데 당시 1960년대 그 지역 상공을 날던 소련 항공기에 비유한 것. 성경에서도 서술하고 주님 친히 확언하신 귀신들의 존재나 악령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 결론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따라서 이상과 같은 결론이 또한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 증언자가 본 바로는 "굵은 막대기" 모양의 이 "마귀는 앞에 두 눈이 있었고 꽁무니로는 불을 뿜었다". 그렇게 날아다니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었으니 상당히 높은 공중에서 용이 빠르게 헤맨 것 같다. 그리고 두 눈으로 인식되는 것이 그만한 높이에서도 보였으니 눈도 강렬한 빛을 낸 것 같고 눈망울이 굉장히 컸을 것으로 확인된다. 용의 눈이다. 어쨌든 그 몸이 엄청나게 장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천사들이 그를 끌고 내려와 그렇게 내리 박았다고 함은 그것이 내려올 때 방향을 바꾼 까닭인데, 정신없이 떨어져 내려오거나 그냥 황급히 쫓겨나 도망치듯 내려오거나 하면 그렇게 방향을 수차 바꿔가면서 낙하하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밀집해 있는 곳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분이 가득하여 내리 떨어지는 판인데 까짓 것 인간이야 박살이 나든 말든 신경 쓸 일이 아닌 것이다. 천사가 함께 함이 입증된다.


"Among other interviewed eyewitnesses of the Tunguska explosion, there was an elderly Evenk man named Ivan Ivanovich Aksenov, a shaman, who had been hiding in the taiga for many years from the Soviet authorities after the revolution of 1917. At the moment of the catastrophe, Aksenov, then 24, was hunting near the mouth of a tributary of the Chamba River some 40 kilometers south of the epicenter of the catastrophe. After the explosion, he saw an object flying down the Chamba; i.e., generally north to south. He called the object a "devil." "As I came to myself," recalled Aksenov in 1967, "I saw it was all falling around me, burning. No, that was not God flying there, it was really devil flying. I lift up my head- and see-devil's flying. The devil itself was like a billet, light color, two eyes in front, fire behind. I was frightened, covered myself with some duds, prayed (not to the heathen god, I prayed to Jesus Christ and Virgin Mary). After some time of prayer I recovered: everything was clear. I went back to the mouth of the Yakukta where the nomad camp was. It was in the afternoon that I came there..." The devil was going faster than airplanes now do. While flying, it was saying "troo-troo," but not loudly.

같은 내용이지만 다시 유념할 것은 그 불덩어리가 그렇게 지상으로 추락하여 굉장한 굉음을 낸 후 벌떡 몸을 일으켜 솟구쳐 올라갔음을 증언하는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충돌 현장 가장 가까이 있었던 원주민 두 형제가 있어 그들이 증언한 것이다. 이미 해가 솟아 있는 맑은 하늘인데도 그런 굉장한 굉음이 들려진 후 그의 말대로 하면 "두번째 해"가 이미 쓰러진 나무들만이 질펀하게 늘어진 산 위로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역시 아래 영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반사적으로 솟구친 용이 그 두 형제가 있는 쪽으로는 정면으로 즉 머리를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 부신 해처럼 공이 되어 솟아오르는 형태가 된 것이다. "장작개비" 형태가 아니었다. 신령한 몸의 형태는 원래가 그렇다. 바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형상도 "해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자칭 "마리아"라고 하며 예언을 하는 등 포르투갈 파티마 마을 인근에 나타난 것도(1917년) 목격자들이 모두 "해"가 그렇게 요술을 부리는 "기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상으로 쫓겨난 영물 중 하나가 - 사단이나 또는 다른 영물 - 그런 속임수를 벌였던 모양이다.


아래에 소위 "UFO"에 대한 언급이 나오겠지만 이 무당이 증언한 것을 두고 UFO가 아닌가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눈이 있고 뒤에 불을 뿜는다" 등의 표현에 유념할 일이다. 백보 양보해서 외계에서 온 우주선이라 하자. 그렇게 우주선이라 자처하고 나타난 것으로 이런 굉장한 소동을 일으키며 착륙한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실수해서 폭발하는 등 사고를 일으켰다 하겠는데 그렇다면 왜 유유히 그렇게 솟구치는 등 행동을 또 보였단 말인가. 그것도 나중에 서쪽을 향해 갈 때는 며칠을 두고 흐느적거리며 이동한 것이다. 며칠을 두고 갔다는 것은 용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해 전광석화처럼 행동 못한 까닭이다. 하기야 UFO 자체가 영물들의 변신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퉁구스 사건은 그 성질부터 다른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이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그 편이 결론을 내리기가 더 빠르다. 즉 세상이 아는 대로의 용의 모습과 소위 "외계인 도래(渡來)"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이다. 먼저 외계인에 관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단이 계획해 놓은 음모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곤(Dogon)족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우리가 몰랐던 아주 놀라운 천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는데 수 천년 전 외계로부터 왔다고 자처하는 괴물들이 그 지식을 전달해주었다는 것이고 이들 도곤 족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물들은 어떻게 그런 정확한 천문 지식을 갖고 있을까? 그러나 이런 것은 우문이다. 인간은 이제 겨우 망원경의 발달로 알게 되는 것이지만 영물들이야 능력이 출중하니 모를 리가 없다. 영적인 존재 자체도 부정하려 들 정도로 극히 한정된 지식과 지식의 수단만 갖춘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즉 소위 외계문명, 외계인, 외계인이 타고 오는 우주선 등은 사단의 오래 전부터의 복안이라는 것이니 외계인과 관련된 일체의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것이므로 이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결국 용의 모습을 우리가 이 퉁구스 사건에서 다시 확인하는 셈인데 이 용으로서의 형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그 나머지 하나다.


다시 말해 성경에 용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니 성경을 모르는 동양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그 형태도 소상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형상으로 용은 이따금 과거에 나타났었고 그래서 그 특이한 뱀의 형상과 같은 것이 퉁구스 사건으로 나타난 모습과 꼭 같은 점이 그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외계 문명을 말하지도 않거니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만을 중심하는 모든 말씀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외에 피조물로서 보다 더한 상위(上位)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이다. 우주라는 곳은 그 끝을 어림잡기도 어려울 만큼 인간 지식의 한계 밖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신비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니 성경은 그냥 빈 공간으로만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속이기를 잘 하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사단인지라 괜히 그렇게 허풍을 떨어 그렇지 내용은 아무 것도 없건만 그에 대한 무식을 악용하여 그럴 듯하게 말을 만드니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다. 이미 에덴낙원에서 뱀(용)은 인간의 무식을 악용하여 그런 그럴 듯하게 지어낸 거짓말로 인간을 속여 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 증언 당시까지만 해도 생존해 있었던 증인들의 증언은 아주 유용한 것이다. “하늘 전쟁”(계 12:7)의 결과 사단이 패퇴하여 지상으로 추락해 내려 온 것을 비빌로 덮어 둘 필요는 없으니(사단 자신으로서는 비밀로 감추려 했을 것이나), 따라서 이를 세세히 목격할 수 있는(“두 눈 달리고 뒤로 불을 내뿜는 장작개비 같은” 등) 증인(證人)이 전혀 없지는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인구 밀집 지역에 충돌함으로써 대량의 인명 피해는 없어야 하는 가장 적당한 위치를 정밀히 계측하여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천사들이 사단을 지상에다 내리박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Apart from the main explosion at a relatively high altitude, there were three or four additional low-altitude, and probably low-power, explosions. This is borne out both by the fine structure of the fallen forest field and by the testimony of some eyewitnesses who found themselves in the immediate vicinity of the epicenter. Chuchancha and Chekaren, two brothers belonging to the kin of Shaniaguir in Evenk, were sleeping at the moment of the explosion in their chum (a tent of skin or bark) situated on the bank of the Avarkitta River, very close to the epicenter. Suddenly they were awakened by tremors, whistling, and a loud sound of the wind.

"Both of us were very much frightened," Chuchancha told I. M. Suslov in 1926. "We began to call our father, mother, and third brother, but nobody replied. A loud noise was heard from the outside of the 
chum; we understood that trees were falling. Chekaren and me, we got out from our sleeping bags and were going to go out of the chum, but suddenly there was a very great clap of thunder. This was a first blow. Earth trembled, a strong wind hit our chum and threw it down. The elliun (the skins covering a chum) rode up and I saw something terrible: trees were falling  down, their pine-needles burning. Dead branches and moss on the ground were burning as well.

"Suddenly there appeared above a mountain, where the trees had already fallen down, bright light like a second sun.... At the same moment, a strong agdyllian, a thunder, crashed. 
This was a second blow. The morning was sunny, no clouds, the sun shone as always, and now a second sun! "With an effort Chekaren and I crawled out from under the chum poles and elliun. After that we saw a flash again appear and a thunder crash heard again overhead, although in another place. This was a third blow. Then there was a new gust of wind that knocked us down and we knocked ourselves against a levelled tree. "(A short time later) Chekaren cried out: 'Look up!' and stretched his hand upward. I looked in this direction and saw a new lightning, with an agdyllian. But its sound was not so loud as before. This fourth blow was like a usual thunder



10
ㅡ몇 가지 고찰점ㅡ
 

§  그렇다면 퉁구스 폭발 때 보인 것처럼 그 정도의 "뱀(용)"의 형체와 부피가 실제 에덴낙원에서 애초 아담을 대하던 그런 몸인가 하겠는데, 우리가 영계라는 실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고 이렇다 할 정보나 자료가 없는 만큼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추단할 수 있는 범위도 넓고 자유롭다 하겠다. 그러나 성경에서 밝히지 않는 것을 억지로 추단한다는 것은 별로 이득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일변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첫째는 사단이 저주 받아 그렇게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음"으로써 그 몸이 병적으로 비대해져 정상이 아닌 이상(異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단은 속임으로써 인간 구원을 저지하려는 자이므로 자기 정체를 감추려 하는데 그런 비대해진 모습을 인간에게서 감춘다는 것은 당사자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지만 그러나 저주가 저주되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런 이상 상태는 반(半) 영(靈) 반(半) 육체 상태에도 해당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즉 사단은 원래는 영으로서 인간의 눈에 뜨일 수 없지만 흙을 먹음으로써(실상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비슷한 상태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즉 사단은 전력을 다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인간의 눈에 그 모습이 발각되고 그 정체가 폭로되는 위험 부담을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움직일 때마다 전력을 다하는 괴로움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의 눈에 띄게 된 것이 이른바 "용"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의미를 우리가 모른다고 했지만 실상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의 원래 실상이 신령한 몸에 속하여 영생하는 것이었는데 범죄함으로 죽음에 이르는 이와 같은 흙에 속한 몸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었은즉(롬 5:12)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정상 상태에 있는 영물들과 달리 피조물로서의 지능 역시 정상 가동이 아니라 할 수 있어 모든 지식을 수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봄이 옳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정상 복구되기 전에는 그런 불가항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성경이 이와 같이 설명을 현재는 유보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는 양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 것이다. 마치 이런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것을 진실이 아니므로 얼버무리려 하기 때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그 정 반대임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기 지혜의 역부족을 부끄러워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육체인지라 인지의 발달도 다니엘의 예언(단 12:4)처럼 꾸준히 증가하는 자세로 오지 않고 갑자기 때 맞추어 급상승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


이 창세기 기록을 할 당시에도 최소한 오늘날 정도의 지식이 발달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써 모든 것을 설명했다 가정하더라도 그러면 당시 사람들 중 누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런 설명을 시도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겸손이 안전책이요 교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멸망의 지름길일 따름이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아담)도 에덴낙원에 있을 때와는 달리 그 몸이 이 지상으로 추방되면서 자연 물질계에 알맞게 그 몸이 축소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신령한 몸의 형태를 박탈당한 몸이므로 애초 지상의 흙으로 창조된 그 모습 다시 말해 지상에 널려  있는 각종 짐승 정도의 그런 몸집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 물질계의 조건에 맞추려면 여러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예컨대 우리의 몸집도 이 이상 커도 안되고 작아도 안되는 등) 이에 반하여 영계는 완전 자유의 세계라 할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후 얼마 안되어 이미 에덴낙원에서 그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환원된 것이다. 그것도 서서히 그렇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면 여자가 선악과를 먹었지만 금방 그 몸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 역시 여자의 말대로 하여 선악과를 먹었던 것이다. 먼저 먹은 여자의 몸이 금방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해 버렸다면 아담이 먹을 리 만무하다.


고로 서서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기 시작했으니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그 몸을 감싸고 있던 광채가 서서히 사라진 것이다. 사라지면서 아담 부부는 비로소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몸의 부피라 할까 그런 형태는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축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그런 축소 기운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시고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추방 당함과 때를 같이 하여 인간의 몸은 이 지구(자연계)에 적합한 몸집의 형태로 위축 또는 축소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무화과 잎사귀는 이 자연계에 속한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영계에 있는 무화과나무 잎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실 무렵에는 인간의 몸은 거의 완전히 현재의 규격대로 작아졌고 따라서 무화과나무 잎은 맞지도 않을뿐더러 "피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는 새로 생긴(인간 범죄로 죄의 대가인 죽음이 왔으므로) 철칙을 따라 양을 잡아(희생 제물의 상징으로) 그 벗긴 피 묻은 가죽 옷을 입히시게 된다. 가죽 옷을 입을 때는 인간의 몸은 완전히 현재의 형태로 되어 버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추방과 동시에 가죽 옷을 입히심이니 털북숭이가 아닌 인간의 피부를 자연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이제는 급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억지로 꿰어맞추었다고 하든 말든 성경이 말하지 않으니 이렇게 밖에는 알아들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앞에서도 우리 인간이 영계와 영적인 존재에 대하여 아무 지식도 없다고 했거니와, 이를 두고 소설을 쓰고 있다고 비판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모르는 것은 모르니까 그냥 덮어두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만 그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 생각해본 둘 중 어느 하나이거나 아니면 둘 모두가 해당되거나 그런 정도일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에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 역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계에서는 영계에서처럼 그런 신축(伸縮) 작용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유 분방함이 없는 고로 거대한 몸으로는 생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원래부터 영계에서 창조되었으므로 그 형태 그대로이니 이 자연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또 앞서 지적한 대로 이상(異狀) 비대증 다시 말해 인간이 저주 받아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자 병듦이 생기는 것처럼 사단의 영적인 몸이 우리를 기준해서 말하면 부어 오른 것(부종(浮腫), 부증(浮症))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까.


성경 계시록에서도 "큰 용"이라고 지칭하여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영물 중에 사단 하나만 크게 지으실 리는 없다. 그런 거대한 몸집을 끌고 더구나 배로 다니면서 인간의 눈에 발각되지 않고 자기 정체가 폭로되지 않고 다니자니 바로 그런 고통스러움이 저주인 것이다. 어쨌든 이런 거대함은 저주의 결과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고로 저주를 받아 비대해진 몸뚱이를 그나마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자니 그 고통은 크다.


이 보이지 않게 하려 한다는 것은 사단 스스로 원하는 바이니 왜냐면 그렇게 해야 인간을 효과적으로 속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영물이라 하더라도 이 자연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니(흙을 먹고 배로 기는 등의 저주로) 자연계에서는 중력이 작용하는 관계상 거대한 몸집이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성경이 이 용을 가리켜 크다고 표현한 것은 애초 창조하실 때 크게 나타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니라(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까닭) 이렇게 저주를 받아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신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이 그 어감(語感)에서도 묻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사단만은 아니니 그가 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그가 고통스럽게 만든 인간이 모두 그러하다. 인간이 범죄로써 죽음의 고통을 당하니 한 몸(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이므로)의 이치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을 당한다(롬 8:22). 인간을 구원하실 요량이 아니시라면 다른 피조물이나 범죄하지 않은 거룩한 천사들까지 고통의 신음성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신음은(우리말 번역은 탄식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아이 낳을 때의 극심한 진통을 의미하는 것) 인간이 구원 받음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장차 한 몸으로 복귀되어 있을 인간(구원 받을 자)과 어차피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그 때문에 즉 한 몸된 이치로 받는 고통인 것이다(고전 12:26). 하나님께서도 이 거대한 우주를 한 몸의 체제로 만드시고 친히 그 머리로 계시니 그 머리되신 특성상 당연히 인간과 함께 고통 받으심이요 그리스도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요 그 사랑의 확증이다.


왜 우리가 사람 살리는 고상한 일을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고난 받게 되어 있는지 그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채움이다(골 1:24). 또 그와 같은 근본 이치와 더불어 인간의 비극적 현실 곧 사단에게 압제 당하여 사단이 인간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함으로써 우리가 이에 맞서 전쟁하는 마당에서 받는 전상(戰傷), 전화(戰禍)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서 각종 고난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의 구원이 불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지만 실질상으로 한 몸으로서의 함께 당하는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고난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신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친히 사람 살리시는 고난 중에 계심이다.


악령들은 한 몸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로 인해 받는 당연한 고난이다. 고로 차이는 생명 있는 자들은 이 한 때 고난이 그치면 그 다음부터는 영원히 고난이 없고 사라지지만 범죄자들은 영원히 그 고난을 면할 수가 없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지금은 모름지기 고난, 고통의 때이니 이 세상에서 위로 받는 것을 한사코 멀리할 일이다. 다시 말해 위로(고통을 면하는 의미만 아니라 환락으로 둔갑시키는)가 장차 나타날 저주로 역전되기 때문이다(눅 6:24,25/16:25). 그래서 웃는 자가 화가 있으니 장차 울 것이라 하셨고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게 되리라 하신 것이다. 모름지기 남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울면서 호소하는 제사장의 기도 책무를 다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면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울며 기도하면서 이렇게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빌 2:12) 되어 있으니 참으로 삭막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성경의 안위(위로-롬 15:4)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의 지혜"(딤후 3:15)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벧후 1:21). 즉 십자가로 향하시던 주님께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마음에서 우러나 하신 말씀 곧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또한 경고가 되는 까닭이다.


오히려 낙심천만이 되어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 하셨으니 우리 역시 능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터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하는 같은 편지에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하였다.


이것이 생명 있는 자, 생명을 누리면서도 생명의 일의 한 부분으로서의 고난을 거치고 있는 이들의 특징인 것이다. 생명력 약동의 증거이다.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먹고 산다"는 아주 매혹적인 긍정적인 말이 있지만, 과연 우리는 넘치는 희망 가운데 힘이 넘쳐 노래하고 춤추는 삶이기 때문이다(롬 8:24,25). 생명의 낙을 누려서 '삶'이 아니라 고난 받는 중에 맛보는 또 하나의 색다른 별미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이런 생명이 없으므로 잠시 한 때뿐인 이 세상 위로(이 세상 지나면 영원히 다시는 이런 생명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게 되므로)에 허겁지겁 전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믿는다는 사람이 이런 세상 사람의 일을 따른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다는 증거다.


사단의 육체는 저주로 그러하다 하더라도 사단의 능력은 이전과 같아 아무 제한이 없다. 그런 영물들로서 처음부터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기타 형상으로 자신을 변환시킬 수 있는 능력도 물론 포함된다. 그렇다면 사단 역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축소 확대할 수 있다면(신령한 몸의 특성으로) 그리고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할 의도라면 항상 자기 몸을 축소시키면 될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그들이 그렇게 축소할 때는 짧은 순간에 특정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지 평상시에도 그렇게 축소한 채 활동해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 정도로 외에는 제대로 능력을 작동시키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을 때는 그 세계에 걸맞게 풍부한 체격의 정상적인 형태 즉 사람을 위해 그 조력자로 창조하심 받은 "짐승들(영물들)"과 같은 즉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체형(體形)을 유지했었다. (신령한 몸은 그 확대 수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한 몸집은 이런 자연계에는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미관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에 부적합하다.


악령 사단을 결코 공포의 대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단지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할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요 사단은 영물이라 신(神)으로 그리고 지배자(“이 세상 임금”, the prince of this world)로 군림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아담 아래 있던 영물이요, 상대적으로 인간이 미약하기는 하나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이다(요일 4:4).

§  그리고 영물이라 해서 무조건 '보이지 않는 것'으로만 간주할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의 몸이 그런 신령한 몸의 대표적인 예로서 자유자재로 보이게 할 수도 있고 그 모습을 감출 수도 있었던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영물인 사단이 이미 하늘에서 쫓겨나 자연계인 지상으로 강제 추방당하는 몸이고 보니(그러나 애초 영계에서 조성되어 영적인 몸이 되어 있는 영물은 사람이 자연계 곧 지상(地上)으로 내쫓기면서 그 몸 즉 체형이 변화하는 것 같은 그런 현상은 없으니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가시권(可視圈) 내에 충분히 잡힐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퉁구스카 대 충돌의 진상인 것이다.


더군다나 격렬한 전쟁 중에 그것도 강제로 내쫓기고 게다가 메어치듯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와진 판에 제대로 몸을 가눌 겨를도 없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만신창이가 되어 떠밀려 내려오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스스로의 의지 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이러고 저러고 할 경황이 없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적나라하게 그 거대한 몸집 그대로를 사단은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중도에 방향을 바꾼 것을 보면 그 자신 혼자 그렇게 떠밀려 내려온 것이 아니라 강대한 천사에 의해 우리로 말하면 결박된 상태에서 사정없이 끌려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상 가까이에 이르자 힘껏 내동댕이쳐졌으니 소동이 안벌어질 리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되는 저주의 결과는 비록 사단이 영물이지만 준(準) 육체(자연계에 속한) 급(級)의 육체로 전락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실제 자연계에 속한 생물은 아니면서도( 때문에 가상(假想)의 동물로서 여겨져 왔으나) 누구든 그를 목격한 목격자가 있어 증언을 했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고 성경이 또한 그렇다고 명백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는가(계 12:9/20:2)! 더 이상 존재로 용이 인식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없이 지상으로 메어쳐져 낙하하더라도 영물로서의 비상한 능력과 힘이 무의식중에 본능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상에 닿으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몸을 솟구치는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창조된 이래 상상을 초월한 봉변을 당한 까닭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싸움에 패퇴한 나머지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숨긴 것이 서대서양, 미국 동쪽 버뮤다 삼각지대 바다 속 다시 말해 소위 그 '마(魔)의 삼각지대'인 것이다.


또한 그곳은 사단이 옛적부터 사용해 왔던 그의 지상(地上)에서의 본거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퉁구스카 봉변을 당한 뒤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 쪽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괴변들이 이 사단의 짓거리인 것이니, 자기가 은신하고 있는 곳에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자기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 곳은 오래 전부터 악령의 지상 활동 본거지처럼 보인다. 어쨌든 배든 항공기든 거기 가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아닌가. 크리스토퍼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 1446-1506)가 이 곳을 처음 지나간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바다가 갑자기 이상한 빛으로 환해지더니 굉장히 큰 불덩어리들이 바다 속으로부터 연속 튀어 올랐다 한다. 그 외에도 수중(水中) 괴물이 배를 공격하여 수부(水夫)들을 삼켰다는 것이 범선(帆船) 시대의 많은 이야기들이다.


때문에 그 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귀의 지상 활동 근거지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몸을 숨기고 있는 바다로 근접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여 바다 저 너머로 가면 낭떠러지쯤으로 오래도록 인식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는 둥글다는 생각을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회자되는 신비하거나 기괴한 성격을 띠는 옛 설화나 민담처럼 되어 있는 것을 훑어보면 대개 이와 같이 악령들과 연관되어 있음이 아닌가 거의 단정에 가까운 추론을 하게 된다.


콜럼버스가 미 대륙 발견시 그 곳을 지나는데 불기둥이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나다가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적고 있다. 선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무서움에 떨므로 이들을 진정시키기에 애를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나침반이 흔들리고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단은 그 때 당시도 "여기 저기를 다니는"(욥 1:7) 지상에서의 활동을 마친 후 자기 소굴로 귀환하는 상태였던 모양이다.


이 사실은 "과학으로 여는 신비의 세계 3권(이종호 저, 2006년 도서출판 문화유람 간행)"에 나와 있음을 최근에야 그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고 발견했다. 이 때는 용이 그 스스로 바다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것이었으므로 바다에 아무 요동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시베리아 퉁구스 충돌 때처럼 타력에 의해 세게 메어쳐지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니 만일 그러했다면 그 때 콜럼버스가 목도한 바다는 천지개벽이나 하나는 듯이 요동을 치고 콜럼버스의 배는 당장 요절이 났을 것이다.


소위 버뮤다 삼각 지대에서 항공기와 선박들이 실종되는 사례가 다른 해역에 비해 유별나게 심한 것도 아니라면서 과학적인 진상 규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이상 콜럼버스가 목격한 것과 같이 각종 기괴한 현상이 그 버뮤다 해역에서 일어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 결론은 이상과 같이 내려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방면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우리로서는 더 이상 무어라 말할 것은 없다. 믿고 싶은 사람은 믿을 일이요 말고 싶은 사람은 또 그대로 할 일이다.


그 기다란 발광체가 시베리아로부터 유럽을 거쳐 서쪽으로만 갔다고 하니까 하는 얘기다. 이 "마의 삼각지대"의 경우 실종되는 사람들은 갈데라 분지에서도 생존한 그 나무꾼과는 다르다. 졸지에 일어난 그 때 당시와는 다르게 이제는 죽을 사람만 거기 가게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함부로 그리고 절대로 인명을 단절시키는 일은 그의 소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죽을 때가 되니 사단도 손을 대는 것이다.


몸을 그렇게 바다 안에 감추었다고 해서 사단이 다시는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놓고는 수시로 거기를 들락거리려 한 것이다. 위의 콜럼버스가 본 광경이 그런 예에 속한다. 밖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귀환하는 광경이라 할 것이다. 반드시 버뮤다 3각지대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 장소를 유달리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옛 사람들은 용이 바다 속에서부터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기에 “용의 등천(登天)”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사단은 준(準) 육체(자연계에 속한) 급으로 전락되어 있어 여차하면 얼마든지 인간의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창세기 기록에서부터 에덴낙원의 땅("ground"-땅 자체가 영계로서 영적인 것)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되어 있는 영물들이지만 마치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물들이 스스로 자신을 변형 또는 변환시켜 인간의 육체로도 전환시킴으로써 자식들을 낳은 것이 곧 "네피림"(창 6:1-4)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대칭형으로서 자연계와 전혀 별개의 세계 또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관련이 분명 있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적 존재가 되어 있는 인간(아담)을 위해 에덴낙원(영계)이 창조되었으므로 거기의 동식물 역시 이에 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 위주(爲主)다. 그러므로 영물인 사단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무리하거나 억지의 해석은 아닌 것이다.


천사들을 "영"(히 1:14)이라 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이시라(요 4:24) 할 때는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즉 가장 완전한 존재 형태를 가리키므로 이와는 또 별개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에 대한 대칭 개념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반드시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로 되어 있다. 천사들을 영이라 함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영계에 속한 육체 즉 영적 육체를 말함이다.


하늘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악령 일당은 아직도 당연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엡 2:2)이다. 그들의 그 "공중"이라는 영역이 이 지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달까지 포함해서 아니면 태양계까지 망라하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은 이런 공중을 말함이 아니라 에덴낙원이 존재하는 그 영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에덴낙원의 위치도 애초 아담이 처음 에덴낙원에 들어갈 때와 현재가 다르다고 해야 옳다. 왜냐면 그동안 아담의 범죄로 인한 추방으로 크나큰 변동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는 창조 직후의 변동이므로 그 변동의 폭이 클 수도 있다.


이집트 신화에 관한 한 토막 내용을 우연히(의도적으로 그것을 연구하지도 않았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보니 거기에 이집트 신들(이 모두 "네피림"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의 인간과의 대화에서 에덴낙원이 처음 이 지구와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영물들에게서 나온 소리라 인정한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성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호기심이 동하더라도 그런 것에 의존할 일은 아니다. 악령들은 어디까지나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들로서 인간 멸망이 그 유일무이의 목표이다.


그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악랄한 함정, 올가미, 덫에 걸려든다는 의미가 다분히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런 것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임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요 20:21) 즉 기도하고 전도하기 위함인 까닭이다.


§  기기묘묘한 것은 지구상에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龍)"이란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임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런 특이한 의미에서는 유일한 '짐승'이다. "용꿈을 꾼다"는 말도 있다. 동양에서는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만들어 주는 장본인으로 여겨 길하고 상서로운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 임금이 입는 옷이 바로 용의 무늬를 그려낸 "곤룡포"라 하지 않는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는 내게 넘겨진 것"이라 한 그대로다.


세상 사람은 무조건 이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바라니까 길한 것이지,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바로 불구대천의 인류 원수인 것이다. 자기 손위이었던 아담 곧 사람을 자기 밑에 깔고 앉아 멸망하기로 되어 있는 자기 운명을 만회해보고자 하는 가증스러운 자다. 동양에서 "무슨 띠"니 하는 그 12지에서도 다른 짐승은 다 우리가 아는 짐승들인데 거기 유독 '용'이 당당히 끼어 있는 것이다. '해태' 같은 것도 영물이라는데 "용"만이 일상화된 개념이다. 각종 종교에서 그 권위를 상징하는 모양새로도 용의 그림이나 조각이 안들어간 데가 거의 없다.


서력 기원 전후 또는 그 이전에도 역사의 기록에 보면 "길다란" 발광체 모양을 한 불덩이가 천공(天空)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장관(壯觀)이 간혹 인간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앞에 언급한 대로 인간의 눈에 발각되고 폭로된 사단인 것이다. "몸 사면에서 광채와 불이 나며 특별히 앞 부분에서 불을 뿜는" 형상이었다 하니, 코(어떤 목격자는, "입")에서 불을 뿜고 있는 형상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고로 용의 거동이 역사적 실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단이 당황할 리는 없다. 성경이 그렇게 거듭거듭 그 용이 바로 사단이라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보다 사단의 말을 더 믿는 것을 보라.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 그러하니 세상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면 오늘날까지도 용을 사단이라고 곧바로 지칭하는 이는 거의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힐 정도로까지 '신비한' 것이다. 이 신비의 정체와 실체는 다름아니라 사단이 모든 인생들의 마음을 조종하여 자기의 정체를 능히 감출 수 있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고로 우리와 사단과의 전쟁은 같은 피조물끼리의 싸움이지 상대가 안되는 것끼리의 아웅다웅이 아닌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힘은 상대가 안된다. 악령들은 영이고 신이고 우리는 육체다. 그러나 정작 싸움의 본령(本領)은 육체적인 힘에 있지 않고 정신력, 영적인 힘, 우리의 사랑과 믿음에 따른 의지력(意志力)에 있는 것이다(엡 6:12). 그러니까 싸움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일방적이므로 그것을 싸움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 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선한 싸움"(딤후 4:7)은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 대 불의의 전쟁이니 하나는 불의이고 하나는 정의다. 그러므로 신바람 나는 전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부득불 정의 쪽이 "약하다"(고후 13:4). 오직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데에서 자기의 강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내 능력(무소불능, 무소불위, 천하무적의)이 약한 데에서 온전하게 된다”(고후 12;9) 하신 그대로다.


거듭 강조하지만 물리력이 아닌 정신력 또는 어떤 악조건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의지력 이것이 진정 승리요 최강자의 기품(氣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전쟁을 하고 있고 그런 의미의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위치가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이는 당연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누구도 힘으로는 당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 의기(意氣), 기력(氣力), 신념, 의지력이 진정 강한지 여부가 저울질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함과 같이 의를 사랑하고 불의, 불법을 미워하는지가 가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다시 출생하고 그런 사람으로 새로 창조됨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 아들됨'이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면 이런 식, 이런 의미로 사단과 전쟁을 벌일 수도 없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다. 죄인들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 그래서 자진 그 약함에 함께 함으로써만 그 죄인을 구원해 내어 의인되게 할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부득불 우리가 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고난의 대상이 되고 표적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고후 13:4)으로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대로다.


그러니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모든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강함'이다. 왜냐면 우리의 싸움의 목적은 사람들 구원에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음이다. 또 사단 역시 인생들 구원 얻지 못함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역시 수단방법 가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터이다. 따라서 인간 세상의 전쟁처럼 땅(領土) 따먹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느냐 못하느냐 또는 이를 막느냐 못하느냐에 서로 일치가 되기 때문에 제대로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특유의 “약함”이 도리어 ‘강함’으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강하여 이기기 위해서 도리어 약해지는 전략전술이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12:10)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이라고 하면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본분 즉 사람 살리는 아버지 일을 끝까지 이 세상에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다하는 것이니, 세상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이상 이런 사람 살리는 우리의 일을 좌시하고 있을 리도 없다. 고난을 뒤집어 쓰게 하는 등 갖은 방해를 다하고 발악을 다하고 핍박과 죽음을 가한다. 물론 사단도 우리의 약함이 강함인 줄 잘 알고 있다.


고로 그로서는 고난을 가하고 죽음에 몰아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런 고난을 목도함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을 중단하고 또는 믿는 일을 버리도록 유도함 즉 위협을 가함에 있는 것이다. 사단이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을 맛보신 후 모든 것을 취소하시고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도록" 만들자는 것이 그가 진정 바라는 바였던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가 믿음을 지켜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어떤 고난이든 당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에서 사단의 당혹감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신념대로 내가 마땅히 할 일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하는 자가 스스로 쳐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눅 16:16/마 11:12). 따라서 이런 식으로 천국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사람마다"("every man, everyone"-눅 16:16) 그렇게 한다 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하는 것이(요 4:34/20:21,22)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고, "뜻을 행함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마 7:21).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지 않았으면 혹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침입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로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는 필요 불가결이다. 따라서 오직 양자 택일뿐이다. 즉 고난을 통해 순종함으로써(빌 2:12/히 5:8,9) 구원을 이루느냐(빌 2:12), 아니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아들로서 순종하여 아버지 일을 하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반드시 사단의 훼방을 받고 필연적으로 고난을 무릅써야 하는 사단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들을 원하신다. 순종하지 않을 바에야 "이 돌들로도" 능히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마 3:9).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그래서 모든 올바른 것(의, 義)을 사랑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은 각자 스스로가 결단하고 선택하고 끝까지 유지 보전해야 하는 문제다. 핵심이 사랑이므로 이 사랑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이지 남이 대신해주는 법이 없다. 그리고 사랑하면 반드시 미워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 중심'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 중심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미워하게 되면 자기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것은 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스스로 미워한다는 말이니, 다시 말해 억지로 자기 부인을 하려는 것은 자기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므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다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에 있는 까닭이다(:15).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악인이고 죄인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의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 즉 죄인으로 있어 자기를 위해 살아도 구원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악인을 구원하시지 않고 "죄인을 구원하시며"(딤전 1:15),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8). 때문에 바울 선생은 "선을 행해야 영생으로 보답하신다"고 천명한 것이다(롬2:7,10). 앞에서 말한 대로 '약함'을 '강함'으로 여겨 세상에 대처하니 필연적으로 "참고 선을 행해야"(:7) 함이다. 보통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 하신 그대로다. "나를 믿는 자는 생명,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라 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런 의인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0). 바로 그 하나도 없는 의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면 그것이 의인이다. 자기를 위해 살면 그것이 죄인이요 악인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살면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가 없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으로서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다 하였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고 단언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얻었다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으로서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뜻이다(고후 5:15). 이것은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니고 믿는 즉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지적한 그 "우리 중"에는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온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현재도 죄를 짓고 있는 여전히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너는 의인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억지로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것을 보통으로 미워하시지 않는 사실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을 미워하신다.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죄인이 의인일 수 없다. 의인은 바울이 천명한 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거듭 설명하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왜냐면 모든 악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 발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오직 한 가지 의미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에서 몇 차례나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분이니 나는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뜻을 따라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니 어찌 악(惡)이 될 수 있으며 선(善)이 아니될 수 있으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이 그 뜻인 것이다. 솔로몬이 바로 그렇게 했을 때(왕상3:5-13)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한정 없이 주신 것이 그와 같은 사례다. 사랑을 사랑으로 화답하시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호응함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그 어디서나 언제나 통하는 삶의 철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그렇게 화답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다. 무엇이 믿음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솔로몬처럼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함이니 곧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새 생명"(롬 6:4)의 새 삶이 시작됨이다. 사랑은 반드시 사랑으로 화답되기 때문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 했고 따라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다"(고전 8:2,3) 하는 것이다.


또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요 14:15) 하셨고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게 될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게 될 것이라"(:21)고 거듭거듭 같은 말씀으로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 곧 죄 짓는 죄인을 버리신다고 앞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물론 죄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요 의인을 부르려 오신 것이 아니니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하니 이제부터는 의인이 아니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만드시고자 오신 것이다. 의인을 만들어 그 의인을 구원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대로의 믿음은, 그 믿는 순간 하나님의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함 즉 그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대로 행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상대이신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고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음이요 따라서 믿지 않음이다. 나중에 솔로몬은 이 사랑을 버리게 되니 이는 우리에게 큰 경계가 된다. 중도에서 그 사랑 그 좋은 믿음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항상 '믿음'을 '사랑'과 '순종'의 동의어(同意語)로 성경은 취급하는 것이다.

본디로 돌아가, 사단이 신(神-고후 4:4)이고 우리가 육체라는 것은 오직 상대적인 의미일 뿐이다. 인간 역시 사단과 똑같은 신령한 몸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물들은 이러한 인간을 위해 인간과 같이 되려고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은 본디의 신령한 몸을 잃고 원래의 그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 왔고 사단은 그 신령한 몸 그대로 있다는 이 차이뿐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제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새 창조로써 아담의 원 위치 즉 영물들 위에 군림하던 바로 그 위치에 복귀된 것이다. 당장 원수 사단을 짓밟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너무 싱거운 싸움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 겨룰 싸움이라면 하나는 육체적인 힘 하나는 정신적인 힘으로 서로 상이한 힘으로 대치하여 어느 쪽이든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자기의 그 위압으로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즉 하는 수 없어 사단에게 절하도록 나를 만듦으로써 승리하는 것이고 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사람들을 살려 냄으로써 승리하는 것이다. 정의와 불의의 싸움으로서 대등한 대결이니 얼마나 신바람 나고 보람 찬 일인가. 앞서도 지적했지만 사람을 살리느냐 아니면 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느냐,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여기에 달렸다.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고 실제가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우리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용이 아닌 다른 영물) 확인하기도 했지만(그들의 각종 여러 가지 흔적) 세상에 알려 경각심을 고취하려 해도, 아예 처음부터 믿으려고 않고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지를 않으니 말 그대로 두 손 놓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구원의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도 구원도 없는 영원한 고난의 세계가 지금 모든 인생들을 상대로 하여 기다리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 무서운 현실을 믿으려고 하지를 않으니 어찌하랴. 노아가 당시 세상 멸망을 아무리 외쳤으나 듣지 않고 노아 방주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짓기까지 했으나 대홍수가 닥치는 순간까지도 믿지를 않으니 어찌하랴.


홍수가 정녕 임하는 줄 믿고 알았다면 당장 모든 것, 모든 일 집어 치우고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자기 생명 건지는 일 곧 배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을 터이다. 그러나 믿으려고 하지를 않으니 어찌하랴. 주님 오실 때도 세상의 멸망이 임하는 것을 믿지 않고 여전히 장가 시집가고 집 짓고 그래서 이제까지 해오던 일을 그대로 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셨다.


소돔 고모라가 갑자기 망할 때에도 롯은 밤중에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 사위될 세 사람을 모두 찾아 가 이 시급한 사실을 알려 주었으나 그들은 장인이 농담하는 줄로 알았다고 성경은 적고 있다. 장인인지라 평소에 그들은 롯을 잘 알고 있었던 관계로 갑자기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롯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면 틀림없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모르면 그 모르는 것을 알려 줄 때 고맙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 모르고 있는 대로의 바로 그 '현실'을 '믿고' 있는 관계로 '그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새로 나타날 때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둘은 서로 화합하여  모르는 것은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순리를 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를 배척하여 갈라 서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갈라 서니 어느 쪽이든 자기를 정상이라고 '믿을' 때는 상대를 비정상이라 단정하기에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미쳤다"(행 26:24) 하고 더 심한 언행도 불사하게 된다. 바울에게 대한 것처럼 "이런 놈은 세상에 살려 둘 자가 아니라"(22:22)고 하기까지에 이른다. 노아는 당시 세상에서 홍수가 나기 직전까지는 완전히 돈 사람으로 취급되어 "세상에는 저런 미친 인간도 다 있다" 하고 아주 '세상의 웃음거리'의 대표적 표본 거리로 삼아 재미있어 하고,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구경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노아가 당시 그렇게 배까지 만들면서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 들은 바 경고를 전달하여 증언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노아를 믿는 자가 없고 단지 노아뿐이었기에 그렇게 조롱하는 것으로만 그쳤지 만일 믿는 이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더라면 세상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잡아 가두고 매질을 하고 추방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했을 것이 틀림없다.


노아만 아니라 그렇게 노아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 역시 세상을 나쁘게 물들인다 하여 똑같이 핍박함으로써 더 이상 그런 "사회의 이단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하려 했을 것이다. 바울 사도에게 그렇게 핍박한 것이다.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 전에 마치 자기도 그렇게 죽고 말 것을 예언하듯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고 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행 7:51,52) 하고 외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천지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그 위험을 알리고 경고를 하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요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고 절대로 세상의 영합(迎合)을 받지 못하고 인기를 누릴 수 없는 일임이 명백해진다.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한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부터 "너희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마 10:36-39) 하신 것이다. 믿는 자는 자기에게 경고를 해 주어 자기의 목숨을 건져 준 것과 같은 큰 은인으로 생각하지만, 반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경고하신 바와 같이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면 당장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는 판이니 이 세상에서 아무쪼록 편하게 잘 살고자 하는 자기에게는 크나큰 장애, 걸림 돌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알리면 원수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지금까지 잘 지내 온 것처럼 정다운 친구요 살뜰한 가족이요 이웃이다. 그러면 그런 불이익을 고려해서 그런 당장 눈앞의(인생의 목숨이 오늘 이 시간 이후의 일도 모르니까) 위험을 제 때 알리는 일을 아니하고 장차 오는 심판을 일러 주어 경고를 아니하고 자기 혼자만 구원의 지식을 알고 있으면 과연 주님께서 이해하실까?


그런 경우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위에서와 같이 이미 선언하신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가 양심으로 판단해도 당장 그런 대답이 우리 스스로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과 적대 관계가 된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확정되어 있다. 당장이 아니면 조만간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살전 3;4/2:14).


바울 사도도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런 숱한 고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는"(고후 1:8)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인데 어찌하랴(고전 9:1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아 이 세상에서 핍박도 겸하여 받든지(막 10:30), 아니면 핍박도 아니 받고 구원도 아니 받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멸망하든지 오직 둘 중 자유 선택일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


따라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어도 주위로부터 핍박이 없을 때는 내가 실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거나 여하튼 어딘가 비정상이라고 스스로 진단하여 단정하면 틀림없다. 그 경우 복음을 잘못 믿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믿고 "다른 영"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부지런히 진단할 일이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믿으니 성경대로 또는 참으로 믿는 이들처럼 같은 말, 같은 소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기는 믿어도 주님께 "합당치 아니하여" 이미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 있으므로 조만간 틀림없이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니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시는 무자비한 선고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세상과 사이 좋게 잘 지내려고 하는 이마다 세상 영광을 사랑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 자기를 위해 사는 악이 되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없는 법이다(요일 2:15).


천지를 모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여 장차 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위험을 미리 알리는(눅 3:7) 일이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음을 위에서 말했거니와, 이 세상을 지배하여 신으로 군림하여 인간의 마음을 완전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는 사단에게 첫째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놓아 둘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항상 이 세상에서는 약(弱)함을 다시 강조한다. 또 믿는 사람은 믿음과 구원의 특성상 항상 소수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기본 요인으로 지목되는 바 세상에서 강하고, 지혜 있다는 세평(世評)을 듣고,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존귀하다고 세상이 일컬어 주는 사람들은 거의 믿는 자가 없음을 성경도 증언하고 있다(고전 1:26). 왜냐면 세상을 사랑하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의 하나로 그 교인이 되어 있을 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집단에 가입하여 자기를 구원 받은 자로 태평인 자로 스스로를 속이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실제로 믿는 이들 중에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친히 미리 말씀을 하셨는데(마 7:21,25:45) 처음부터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야 부지기수다. 그래서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히 4:11) 하신 것이다. 그냥 믿는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힘쓰라”는 경고를 마땅히 되새길 일이다.




대들보라고 생각(착각)해서 그렸기 때문에 대들보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일 뿐 실제는 용

중세기 유럽 어느 지역에서 공중에 나타난 것을 어느 화가가 보고 기억 나는 대로
그려 둔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인터넷 검색). 퉁구스 사건 당시도 증인들 중
이런 묘사를 하고 있다. 즉 충돌을 일으킨 불덩어리가 들보 같
은 형체인데
거기서 불꽃이 이글거리고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믿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고 임박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믿지 않는 것이 무슨 근거가 있어 믿지 않는 것이 아님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온 세상이 지금도 태평연월을 구가하며 희희낙락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이유 없이 그렇게 할 뿐이다.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것이다(전 9:3). 따라서 이 자체가 사실은 얼마나 공포스러운 현실인가! 다시 말해 사단의 완전 장악 아래 꼼짝도 못하는 인간 실상이 아닌가! 악령 사단의 장악 아래 놓인 인간 세상의 비절참절한 비극 그것이다.


악령 사단을 인정하지 않거든 이 세상을 논하지 말라. 성경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거든 인간 세상을 아예 입에 담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탁상공론, 전적으로 무의미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유, 자유!" 한다.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자유가 속박되고 억압당하기 때문이라는 구실을 붙인다. 그러나 현실인즉 악령 사단의 완전한 노예가 되어 있는 실상은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성경적인 바른 안목으로 세상과 세상사를 대할 일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의 진리도 모르는 일반 세상 사람들처럼 하다가는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악과를 입에 씹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할 줄이야 아담 자신도 꿈에나 생각했으랴.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대중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다수(多數)가 '정의'로 통하고 '진리'로 통하는 것도 무시 못할 현실이다. 반면에 소수는 항상 진리로 대접 받지 못하고 정의일 수도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악령들이 인간과 접촉하여 자식들(네피림-창 6:4)을 생산하여 이 세상에 군림하게 한 것은 이런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간교(奸巧)한 사단은 또 이런 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이단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소수로서의 핍박'을 받게 함으로써 진리 연(然)하게도 만든다. 사단은 생각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속임수와 거짓을 있는 대로 그야말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자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신(神)으로 군림하는 것은 그의 영적인 힘이 크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얼마나 허약하고 무가치함을 상대적으로 나타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신(神)으로 군림하여 이 세상을 주름 잡는다고 해서 무슨 굉장한 위치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사단의 의도하는 바대로 따르는 것이 된다. 그가 그런 힘을 설령 쓴다 가정하더라도 항상 미가엘을 필두로 하는 거룩한 천사들의 군단(軍團)이 있어 항상 그런 악령들의 어떠한 돌출 행위도 철저히 중화(中和)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  에덴 낙원에서 뱀이 저주 받을 때 "배로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창 3:14) 운명이 된다. 이것은 무엇일까. 배로 다니게 되어 있다는 것은 그 배를 붙일 "땅"이 있다는 것이요 이 "땅"은 최소한 이 자연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다른 악령들과 달리 용은 이 지구상에서도 그런 용의 몸 그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신(神)은 모든 악령과 귀신들을 통할하는 까닭에 귀신이든 악령이든 다 사단의 이름으로 사단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 (물론 자기 스스로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들이지만) 존재들이다. 가룟 유다의 속에 사단이 들어갔다고 하는 복음서(福音書)의 지적도 그런 관계를 의미함이라 생각된다(요 13:27). 따라서 "사단이 들어갔다"는 것은 사단이 부리는 악령이나 귀신이 들어가 그런 생각이 주동이 되어 그 사람을 조종했다는 그런 뜻일 수도 있겠다.

사단의 형체가 지구상에서 나타내어질 때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눈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기 때문에 과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용의 형체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래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묘사하게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용이란 것이 지상에는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면서도 실재하는 양 널리 인식되고 있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용에 대한 기록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 중국인들도 그런 모양을 보았기에 그토록 집요하게 상상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용을 신성시 해온 것이 틀림 없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으니 그 외에 달리 무슨 증거가 필요했겠는가. 오늘날까지 용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이 아님을 단정할 수 있다. 용이 자기 실체를 과시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인간의 눈에 띄어진 것이다.


인간을 속이는 일에 자기의 실체가 폭로됨으로써 절대로 이로운 점은 없다. 이런 용인지라 육지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터이므로 지구상에서 과거에 주장 머물던 곳은 바다라고  생각되고, 퉁구스 사건 이후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던 행선지도 바다 즉 버뮤다 삼각지대였으리라 판단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다.


어쨌든 바다가 그 거처이지만 사람 아닌 영물이라 물속에 있다 하여 그 활동이 제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용이라 하면 바다에 거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식되고 있었다. 산에는 산신령, 바다에는 용 - 이같이 용궁의 용왕으로서 바다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터이다. 한정된 인간의 지식과 지능으로 이해 못하고 한계를 넘는 현상은 무조건 미신으로 무시하는 교만은 경계할 일이다. 분명히 현존하는 것을 없다고 우기고 그렇게 확신하는 것 역시 미신임에는 매일반이다.


뱃사람들이 바다를 상대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자연 이런 악령들과 조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육지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리지만 실은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지금도 그런 바다에서의 "진기한, 신비스러운" 현상을 심심찮게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거대한 빛 덩어리의 바퀴 같은 것이 바다 물속에서 시계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가 하면 해저 깊은 곳에서부터 탐조등이라도 비추듯이 해면에 그런 빛의 원형(圓形)이 형성되기도 하고, 수평선상에서 각종 짐승의 형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가 하면 금방 둘로 쪼개지고 여덟으로 나눠지다가


그것이 다시 세미한 끈처럼 형상이 변하는 등등 선원들의 넋을 다 빼놓는 모양이다. 이것은 UFO가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며 하나가 갑자기 둘 이상으로 쪼개지는 것과 같은 짓거리다. 똑같은 악령들의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행동 목적은 하나다. 소위 “외계에서 온 외계인”으로 가장하여 나중에는 조물주로 자처하고 마지막 속임수를 쓰고자 함이다. 일부 과학자는 그런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현상들을 보고 해저 문명권의 실재(實在)를 확신할 정도다. 이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일종의 미신이다. 자기네는 미신을 안믿는다고 하지만 미신을 더 믿는 격이다.


이런 사실을 소개하면서 러시아 프라우다지(인터넷 영문판)는, “우주에 그런 문명권의 실재를 믿는 이가 있는 판인데 해저 깊이에도 그런 문명권이 있어 현재 육지 생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도 무리일 수는 없다”는 식의 기사를 싣고 있을 정도다. 그것을 뉘 알겠냐는 논조의 글이니 이런 것이 모두 골 빈 세상의 실태다. 즉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과 지식을 가진 존재들이 몸을 감추고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마귀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그런 깊고 너른 바다 속에서 가끔 그런 짓을 해서 용왕으로서의 위상과 두려움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의도적인 혼란을 야기시켜 주고 있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하나님께 향해야 할 인간의 경배를 낚아채고 있다 생각함은 착각이다. 그는 일구월심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자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면 이 일에 자기 딴에는 자기의 명운(命運)이 걸려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즉 인간이 구원되는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런 식으로 세상에 지탱해 나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가 악착스럽게 이 방해공작에 뛰어들고 있는지 알 만한 일이다.


퉁구스 대충돌은 이전처럼 유유히 공중을 가로질러 가는 모양새가 아니라 지상에 세게 부딪쳐 일어난 충돌(세상은 “폭발”이라 하나)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런 것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로질러 달리거나 공중으로 그냥 치솟는 모양이었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터이지만, 고공에서부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오는 것이 관측자에 의해 목격되고 뒤이어 일어난 충돌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별다르고 남다른 것이다. 즉 '천사들과의 하늘 전쟁에서 내쫓긴 용의 정체'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밝힌 대로, "큰 용", "옛 뱀", "마귀", "사단" 등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사단은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를 시켜서도 시험하는 말을 하고,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어 주다가 드디어는 그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즉결처분을 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는 그 안에 "가득한" 그런 갖가지 양상을 띠며 활동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귀신과 악령들이 사단의 명령 일하에 그 이름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단의 직접 행동처럼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욥의 참된 심중(心中) 즉 믿음을 모르고 그렇게 욥을 시험한 것처럼, 사단을 비롯한 영물들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지식도 성경에 나타내고 암시한 대로의 정보뿐이다. 그리고 실상 그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  용 이외에 그와 함께 싸웠던 다른 영물들은 왜 보이지 않았는가 할 수 있다. 용과 함께 한 덩치가 되어 내려 온 광경이 그와 같은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용은 그 중의 괴수이므로 용 하나만 그렇게 지상으로 메어치면 나머지 졸개들은 자동적으로 따라 내려오게 마련이므로 다른 나머지 영물들의 쫓겨 내려오는 광경은 그렇게 극적인 장관을 이루며 나타날 리 없다는 것이다. 제각기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그들의 대장을 따라 쫓겨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를 비롯 오랜 역사가 있는 각국에 약방의 감초처럼 전해내려 오는 건국설화 등의 신화나 전설의 내용들이 어찌 보면 이상 관점에서 살필 때 실제 일어난 상황이었다고 단정해도 감히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남미 고대 유적지나 페루 나즈카 평원 등지에서 발견된 각종 믿어지지 않을 대규모의 지상 건조물 또는 고공에서나 확인 가능한 문양(紋樣)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조형물...다 이들 영물들의 잔재이거나 아니면 오늘 이 시대의 어떤 목적을 위해 일찍부터 미리 조성해놓은 의도 있는 짓거리들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퉁구스 대충돌을 두고 학자들은 운석 낙하설, 혜성 돌입설, 반물질 충동설, 블랙홀 돌입설 등 갖가지로 설명을 시도해오고 있다. 영계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자연계에만 속박되어 있는 인간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되어 우물 밖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으니 그런 자연계에 한정된 생각밖에는 할 도리가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으로 볼 때, 그래도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한다고 볼 수 있는 시도가(試圖)가 이른바 반물질(反物質) 충동설이라 할까.


"반물질"에 대한 과학적 구명은 극히 초기단계에 있으므로 여기 소개할 정도까지는 아니나, 어쨌든 쉽게 말해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대칭적으로 우리의 형상이 나타나듯이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 따라서 반은하계(反銀河界), 반인간(反人間)이 있다는 논리로 전개되겠다. 이 '반인간'을 더 구체화시켜 그들은 '우주인' 또는 '외계인'이라 할지 모르나. "반(反)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물질의 반우주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또 우리가 "영계"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바로 그 신령한 세계가 해당되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입장에서의 '반물질' 개념은 성경상의 영(靈)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를지 모르나, 각종 소립자에는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상대적인" 반입자(反粒子)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그 두 개념 사이는 촌수가 그리 멀다고는 볼 수 없다.


물질과 반물질은 쌍(雙)으로 만들어진 구조이다. 즉 ‘짝의 원리’다. 반물질은 모양과 질량 등 모든 성질이 물질과 같으나 전기 전하만 서로 반대 값을 갖고 있는 입자라는 사실 정도가 오늘날까지 과학이 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지식의 전부다. 물질이 양화(陽畵)라면 반물질은 그 음화(陰畵)라는 셈인데, 양화와 음화를 합치면 그 형태가 사라지고 회색 배경만 남듯이 ‘물질’과 ‘반물질’이 충돌하면 둘 다 소멸하고 ‘에너지’만 남는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다.


“소멸”이라기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같이 빛의 ‘입자’라는 성질과 ‘파동’이라는 성질이 서로 융합하여 ‘빛’으로 존재함과 같이 하나로서의 융합이 아닐까. 그런데 물질인 이 우주계만이 버젓이 홀로 남아 건재하고 있는 것이 얼른 해답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로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 <반물질>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영계(靈界)임이 확인되고 있음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지구와 그 지상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을 다 만드신 다음에 다시 에덴 낙원이라는 '땅'을 창조하시고 그 땅 위에 다시 식물과 동물의 순서로 창조하신 사실을 여기서 지적함이다. 생물이 있으면 반생물이 있으니, 뱀(蛇)이 있으면 반뱀이 있고 사자와 소가 있으면 반사자, 반소가 있게 된다. 이 반식물, 반들짐승, 반새, 반가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경 창세기 에덴 낙원에 등장하는 동식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반인간은 없다. 왜냐 하면 우리 인간이 바로 반인간 그 자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니 인간과 반인간의 이중(二重) 구조로서의 합성인 것이다. 이 반인간적 요소가 사람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인간"이란 표현은 물론 쓰지도 않고 쓸 필요도 없다. 오직 ‘영(靈)’과 ‘육(肉)’이라는 표현만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그와 같은 이른바 인간 및 반인간의 대칭적 요소를 그 안에 아울러 함께 지니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피조물인 사람'으로 계시게 되는 사실로써도 확인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  지금까지 설명해오기를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하늘의 전쟁 마당에서 만신창이 또는 인사불성이 되어 강력한 천사들에 의해 붙들려 지상으로 끌려 와 내리 박힌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러 천사들이 그냥 볼끈 들어다가 지상으로 처박아도 될 일인데 왜 그렇게 세게 내리 꽂듯이 큰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을까. 그야 우리 자연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영계에서 생긴 일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단지 추측일 뿐이다.


즉 하늘에서 다시는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 요한 계시록의 서술에 주목할 따름이다. 영물이므로 다시 싸움을 걸어 그 '하늘'로 복귀하려고 할 것이므로 아주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 그런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하면서 우리 세상 이야기로 말하면 아주 불구자로 만드는 식으로 두 번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도록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드느라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어쭙잖은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  마지막으로, 유의할 것은 세상에 아무리 악령들이 꽉 차게 밀집되어 있다 해도 지나치게 정도에 넘치도록 과분하게 인간을 압박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천사들이 그런 모든 월권행위를 항상 무산(霧散)시키고 퇴색시켜 철저히 질서 유지를 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충분히 그 일을 해내고도 남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 전쟁에서 단연 압도적으로  제압한 터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예수님 말씀대로 12영(營)하고도 더 되는 병력이다. 한 '영'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이 비록 이런 악령들의 세상이요 그들의 한판 무대이지만 인간 구원에는 일절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방금 지적대로 그들과 맞대응하는(지금은 하늘 전쟁의 종결로 확실히 승자로서의 우위(優位)를 차지한) 천사들이 항상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변함없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고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이 계속 그대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그 능력과 은혜가 처음 초대교회가 문을 열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으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효과있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가 이 시대에 처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성령께서 각자에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전력을 다할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누누이 경고하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별로 실감이 가지 않고 그냥 세상이 좋다는 마음이라면, 이상 모든 사실들을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마귀가 이 세상을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핍박 받는 것이요 '마지막까지' 핍박 받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교회 고난사(苦難史)요 요한계시록은 교회 고난의 예언서다. 지금 한창 핍박을 받는다는 그런 심정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핍박 속에 카타콤에서 믿는 이들이 모이던 그 때처럼 여기고, 살기등등한 유대인의 손에 스데반이 순교 당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산지사방으로 교회가 뿔뿔이 흩어지던 그 때처럼 여기고, 오늘날 북한 사회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충성할 일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사정은 더 악화되면 되지 결코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 치하에서 믿음을 지키던 때처럼 여기고 믿을 것이다. 지금의 강제노동 수용소 통치하의 북한 땅에 사는 것처럼 여기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의 일사(一死) 각오로 임할 일이다. 로마제국의 핍박이 걷히고 콘스탄틴 황제가 믿음의 자유를 선포하자 믿음의 자유커녕 그 때부터 교회는 착실히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핍박이 아니면, 세상 사랑과 세상 생각(눅 8:14)으로써 질식사시키는 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교회가 로마제국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神)이 더 효과 있는 전술로 전환한 것뿐이었다. '핍박'에서는 교회가 살아남았으나 '자유' 아래에서는 거의 살아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겠다.


세상과 교회는 물과 기름이다. 사단 곧 용이 세상을 차고 앉아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창세기 에덴낙원에서의 여자 그리고 계시록에서의 그 여자가 '교회'를 상징한다면 "용"과 "여자"는 분명 상극이다. 철천지원수지간인데 어찌 상종이 되겠는가. 악령들이 "공중에서 활동한다"고 점잖게 공중에서만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에 있다"는 것은 전체적이고 효과적인 인간 통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의 발 닫는 곳, 손 잡히는 곳 그 어디서든 그 보이지 않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 눈에 뵈지 않아 그렇지 그들은 없는 데가 없다. 그들이 인간에게 모습을 나타낸다면 지금 이 시대는 소위 “UFO”나 “외계인(실존하지도 않는)”으로써다. 이는 물론 의도적이니 바로 그런 것으로 속임수를 쓰려고 작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 에누리 없이 제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면 기절하지 이를 보고 살아남을 인간이 과연 있을까. 에데낙원에서 첫 사람 아담 부부만이 그런 모습의 그들을 대할 수 있었지 오늘날 인간은 모두 육체이므로 시대  상황이 다르다.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짐승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그런 형태로, 짐승이므로 물론 사람처럼 목은 없고 머리통이 그냥 몸통에 붙어 있고, 올빼미/부엉이 같은 퉁방울 눈은 머리통의 1/3이상 차지하며 전면에 붙어 있고, 머리통도 사람처럼 보기 좋게 둥그런 모습이 아니라 마치 물통을 거꾸로 둘러엎은 형상인데다, 보통 사람 키의 거의 10배는 족히 되는 전신(全身)이 온통 진한 다갈색 털로 덮인 그 산더미 같은 우람함에 우선 뱀 앞의 개구리 격이 되어 까무러치기부터 먼저 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이런 괴물들이 인간을 압제하고 마치 꼭두각시처럼 인생을 조종하고 있음을 안다면, 지금까지 생명줄처럼 여기고 매달리던 이 세상 모든 관심사를 헌신짝처럼 동댕이치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구월심 '이 생지옥에서부터 구원받는' 데에만 기를 쓰고 덤빌 것이 아닌가. '웃음'이 어디 있고 '즐겁다'가 어디 있고, '재미'가 어디 있고, '신난다'가 어디 있겠는가. 벌집을 들쑤셔놓은 듯할 것이다. 전혀 모르기 때문에, 눈이 아주 어두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소동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정상 상태로서의 평온이 아니라 모두 눈 가리개로 가려져 앞을 못보는 자들의 무서운 적막감이다. 세상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이런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상이 마치 천년만년 갈 듯이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여전할 줄 착각하고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 코를 박아둔 채 세상 가는 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뒤통수에는 얼굴이 없으니까 사람은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사랑의 법칙으로 살도록 조성되어 다시 말해 얼굴이 한 쪽에만 면해 있기 때문에 동쪽을 보면 서쪽을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보면 그와는 반대방향인 하나님 일을 할 수가 없고 믿음을 등진다. 둘은 상극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상극이 아니라 세상이 거꾸로 선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죄악이 다 하나님 앞에 '거꾸로' 된 가증스러운 비정상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추물(醜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니는 의미는, 내가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은 모습일 때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죽은 모습이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했을 때 세상이 내게 대하여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이 된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생명이고 믿음이고 순종이고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미워하기를(사랑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 싫어한다면 그것은 그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해로운 줄 '믿으면서도'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한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안믿는 것이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 어떤 것을 믿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자기 이해관계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고 안믿는 그 어떤 것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믿으면" 당장 손해가 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안믿는 경우 이는 바로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해관계, 아니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 이로써 자타공인으로 만천하에 드러나진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데 생각만으로ㅡ즉 "믿은" 것이 아니라 "믿었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세상을 인간으로부터 빼앗아(강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담 스스로 어리석게도 넘겨 준 것이다-눅 4:6) 관장하는 사단과 그 일당들이다. 이런 악독한 피조물들 앞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 외에는 모두 장님이 되어버려 완전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틈만 있으면 "포효하는 사자처럼" 삼키려 하는 것이다. 삼키는 것이 실제 불가능하면 그가 그렇게 할 리 없다.


그는 꼭두각시는 아닌 것이다. 무릇 이성적이고 영적인 피조물로서 꼭두각시 노릇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지 그들의 자유 선택에 의한 행동을 하나님의 지혜는 역으로 활용하시는 것뿐이다. 사단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틈을 노리다가 기회를 붙잡기가 무섭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가룟 유다에게처럼 마침내 그 안에 들어 가(마비시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위에 곧장 내리게 만든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라는 금속성(金屬性) 도체(導體)가 가득하니, 필살(必殺)의 '심판'이란 벼락이 유도될 수밖에 없다.


세상 모두 잠든 한밤중이지만 불 난 것을 보았으면 "불이야!" 하고 외쳐대야 정상적인 마음이다. 강둑이 터져 홍수가 날 위급을 알았으면 "강둑이 터졌다!" 하고 집집이 돌아다니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사태를 처음 알아낸 그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런가. 황후(皇后) 에스더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들은 것처럼ㅡ"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집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14). "내가 부득불 할 일인데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 9:16). 악마가 존재함을 알려 주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신(神)에 대하여 특별 취급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심지어는 그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도 있는 그런 상황이다.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맞으면 믿고 안맞는 것은 안믿고ㅡ이런 것은 처음부터 아예 전부를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더 해독을 끼침이다.


성경이 특별 취급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 신보다 인간 자신의 죄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름답고 좋기만 한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이다. "용"도 마찬가지다. 흉물스럽고 징그러운 데는 없다. 그런 아름다움 속에 단지 살인자(殺人者, 아담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로서의 악함이 있다는 것이니, 용을 이렇게 만든 것은 똑같은 이 "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용"이라는 존재는 가브리엘이나 미가엘(인간을 위하는)과 똑같은 피조물이므로 특별히 비중을 두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가 인간의 원수로서 활동하는 까닭에 그 실상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간혹 여기저기 성경에 서술해놓은 것을 보는 것이다. 욥기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에게 각종 해악(害惡)을 끼치는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의 규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욥을 사단이 시험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 “욥의 목숨은 손대지 말라” 하신 것이 그 예이다. 이 경우 사단이 "목숨을 빼앗을"(스스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기타 방법을 통해)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멸망시키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신 것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만일 죽음을 허락하시면 이보다 내게 더 좋은 선택은 없는 것이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사단의 사자(使者)"(고후 12:7)였던 것처럼 사단이 인간에게 어떤 고통을 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충분히 소화시키면 훌륭히 전화위복이 되는 근거가 될 수 있어 오히려 있음으로써 더 유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하나님 일도 "사단이 막을"(살전 2:18)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쪽에서 기도를 함으로써 그 방해를 없이 할 수 있다(히 13:19/몬 1:22).


그리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처의 경우에서 보듯이 또 사도 베드로의 경고에서도 보듯이, 사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령을 계속 불신 가운데 묶어둘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갖은 수단으로 유혹하고 꾐으로써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일에 수천 년 관록이 붙은 자이다. 만일 사단이 자기 판단으로 그 시험 상대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임을 감지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부질없는 일이라 하여 그렇게 시험하는 일을 아니할 것이지만,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믿으므로 그렇게 시험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까지도 시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자유 의지로써 중도에 마음을 돌리시고 (비록 성경에 예언을 하셨다 하더라도) 애초의 뜻을 변경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유 의지를 따라 믿고 안믿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차원이므로 사단은 얼마든지 택한 자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시험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생명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억지로 강행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불 못에서는 예외이니 사랑의 세계가 아닌 까닭이다. 나 자신의 "택하심"을 안다고 태평으로 지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니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힘써 굳게 하는>(벧후 1:10) 것 이상으로는 없다. 고로 이렇게 해야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신다"(:11) 한 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천국 들어가는 것이 몹시 불확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용" 및 "짐승"이 성도(聖徒, saints,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이들)들과 싸운다고 했는데 이 싸움에서의 교회의 완전 무장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임을 재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적 그리스도와 싸운다고 해서 교회가 정치세력화하고 아니면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압력단체화할 것은 아니다. 그런 길로 흐를 때 그것은 원수의 계략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의(不義) 일색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당장 그 불의를 응징하시거나 그 불의를 사전 예방하는 것 같은 조처를 취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려면 이 세상 신(神)을 응징하시고 이 세상 자체를 끝내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구원은 완전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고 그래서 구원 받기로 택정하심을 입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단 한 사람을 위하여서라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채워져야 하고 따라서 세상의 불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 받음과 세상의 불의는 이렇게 연결고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열망하신다면 그런 악령들의 존재를 볼 수 있게 하실 수 없는가, 볼 수 있게만 되면 누구나 악행을 뉘우치고 믿을 것이 아닌가. 비단 악령만 아니라 천사 중의 하나라도 자주 나타난다면 그런 효과가 있지 않으랴. 사람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누구나 동경하게 될 테니까 그런 천사들이 나타나 인간세계에 모종의 능력을 자주 나타낸다고 해도 그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 무지한 소리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간섭과 강제가 된다. 자유를 완전 보장해 주신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모순되는 일은 아니하신다. 무서워서 이를 피하기 위해 혹은 너무 좋아서


 이를 탐해서 움직이는 그런 피동적인 자세를 원치 않으신다. 인간 구원을 열망하신다는 것도 오직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게”(히 1:9)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니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인생들까지 용납하시어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행 17:30)고 명령하시는 것이지 믿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악령이 나타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안되고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도 안된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동정하시는 데에 있지 않고 그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자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목적인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었고 악령들이 범죄함으로 장차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로 세우신 것이다. 수십억 인구 중에 그런 “의를 사랑하는” 인생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 사람 단 하나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제외하실 것이다. 영생이 탐나서 혹은 멸망이 두려워서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다 손치더라도 반드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그는 구원의 여망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아담처럼 다시 범죄하여 죽을(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니 죽을 사람 다시 살려놓아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다던가.


인간 이성과 상식으로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자주 나타나지 않아도 믿는 사람은 믿게 되어 있고 안믿는 사람은 안믿게 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출할 때도 인류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기적을 그렇게 자주 나타내었지만 믿지 않았다. 타고 가던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는 기적을 보고서도 선지자 발람은 여전히 발길을 돌려 회개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결국 발락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범죄하도록 조언을 해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는 악을 범했던 것이다(계 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베푸셨으나 믿지 않았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120명 정도만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정도다. 또 믿는 이들에게 부활 후 친히 그 사신 모습을 보여 주셨어도 5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믿는 이가 적었다는 의미다. 천사가 인간에게 나타나더라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의 인간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무조건 초자연적인 것을 지존자(至尊者) 곧 신으로 떠받들려는 약점이 있어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육체로서의 인간은 완전히 신(神)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요 세상은 오직 그런 곳임을 알아야 할 일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신 하나님이 아니라 악령 용인 것이다. 즉 용의 세계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단 스스로가 인간을 꾀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단을 처벌하실 수 없는 것은 사단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아담)이 동의하여 이루어진 악령과 인간의 합작(合作)인지라 벌하시려면 인간도 처벌되어야 하므로 그렇게 되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는 부득불 이 세상 위에 군림하여 인간들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는 악령 사단이다. 사단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 부부)을 꾈 때는 사단과 대등한 위치였고 더구나 아담은 그런 영물(靈物)들보다 상위(上位)에 있어 오늘날의 우리처럼 공포분위기는 고사하고 사람이 짐승을 대하는 듯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에덴낙원 곧 영계에서 아담이 영물들에게 바로 그런 모양새 즉 사람과 “각종 짐승들”(창 2:19) 관계였던 것이다.


단지 그 짐승들이 인간보다는 지식이 월등하여 인간을 보좌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 정, 의를 갖춘 인격성을 지녔으니 단지 모양만이 사람이 아니라는 그 차이였던 것이다. 이회장의 첫째 질문, “하나님이 존재하면 왜 똑똑히 드러내지 않느냐?”에 대한 답이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강제가 되고 그 반대로 하나님 잘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축복을 하셔도 강제(懷柔)가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은, 인간 각자 자기 스스로 회개하여 의를 따르고 불법을 미워하여 죄를 짓지 않는 데에 있다. 회개의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음이다. 바로 그와 같이 할 수 있도록 완전무결한 장치를 해 주신 것이 새 피조물 됨, 다시 나게 하심이다. 그 다시 나게 하시고 새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가능하게 되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생하는”(요 3:16)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영생하게 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가장 앞서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의인 되게 하심인 것이다. 의인 되기로 하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약속할 때 즉 회개할 때에만 한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죄가 그대로 있는데 의롭다 하실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가 용서되어 깨끗한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여 오심으로 그 약속한 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능력이 친히 되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은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귐으로 인한 하나 됨으로 되어지는 것이니 앞서 이미 설명한 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즉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그래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이것이다. 남녀가 둘이 한 몸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치대로인 것이다. 즉 남자(남편)의 몸은  여자(아내)의 것이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으로서, 자기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여 다른 남자 또는 여자를 친근히 할 수 없는 것이다(고전 7:4).


그러면 그 한 몸 됨은 깨어지고 당사자는 간음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하나님 지으신 대로의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도 불쌍히 여기심도 없다. 법과 질서를 어겨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다는 교리를 인위적으로 지어낸 것은 사단의 조종으로 만들어진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건)의 거짓이요 속임수인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그 만드신 만물로 보여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롬 1:20)는 것은 사람의 이성(理性)으로 넉넉히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넉넉히 판단 가능하도록 이성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르니 악령 사단이 마지막으로 그 속임수를 대대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심판하시는 단계에 서서히 접어듦으로 인하여 악령들의 능력 과시를 어느 한계까지 충분히 인정하시게 됨이니, 그런 인간 심판 차원에서(살후 2:12) 갖가지 거짓 기적과 초자연적 현상과 악령들의 능력이 대대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그 클라이맥스가 성경에서 말하는 바 "멸망의 아들", "악한 자"의 출현이다. 자존(自尊)하여 "신(神)"이라 하고 "하나님"으로서 경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살후 2:3-12). 이런 짓을 사단이 감행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의를 사랑하지 않는(불법을 좋아하는) 자들을 모두 걸러내어 청소하시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원래 영물(천사)들은 인간을 위해 조성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옹위하는 영물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룹"이나 "스랍"들이다. 이들 존재는 계시록에 "네 짐승"이나 "24 장로"들로 호칭되고 있다. 왜냐면 그들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천군천사들의 무리”가 있다고 기록했으니 이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 "영물들" 곧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천사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히 1:14)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는 존재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그룹(chrub)"이나 "스랍(seraph)"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천지 창조 이전에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아들(所生)들"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피조물인 고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독생자(獨生子, 외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으심 받은 모든 피조물들이다.


이들 "그룹"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자가 있었음을 성경은 암시하는데 그러면 그 타락한 "그룹"은 어디 있는가 할 때 에스겔서의 그 "무저갱ㅡ밑이 없는 구덩이(bottomless pit)"가 바로 그곳이고 이는 계시록에도 나온다. 그래서 "아불리온"이 바로 그 타락한 '그룹'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룹”은 인간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11

퉁구스카나즈카, 스톤헨지 기타



퉁구스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 주위 환경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미확인 비행물체"라고 세상이 궁금해 하는 UF0를 숭배하고 종교화하고 있는 소위 '라엘리안'들이 복제 인간을 만들었다는 등 세상을 소연하게 만들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존재가 요즈음 크게 부각되고 많은 사람이 이 속임수에 미혹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 "UFO" 존재들은 악령들의 무리다. 그들의 정체와 본색을 밝히고 또 이러한 때에 처하여 우리의 사명과 각오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악령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영계의 존재이므로 수시로 우리와 같은 자연 물질계의 몸으로 변환할 수 있고 다시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본디의 그 영적 몸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가끔 쇼처럼 우주선으로 위장하여 벌이고 있는 형태에서 확인되고 있다.


뿐 아니라 그 형체를 얼마든지 수축 신장할 수 있는 등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국 로즈웰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지상에 추락하여 송장이 된" 외계인은 순전한 속임수다. 지금 세상이 말하는 "복제인간"과도 같은 것이니 인간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이들 악령들에게는 허수아비나 인형 같은 것으로서 온 세계를 속이고 있는 극히 간단한 예에 불과하다.


소위 "외계인"으로 나타난 것도 악령들이 만든 허수아비(생명이 있는 생명체가 아닌)거나 그들 자신이 그런 존재로 분장(변환)하여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하나님 창조의 질서를 따라 생겨난 인격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적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오만한 인간에게는 너무 늦게 이 모든 것들이 엄연한 사실 또는 현실로 나타날 것이지만,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UFO"에 대한 모든 증언과 현상들은 대개 다 진실이라 믿으면 틀림 없다.


그것들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나타내는 의미나 내용’은 거짓 일색인 것이다. 그런 형태의 새로운 양상으로 사단은 새 단계에서 인간을 속이기 시작하는 것이고 이것이 전세계로 확대될 공산이 크다. 이른바 '과학적'이라는 것은 현존의 인간 지식과 지능의 한계 내에서만 통하는 얘기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체가 처한 이 자연계에 한한다. 이른바 "UFO"가 지금 한창 자랑하는 <비물질> 또는 <반물질>적인 것은 인간의 한계 밖이다.


그러므로 그 분야에서는 인간의 '과학'이라는 것이 전혀 통하지도 않고 먹혀 들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면 되는 것인데 고집을 부리고 그런 영적 존재나 현상을 무조건 부정해버리고 그런 것의 가능성을 아예 제외시켜 버리니 그것 자체가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비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의 "영혼"마저 부인해 버리려고 하는 것이 "과학자"이니 거기서 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런데도 그런 것을 숭상하고 의지하고 그런 것으로써 만사를 풀어버리려 하는 모든 오만한 인간에게 화 있을 것이다. 이른바 "UFO"나 페루 나즈카 평원에서 과시해 놓은 그런 인간 이상의 지력(智力)과 능력을 두루 갖춘 악령들 앞에서, 실로 '과학' 이상의 '과학 지식'을 자랑하는 그들 앞에서, 그런 인간의 얄팍한 지식에 기대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듦과 같은 위험천만의 것이요 바위를 지고 물속에 들어가는 꼴이다. 맥없이 무너질 운명의 그런 어리석음을 왜 미리 깨닫지 못하는가. 왜냐면 그렇게 지식 위주로 나가면, 지식으로는 어느 인간도 당하지 못하는 악령의 "지식"으로 위장한 속임수 앞에 맥도 못추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이 "때를 분변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여 아내를 삼아 자식들을 낳았다" 할 때의 하나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생물들'이라는 의미이니 곧 악령들이다. 낳고 낳아 생겨난 존재들이 아니고 친히 만드셨기 때문에 직접 만드신 바 되었다 하여 "소생(所生)"이라는 그런 뜻이다.


그러나 이들 영물들을 가리켜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창조된 "각종 짐승"(창 2:19)으로 성경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들 영물들이 자연계에 대한 대칭으로 창조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현재 우리가 지닌 바와 같은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육체인 인간과 그런 접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 악령들은 육체로써 그런 접촉을 한 다음에는 다시 그 본래의 영적인 몸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임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이런 사실들은 단지 참고 정도로 할 일이지 믿어도 좋고 안믿어도 좋으니 거기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우리의 구원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로서 믿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태 파악에서 적지 않은 지혜가 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과 그 악령들의 실체를 전세계를 통해 목도하고 있는 시대에 처해 있다. 과거에는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어 일어난 일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구조가 되어 있지 않았으나 지금은 온 세계 구석구석에 알려질 뿐더러 금방 전파되어지는 그런 시대다. 그런 만큼 적 그리스도가 획책하는 세계 단일화의 작업은 그만큼 손쉽게 되어가되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다.


퉁구스 사건이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방증하는 물증이 오늘날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남미 페루 나즈카 평원에 그려진 대형 도안들이나 오늘날 영국 스톤헨지 인근 밀 또는 옥수수 밭에 그 곡식 포기들로써 조성되는 괴상한 도형들 소위 “crop circle”이 그런 따위의 것이다. 원형으로 안치된 선돌들 즉 스톤헨지 자체가 이들 악령들의 소행인데 거기에 무슨 색다른 연고가 있음인지 그 인근에 단 하룻밤 사이에 초자연적인 도형들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기괴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른바 UFO의 소행이라고 믿는 데에까지는 사람에 따라 인정되고 있으나, 그렇게 믿는 이들까지도 그 UFO 자체를 어느 우주 외계에서 온 외계인 정도로 그들의 속임수를 따라 착각하여 놀아나고 있으니 무지하다는 점에서는 둘 다 같다.


요한 계시록에 적 그리스도가 각종 거짓 기적을 행하여 세계를 미혹한다고 되어 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우상이 말을 한다"고도 했는데 오늘날 각종 현상들을 보면 그들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계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허무맹랑한 '미신' 교리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휴거(rapture)"라는 것이다.


여기에 혹한 사람들이 언젠가 한 때 소란을 피워 세상의 비웃음을 샀지만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다. 이런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아주 어색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완벽한 것이어서 이런 따위 어색한 틈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런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색한 틈이 보이면 그것은 양의 털옷을 걸친 이리의 속임수라 진단하면 정확하다.


이상과 같은 교리는 고난 받는 것을 꺼리는 얄팍한 인간 심리의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정해진 은혜다(빌 1:29). 우리가 당하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의 성격이 그러하므로 그것을 "면한다, 못면한다"는 것과는 그리스도인과 아무 상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다.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이같은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는 데에서 오는 무지무식의 발상들인 것이다.


그런 따위를 믿다가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대적인 박해가 갑자기 임한다면 그 때는 대책없이 당황하고 방황하다가 맥없이 휩쓸릴 것뿐이다. 그런 고난을 예상하면서 믿음 중에 평소 단단히 준비하며 주님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 '성경적 상식'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전무후무한 그같은 환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실을 명시하는데, 그런 환란을 면제 받고 공중으로 갑자기 들려진다는 것이니 어린 아이의 환상도 아니고 사단의 인간 우롱이 이 정도까지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서글퍼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끝으로 번역으로 된 자료를 대할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번역상의 오류다. 며칠 전 어느 신문에 어떤 영문학과 교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인즉 자기가 옛날 학창 시절에 학비 조달을 위해 친구들과 어울려 마구잡이식 번역을 하던 그 때와 오늘을 비교해볼 때 번역의 질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고 출판사의 행티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닌가. 자기도 며칠 전 평소 읽어보려 했던 제하의 책이기에 호기심으로 어떤 철학 관련 전문 서적(번역판)을 집어들고는 이내 실망을 금치 못하고 분노마저 느꼈다며 그런 기고문을 올린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호주에까지 유학 갔다 와 교수 자리를 찾는 어떤 이의 영문 해석력을 우연한 기회에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 답안지를 보니 채점자의 붉은 연필이 온통 시뻘겋게 칠해져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말 문장력은 예외로 치더라도 원문의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글 개역 성경도 오역이 눈에 가끔 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으로 영문으로도 번역 대조가 가능하니 정확한 의미를 찾는 데에는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허투로 아는 백가지 정보보다 단 하나라도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 자료의 번역문을 읽더라도 그런 점에 착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며, 성경도 영문을 대조해가며 읽기를 권한다.




12
용(龍)의 정체 - 사단



위의 증언자의 증언에서도 보듯이 우리는 사단 곧 용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후로 해서 사람들은 용을 호랑이나 사자 같이 실존하는 존재로 믿어 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 사도의 계시록에서 "큰 용 즉 옛 뱀 곧 사단"이라 하여 용이 바로 사단인 것을 두 번 씩이나 명시한 점에서 사단은 과거처럼 자기 모습을 인간에게 어떤 수로든 나타내지 않으려고 더욱 사력(死力)을 쓴 결과 이전처럼 용을 목격하는 수가 거의 없다시피 될 정도로 썩 드물었기 때문에 지금은 용을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로 인정하게 쯤 되었다고 생각된다.



위 사진은 2001년 8월 NASA에 우연히 포착된 굉장한 크기의 용의 모습으로 앞서 설명했듯이 유유히 움직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습이 아니다. 

성경도 "큰 용"이라 했듯이 이것은 배로 기어다님으로 인해

 병적으로 비대해졌다 할까 저주 받은 결과이다


사단은 과거에 주로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났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 용을 바다와 연관시켜 나타내어 용궁(龍宮), 용왕(龍王) 등의 명칭이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단이 왜 주장 바다를 선호하게 된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니 그 행동 속도가 그만큼 더디어 인간의 눈에 쉽사리 띄게 될 것이므로 자기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차원임을 이미 설명하였다.


공중에서 움직일 때는 아주 고공이면 그렇지 않으나(그렇게 되면 인간들을 지배하는 일에 차질이 있는 듯) 적당한 높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자면(욥 1:7) 인간의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그렇게 띄지 않게 하려면 전속력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그만큼 그로서는 고통이다. 따라서 사단이 바다를 선호하므로, 당시 아직 바다를 잘 몰라 해도(海道)로 나타내지 않은 바다를 표시할 때는 옛 사람들(여기서는 유럽인들)은 온통 용들로 표시해 놓았다고 한다. 처음부터 배로 다니도록 창조된 자연계의 뱀은 배로 움직여도 웬만한 동물들과 같게 신속하게 몸을 놀릴 수 있지만, 처음부터 직립 보행으로 창조된 영물로서의 사단인지라 저주 받아 배로 다닐 때는 말 그대로 보통 고통이 아니다.


"저주"의 성격이 그런 것이다. 따라서 행동하는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 원래 영물들은 "영(靈)"인지라 그 움직임이 전광석화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우리 육안으로는 그 움직이는 모양을 포착하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도 신령한 몸이었으므로 금방 나타나시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신 것이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가도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은 신령한 몸이 번개처럼 움직일 뿐 아니라 몸의 확대 수축 변형도 자유자재이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영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 것이니 무릇 피조물은 신령한 것이든 자계에 속한 것이든 그 육체가 있음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을 때의 영은 피조물로서의 영과는 다르니 말하자면 순수하게 영이시라 할까 일절 형체가 없으시다. 형체가 있다는 것은 그 형체가 점거하고 있을 만큼의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에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장 완전한 존재 형태이시다. 그래서 만물 안에(in), 만물을 관통하여(through), 그리고 만물 위에(above)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신령한 육체는 변형(색채, 형태, 규모 등)을 자기 임의로 할 수 있고 빛과 같이 움직이므로(마 24:27) 우리 육안의 가시권(可視圈)을 벗어나 있고 그리고 수축 확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우리는 현재 알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배로 다니게" 되어 있으므로 그 속도가 느려 자연히 인간의 눈에 띄게 되어 있음이다. 단순히 속도가 느리다는 것만 아니라 동일한 저주의 결과 "흙을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기준할 때 거의 그런 속성의 육체로 되어버렸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사단의 인간 기만에는 자기 정체를 감추는 것이 필수인데 인간의 눈에 드러나게 되니 자연 눈에 띄지 않으려고 움직여도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쓰면서 움직이려 하다보니 그만큼 고통은 가중된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 비교적 잘 띄지 않는 바다를 택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당시의 인간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은 못하고 저 너머 바다 쪽은 큰 벼랑처럼 되어 있다고  여겨 바다 밖으로 잘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근거 없는 공포는 역시 사단이 넣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에서 만난 용을 뱃사람들이 목격하여 전한 내용이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는 터이다. 실제로 목도한 사람들의 증언이니 육지의 사람들도 그 말을 안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는 그런 괴물이 살고 있다고 알아 왔고 단 그 코에서 불을 뿜고 있었으므로(이 불은 그 육체가 영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주님도 재림하실 때 "불꽃 가운데" 임하신다 하였다-살후 1:7) 보통 동물이 아니라 신(神)이라 여겨 경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령이고 첫 사람 아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원수 바로 그 사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단 자신이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이 역시 그가 인간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으로서 온 지상을 두루 다니며(욥 2:2) 인간을 장악하여 지배하는(임금 노릇하는-요 14:30) 까닭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6:12)로서 공중에 두루 돌아다녀야 하나 육지에서는 인간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주로 육지 가까운 바다를 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도 배를 타는 사람들은 비록 용의 형체는 아니나 신비하고도 강렬한 빛이 괴이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가끔 목격하고 증언하는 수가 있다. 이른바 "버뮤다 삼각 지대"에서의 각종 선박, 비행기의 실종 사고도 이런 사유로 해서 일어나는 변고이다. 옛날에도 사단은 이렇게 바다 가운데에서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를 목격하게 된 배나 사람들을 덮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용이 나아가는 길목에 걸려드는 것은 배든 사람이든 모조리 삼켜 버린다고 무서워했었다.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지축을 흔들 만큼 굉장했다고도 전한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이 예외없이 이런 공포의 대상을 직접 알고 있거나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까닭에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지라 까닭 없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는 우리가 이 사단의 정체와 활동 환경을 고려할 때 그들이 공연한 공포심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용이 하나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믿었으니 특정된 한 가지 모습이 아니고 사단이 그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꾸어 용이라는 괴물이 여럿이 바다에 서식하고 있는 듯이 믿도록 유도하여 자기 정체를 감추려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했을 만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용은 하나뿐이고 사단인 것이다. 형태와 색깔과 크고 작음을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사람들은 용이 여럿이 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야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적룡, 청룡, 황룡 등 갖가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두 눈이 퉁방울처럼 몹시 크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위에 소개한 퉁구스카 대충돌의 그 증언자도 그 눈이 유난히 컸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몸집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에 일치한다. 사단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형체를 마음대로 확대 축소하는 것이 가능하나 그래서 “네피림”(창 6:4)도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행위가 금지되고 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 거의 자연계의 물질에 가까운 육체가 되어 있어 그 몸의 크기를 다시는 마음대로 조절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인간으로 자신을 변환시켜 자식을 낳는 일을 할 때만은 그런 제약을 받지 않는 모양이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런 악령들은 모두 처벌된 상태에 있는 까닭이다.


인간들이 점차 바다로 진출함에 따라 바다도 사단으로서는 안전한 은신처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사단에게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 중에 활동을 아니할 수는 없고 그래서 소위 우주선(UFO)이라는 것으로 변장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 결론 내려도 무방하다. 지금은 하늘에서 영원히 추방되었으므로 길다란 시거(cigar) 형의 우주선이라는 것이 그런 사단의 변형된 형태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용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잘난 체 하면서 가볍게 말하지만, 사단이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 정체가 드러날까 하여 더욱 몸을 사리고 전속력으로(배로 기어 다녀도) 전력을 다해 움직임으로써 인간의 눈에는 어찌하든 띄지 않도록 죽을 고생도 불사하는 편이 낫지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극력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주선"이라는 포장(包裝)술을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 인식시켜 놓았으니 비교적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1908년 이전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도 사단은 처음부터 이 인간 세상 중에 거하면서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닌다"(욥 1:7) 한 대로 지금과 똑같이 활동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지상에서만 그 거처가 한정되었다 해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으나 성경에 "분 내어 지상으로 내려 갔으니 화가 있다" 했으므로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배전(倍前)의 경각심을 요하는 때다. 다니엘이 예언한(단 12:4) 과학 문명의 발달도 퉁구스카 충돌 전후로 이루어진 사실에 우리는 주목한다.

결론은 현재의 이 세상은 일관되게 마왕(魔王)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 용을 마귀 곧 이 세상 신이라 했고 또 이 세상 임금이라 했으니 마왕이라는 표현은 성경적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히기 위해 이런 용어도 때로는 필요하다. 어쨌든 경고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허황된 꿈에서는 일찌감치 깨어날수록 좋다. 마왕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말 그대로 그를 임금으로 섬기는 의미밖에 없다(눅 4:7).


신화나 동화에서 나옴 직한 그런 마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마왕이다. 마귀의 생김새는 당연히 사람이 아니니 사람의 모습은 고귀한 모습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것이다. 이러한 형상과 모양은 그 어느 피조물도 갖출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다. 고로 사람답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처신하고 행동할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인간에게 나타날 때 반드시 사람의 형상 외에 다른 형태로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처음에 인간(아담)을 위해 그들이 창조되었으므로 비록 현재는 인간이 자연계에 속하여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으나 왕년의 손위인 인간에게 대한 예우(禮遇)로서 반드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혹 필요하면 인간의 모습을 띠기는 하나 주장 그들의 고집대로 짐승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구분 없이 드러낸다. 거룩한 천사들의 모습(에덴낙원에서의 각종 짐승, 날짐승 등)을 가장하기도 한다. 악령들이 짐승의 모양을 띠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사람을 시기하여 “너희들 사람만 제일이냐? 우리 모습도 어때서?” 하는 오기(傲氣)요 도발(挑發)인 셈이다. 그래서 악령들은 능력이 있으므로 짐승의 형상에다 사람 얼굴이나 상반신을 입히는 등 온갖 짓도 자행하게 된다.


이집트를 비롯해 다른 고대 국가 전설 또는 신화에 나오는 수면인신(獸面人身) 또는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신(神)"들이라 하는 것 모두 악령이나 네피림과 관계된 것이다. 소위 난생설화(卵生說話)도 개중에는 네피림과 관계되고 악령들과 관계된 것이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네 조상을 신성화(神性化)하기 위해 갖다 붙인 즉 만들어낸 설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조상을 그렇게 신성시하는 것 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거니와, 또 그렇다고 해서 그 후손들이 모두 네피림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는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을뿐더러 유전(遺傳) 인자(因子) 관계도 순수한 육체의 경우와는 다를 것이므로 영물과 인간의 틔기인 이상 그것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는 터라 우리의 관심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한가한 현재 우리 인간의 처지가 아닌 것이다.


사단은 신이고 우리는 육체이므로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힘의 불균형은 없다. 원래 영물은 인간(아담)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인간을 위하는 거룩한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어 사단의 그와 같은 일방적인 압제를 상쇄시켜버리는 터라 마치 우리는 악령들의 활동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사람의 대표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던 것처럼 우리도 단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힘쓰면 되는 것뿐이다.


끝으로,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기본적 차이 하나는 전자는 형체가 없으신 반면 후자는 형체를 갖춤이다. 자연계에 예속되지 않는 영물(靈物)도 형체를 갖추기는 마찬가지, 사단도 예외가 아니다. 형체가 있으므로 인간 속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다. 영이라야 한다. 그래서 귀신은 들어갈 수 있다. 영은 육체만 없다 뿐이지 인격체다.


사람이나 영물들이나 인격체가 되어 있는 것은 영혼 또는 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에 마귀 즉 사단이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가룟 유다에게 넣어 준(요 13:2) 다음 나중에는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는데(:27) 이는 어찌 된 일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속에 “사단이 가득하다”(행 5:3)고 한 베드로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또 베드로더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로서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는 뜻으로 그 아래에 모든 악령들과 귀신들과 인생들이 총동원되어 움직이는 판이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지시를 받아 행동할 때 그렇게 동원된 귀신들이 모두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단이 실제 들어갔다면 “가득하다”는 말로 나타낼 리가 없다. 사단의 명령을 받아 인간 속에 영으로 들어갔다 해도 일단 들어간 것으로 표현하면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가득하다고 했으니 이는 그런 사단이 “넣어 준 생각”(요 13:2)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단은 또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넣어 줄 수 있느냐 하면 사단의 직접 지시를 받고 귀신들이 행동할 때 그것은 귀신의 의도가 아니고 사단의 의도일 때 “사단(마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더러 “사단아 물러가라”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실 때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제자들이 알고자 할 때 “내가 떡 한 조각을 주는 그 사람이다” 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주시니 유다가 그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요한이 표현한 것도 같은 뜻이다. 그 조각을 받는 유다의 마음에 즉각 반응이 아니 올 수 없다.


반발심이라 할까 그런 마음이 끓어오르는 그 순간 그 때까지 유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신들이 즉각 유다의 속에 들어가 유다를 사로잡아 망설임 없이 유다가 애초 마음 먹고 있던 바를 결행하도록 충동질을 했다는 뜻이 되겠다. 따라서 일정한 형체를 갖춘 피조물이니, 영이지 않고는 자기와 똑같은 피조물 속에 '내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 경우 영일 때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말하는 것으로서 “네피림”(창 6:1-6)의 영이다.


그러면 이 글에서와 같이 사단의 정체가 탄로 난 판이고 또 사단이 그런 자기 정체 폭로를 막기 위해 여러 면으로 감추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면 앞으로도 이런 적극적 노력을 감행할 것이야 뻔하다. 그는 인간 세상의 제왕(帝王)이니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못하랴. 그래서 아닌게 아니라 그 시베리아 퉁구스카 인근 지역에 괴상한 'ufo'식의 기호 또는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 것이 2007년에 발견되었다고 야단들이다.


‘ufo’식의 초자연계에 속한 그 무엇이 이런 것을 새겨놓았다는 점만은 확인이 된 모양으로, 퉁구스카 충돌이 우주선의 추락 폭발이라는 뜻의 해명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는 내용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이 사단과 관련된 일이므로 당연히 사단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시도하는 조작술이라고 이미 결론 내렸으므로 더 이상 살펴볼 흥미는 없으니 독자 스스로 판단하실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즉 “사단이 이 세상 왕이고 당신 역시 이 세상에 사는 일개 인간인데 감히 ‘왕’을 거역하는 이런 폭로가 가능하냐”인 것이다. 왕이기는 하나 절대자는 아니지 않은가. 인생들에게 진상을 밝혀 주어 인생 구원의 일을 돕자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따름이다. 감히 누가 막을 것인가. 사단이 이런 일까지 직접 막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활동은 이와 같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진리와 진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무쪼록 ‘믿지 못하게 하는’ 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얼마든지 전파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것이 정작 중요하므로 믿지 못하게만 하면 모든 것은 성사되는 것이다. 위협을 하든 회유를 하든 어쨌든 이 목적만 달성하면 사단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사단은 이런 자신감에 넘쳐 있는 자이다. 물론 그는 능히 복음(福音,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곧 복된 소식) 전파자를 죽일 수도 있고 고통을 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의인(義人)들을 죽이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위협하는 데에 목적이 있어 이런 죽음과 고난을 통해 협박함으로써 믿음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서 발을 빼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 위협의 수단으로 죽이고 고난을 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이 이렇게 의인의 죽음을 통해 인생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변경될 수 없는 진리이므로 그런 모든 고난과 죽음이 실질상 하나님의 뜻이므로 사단 역시 죽이는 데에는 목적이 없고 오직 위협 차원이다.


고로 그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치라도 어찌할 수 있는 권한은 일절 부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성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리적 힘은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단과 그 악령 일당의 독무대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거룩한 천사들과의 양립 형태다. 사단이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이기는 하나 인생 구원에서 각자 인간의 자유 의지만은 손댈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인생 구원의 말씀을 손댈 수 없는 이 두 가지 한계가 분명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법질서 유지 역할을 하는 것이 거룩한 천사들의 경찰(警察) 업무다.


의인이 죽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을 따름이고 또 악령들은 그를 죽일 권한이 있으나 이 세상 지배 차원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인다고 해서 사단 자신에게 득 될 일은 없으니 그 의인은 영생과 영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단지 증오심을 충족시켰다는 것이나 그것이 대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음이다. 고로 협박 차원에서다. 따라서 천사들도 이런 일은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13
조선 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영귀(靈鬼) 현상


그동안 틈틈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인터넷 기록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폭발 전후로 괴이한 광채가 공중에 걷히지 않았다 하는데 이렇게 폭발 이전에도 나타난 광채는 무엇일까. 극지방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오로라가 야단스럽게 펼쳐졌다고 한다. 계시록에 있는 대로 "하늘의 전쟁"이니 땅의 전쟁 이상으로 그 기간이 장기간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상당한 시간에 걸쳐 전개되었음이 명백한 치열한 전투 끝에 참패에 이르자, 사단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이미 지상으로 쫓겨 내려오는 판이었고 사단은 그 우두머리답게 그래도 한사코 버티다가 최후의 일격에 그냥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일거에 지상으로 곤두박질해 내리 꽂혔을 법도 하다.


그런 엄청난 충격 여파를 감안한다면ㅡ. 그렇다면 그 지상 충돌 이전에 보였던 기괴한 광채들은 지상으로 내리쫓기는 사단의 추종자들의 추락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선 실록에 기록된 대로 하면 태조 이후 왕실의 인물들(왕을 비롯해)이 영귀(靈鬼) 현상에 아주 예상 밖으로 많이 시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어찌 조선조 때에만 한하는 사실이랴. 우리나라 왕실은 기록 문화가 크게 발달하여 그런 귀중한 기록들을 후세에 남기고 있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왕실에서 참변이 일어나거나 왕이 운명할 때 혹은 기타의 경우에 왕실 공중에 괴상야릇한 빛이 감돌 때가 흔했고 또는 도깨비들이 횡행했다고도 한다. 이 도깨비로 가장한 것이 다름아니라 악한 영물들의 변신(變身) 재주인 것이다. 때로는 개나 말의 형상으로 때로는 형체도 없이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형체로 나타날 때는 귀신은 아닌 것이다. 영물들로서 예로부터 “도깨비”라고 이름 지어진 괴물들이 바로 그런 악령들의 조화술임이 명백하다. 세종대왕도 예외 없이 그런 것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소개하는 흥미 끌만한 그들의 특색은 오늘날 소위 UFO가 나타날 때의 현상을 그대로 재연(再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쉬잇 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 또 이 때쯤 되면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등의 괴변(怪變)들이다. 실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개나 말들이 그렇게 날뛰거나 짓는 것은 사람들과 달라 그들의 눈에 이런 악령들의 형체가 드러나 본능적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은 16세기 정도에 해당되는 때다. 그러므로 오늘날 악령들이 인간들을 속이는 것처럼 외계에서 오는 외계인의 소동이 아니라 악령들이 처음부터 자행해 오는 짓거리들임을 이로써도 뒷받침되어 증명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조선 실록의 가치는 크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퉁구스 대 충돌 사건 이전에 그런 이상한 광채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는 것은 그런 악령들이 정신없이 하늘과 땅을 무대로 하여 천사들과 일대 격전을 벌인 흔적이라고도 할까.




14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세상을 다시 새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알지 못할 때의 행동거지와 알았을 때의 언행과 사고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부르짖고 스스로 정의한(正義漢)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나오라. 왜냐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은 한낱 장밋빛 꿈이기 때문이다. 허송세월하지 말고 진정한 싸움 곧 악령들과의 대결에서 이겨 영원한 생명의 세계 설계(設計)에 이바지하서라. 즉 그 나라의 구성원들을 여기 이 세상에서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시한부 세상에서 남보다 더 빨리 뛰어 생존경쟁에서 아무쪼록 이기는 것은 생의 미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도 이제는 술에서 깬 것처럼 잠에서 깬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돌아와 더 이상 신기루를 뒤쫓는 일을 고집하지 말고 모든 것을 깨끗이 버리고 뒤로 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새 삶의 가치를 찾을 때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은 선하지도 않고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 것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에서나 엿볼 수 있다.


이미 인간은 그 스스로를 더럽혀 죽은 송장처럼 되어 있는 것이요 세상은 그런 이들의 집결 장소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만이 희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 모든 세상 인생들이다. 누구에게나 문호는 개방되어 있다. 오직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구조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인 줄 확신하고 이를 근거로 영원히 살기를 바라지 않는 한, 이 영생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눈이 앞에만 위치해 있는 것처럼 상대를 보고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순리다. 결단코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그 관심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되던 때부터 모든 피조물(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향유하는)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상호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영원한 삶의 체제다. 머리의 지시를 받는 것이 곧 순종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영생이다.


사람 사는 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공동체 의식으로 생을 일관한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생애와, 이런 극소수에 한하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특징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원균과의 삶을 대조해보면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원균의 삶의 유형(類型)이라고 하면 당시나 지금이나 이공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한(이런 사람들은 항상 극소수이므로) 모두가 다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선조(宣祖)를 위시해서 당시 조정 중신들 대다수,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당시 원균의 위치에 갖다 놓았으면 반드시 원균처럼 행동했을 것이기에 하는 얘기다. 원균은 그런 때에 마침 대표적으로 이공과 대조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색다른 이름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가 원균이다. 따라서 ‘이순신 정신’ 즉 공동체 의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람 사는 도리(의(義)를 행하고 선(善)을 행함-요일 2:29/행 10:35/요삼 1:11/롬 2:7,10)’의 핵심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다. 이공의 불우했던 생애에서 보듯이 그러한 자기 신념대로 살기를 작정하는 자는 절대로 악령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이것은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없이 그렇다. 이공의 전쟁 전 불우했던 반생(半生)이 그 증명이다. 대쪽 같은 그의 절조 있는 생활 이념에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있던 소인배들의 시기와 농간이 그로 하여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도무지 햇볕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나 오늘이나 세상은 같고 하나도 변한 적이 없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오죽하면 애꾸눈 원숭이 우화(寓話)가 생겨났겠는가. 어느 원숭이가 길 잃고 산중을 헤매던 끝에 어느 곳에 갔더니 원숭이 동네이기는 한데 모두가 애꾸눈이다. 정상적인 눈을 가진 자기를 모두 별종이라고 놀리고 상대를 해 주지 않고 핍박과 탄압이 자심하여 마침내 자기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고로 이와 같이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기를 선호하는 이들은 성경을 믿든 안믿든 하나님을 믿든 안믿든 무조건 이 악한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응달에 처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형통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의인들의 삶은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이공도 그런 미증유의 국난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사람이다. 이같은 막중한 인생 교훈을 위해서 그는 모든 인류의 본으로서 우뚝 선 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로 하리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해독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강조하는 삶의 법질서를 지키는 올바름(義)의 결과가 어떤 위업(偉業)을 이루는 것인지 역사적 실례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 배려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사례(事例)가 온 세계사를 통틀어도 부각되기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귀하기 때문이다. 아마 유일한 예일 것이다. 동방으로 빛(진리를 상징한다고 믿어)을 찾아 말을 달려온 민족의 정신이 마침내 결정(結晶)된 것이라 하겠다.


빛을 상징하는 흰 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장례식을 어느 민족보다 성대하게 치른 데에서도 내세를 신앙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국호를 처음 “조선(朝鮮)”이라 한 데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 사는 도리를 알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중원(中原) 사람들이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민족이기에 이와 같은 진귀한 역사적 교훈을 수확한 것이니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의미는 막대하고 막중하다.


인간 불행과 고통과 죽음이 바로 이 공동체 의식대로 살지 못해 비롯된 것이므로(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첫 사람 아담이 무시한 결과) 이 사람 사는 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 대열을 이루어 이제는 방향을 왕년에 왔던 쪽으로 바꾸어 일로(一路) 전진(前進) 말 달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지리적으로 정히 세계 중심(팔레스타인)을 택하셔서 사람이 되셨다. 이제 마지막 때를 당하여, “빛은 동방에서”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의 전파 면에서나 지구의 움직임에서나,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서의 영원한 삶의 이치를 땅 끝까지 달려가 알릴 소명(召命)이 우리 각자에게 부과되어 있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인생 구원은 사랑에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각자의 자유 의지와 선택에 일임한 상태이지 강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이다. 세상 종교 중에서 그런 강제성을 띠지 않은 종교는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가 동양적이고 덜 강제성을 띤다 하겠지만 현재도 동남아의 불교 국가들이 존재하는 데에서도 보듯이 국교로 되어 있을 때는 반드시 강제요 간섭 위주다.


개신교도 무력(武力)을 동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교로 삼고 있는 데에서는 마찬가지다.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도 남의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포교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러시아, 루마니아 등)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는 다시 말해 악령 사단이 이 세상에서 왕(지배자)이요 신이라고 밝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자처하고 있기는 천주교, 개신교와 다를 바 없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천주교처럼 그리스도 정교도 비잔틴 제국의 비호 속에 있다가 제국이 망할 때 러시아로 그대로 옮겨가 왕실의 종교가 되면서 국가 종교가 된 것이다. 사단이 독재하고 있는 세상에서, 무슨 권력을 얻어 나라를 그렇게 종교화하겠다는 것인가. 철부지는 아닐 터이니 간단히 말해 성경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표방은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쨌든 강제하고 간섭하는 것 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은 없다.


세상 모든 종교가 그러면 사단의 장중(掌中)에 있고 이 세상 모두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니 나 혼자 독불장군 외톨로서 어찌하란 말이냐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가치와 위치는 이 온 세상과 맞먹고도 남는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의 자주 독립성과 그 개성과 존귀(尊貴)는 이 모든 세상과 대등하다. 그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그 천하를 얻음이 무엇이 유익하냐. 무엇으로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하셨다.


이는 다시 말해, 온 세계를 적(敵)으로 삼더라도 내 생명은 내가 지킬 것이며 온 세상이 나를 적대시하더라도 나 홀로라도 이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바로 이런 개인의 가치를 말한 것이다. 이 가치를 아는 자만이  그 가치대로 유지하고 향유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대세(大勢) 앞에 굴복하여 스스로 그 가치를 버리는 자는 개인의 가치를 모르는 터이므로 ‘개인’으로서의 모든 효용 가치를 절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은 당연 사리(事理)다.


진귀한 보배는 그 가치를 아는 자가 주인이다. 그래서 보화를 발견한 자는 자기의 온 재산을 다 들여 그 보화를 매입한다 하셨다(마 13:44,45). 전 재산을 그 하나와만 바꾼 것이므로 당장은 가난의 고생이 막심하나 그 보화를 소유하였으므로 마냥 흐뭇하고 만족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이 이 세상(苦海, 死海)에서의 진정한 행복이요 만족이요 자유다. 사단이 어떤 존재인데 얼마나 속임수에 능통한 자인데 가짜를 아니 만들겠는가. 거짓말이 한계가 없듯이 가짜를 만드는 데에도 제한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참으로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추려내고 솎아내고 걸러내는 작업으로 역(逆)으로 활용하시는 터이므로(살후 2:11,12) 사단의 이러한 활동(세상 종교 즉 가짜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하게 하려는)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再臨) 날까지는 절대로 제지하실 이유도 없다. 따라서 사단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런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인생들에게서 하나님 대신으로 경배나 받는 따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 ‘철부지’ 생각이다.


사단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만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의 존망(存亡)과 직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원 얻는 이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일정한 숫자에 미달하면 할수록(계 6:11) 그가 이 세상과 더불어 남아 있을 확률이 그만큼 크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관심은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데에 있다. 이슬람교는 교리는 차치하고라도 강압적으로 포교를 해 나가는 종교로서 정평이 나 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마리아 숭상(崇尙)을 반대하는 것은 무조건 이단시하여 박멸해온 것으로 이력이 나 있다. 그러면 개신교도들은 말하기를, “개신교가 세력화하지 않으면 천주교 등쌀에 살아남기나 했겠느냐?” 하고, 천주교도들도 말하기를, “콘스탄틴 황제로 인하여 기독교가 국가의 강력한 비호를 받지 않았다면 나중에 이슬람교를 감히 막아낼 수 있었겠느냐?”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리다. 초대교회 이후 300년간 각종 핍박을 받았지만 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도들이 곳곳에 없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는 법이다. 핍박을 당한다고 끊기는 것도 아니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다고 해서 창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단을 위시한 악령 일당이 이 세상 지배자이나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통제 아래 있는 것은 불변의 현실이다.


사단과 대등한(지금은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이후 절대적 우세로) 천사들의 대군단(軍團)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모두 인간에 대한 적법하지 않은 악령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제지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단 12:1). 이와 같이 악령들이 이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공정공평과 공명정대하심, 원리원칙주의를 웅변하는 것이다. 인생들을 위해서나 영물들을 위해서나 결단코 편파주의로 나가시지 않는다.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악령들의 소행이 가증스럽다고 해서 결코 무리하게 압박하시지 않는다. 이 때문에라도 악령 사단은 지금까지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자기의 계획이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터이지만, 오직 그의 결점은 오만(傲慢)함에 있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다소곳하게 믿지 않는 데에 있다. 믿어야 마땅하고 또 얼마든지 믿을 수 있지만 그의 오만함이 그를 망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시인한다 해서 전부가 아니다. 그 말씀을 자기 구미에 맞게 비틀어 억지로 해석하게 되면(벧후 3:16) 만사 휴의요 도로무공이다. 이것 역시 모두 오만(驕慢)의 결과물이다. 자만심(haughtiness, arrogance, pride)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멸망의 앞잡이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다. 개신교의 또 하나의 불신(不信,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형태는 미리 택하신 자가 구원된다는 허황된 억지 해석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에 따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제, 간섭에 의한 인생 구원이라고 선전하는 꼴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러고서도 어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을 편당, 편파주의라고 세상에 대하여 악선전하는 꼴이니 어찌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런 개신교나 천주교 등 소위 “기독교”가 들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부정할 수 없는 대체적인 현실이 되어 있다.


불교는 가르치기를, 내가 세계의 중심으로서 세계가 나 때문에 있다고 한다. 왜냐면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인식되기 때문이니 내가 존재하지 않다면 억조(億兆)의 세계가 존재한들 무슨 의미가 있고 필요한가 하는 그 뜻이다. 그러나 한편 ‘나’만 아니라 ‘남’도 실존(實存)하니 공존(共存)의 세계다. 그러면 서로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 하니 마찰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대립하니 불행이 끊이지 않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제압하려 하다가 드디어는 상호 파괴행위로 치달아 그래서 종국적으로 살인자가 되어 공멸(共滅)한다.


나만 아니라 남도 나를 없앨 수 있으니 결국 다 함께 죽음이요 멸망이다. 예컨대 저쪽이 선수(先手)를 쳐서 나를 해치는 경우를 대비하여 저쪽도 결코 무사하기 않도록 내가 지닌 각종 보화에다 감쪽같이 폭발장치를 미리 해놓았다 할 때 그래서 저쪽이 이제는 주인 없는 재물이라 하여 얼씨구나 하고 그 보화에 손을 대는 순간 저쪽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러나 그 해결책으로 불교가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존재하기는 하되 실제적으로 그 ‘나’라는 것이 ‘나’일 수가 없다는 고작해야 그런 억지 논리이다. 세계의 중심이므로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바로 이것이 그 ‘나’가 실제 내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한다. 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덧없다”(無常) 하고 덧없는 데에서 인간고(人間苦)가 있으니 결국은 ‘나’라는 것이 실제의 ‘내’가 아니라는 의미다.


나라면 세계의 중심이므로 이런 인간고가 없어야 당연한데도 엄연히 있으니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는 ‘내’가 아니기에 그렇다고 말한다. 내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는 것이라 이것이 ‘연기(緣起)’인데,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모든 것이 연(緣)하여 일어나는 연기생(緣起生)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로 나라는 것이 실제는 없기 때문에 아등바등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움직이는 일체가 무명(無明)이요 미망(迷妄)이라고 한다.


실상이 아닌 허상만 붙들고 있으니 고로 자기가 없음을 인식하게 될 때 욕심이 일어날 리 없고 욕심에서 해방되니 자유를 만끽하게 되고 평안이 오며 따라서 희열이 따르게 마련이요, 결국 일체의 괴로움이 소멸된 안락의 세계를 열반(涅槃)이나 해탈(解脫)이라 말하고 깨달음(覺)의 세계라 하고 자유 곧 해탈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자유가 해탈의 본질이며 속성이라는 것이고, 나만 아니라 모두가 그런 인식을 하게 될 때 세계 평화는 오는 것이요, 내가 있어야 영생 극락도 찾게 되고 지옥 멸망도 기피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나라는 존재부터가 있지 않으니까 그런 저런 갈망이나 공포에서부터도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억지가 되는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는 것이 연기(緣起)의 진리일진대, 그러면 우선 나 자신이 어째서 생겼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그러면 그 위로 또 그 위로 자꾸 올라가 최초의 부모는 어디서 생겼느냐 할 때 나에게서 곧 이 나 자신에게서 생겨났다는 결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과론에서 반드시 그 첫째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첫째 원인을 부정하게 되면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드는 순환(循環)만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머리도 꼬리도 없다. 그런 논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일원인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제일원인을 시작점으로 해서 연기(緣起)가 작동되는 것이다. 앞에서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전제했지만 동시에 ‘나’만 아니라 ‘남’도 엄존(儼存)함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만 아니라 그 남이란 것은 어디서 떨어졌고 어디서 솟아났다는 말인가. 그 최초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왜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는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방금 지적한 대로 내가 남이고 남이 곧 나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남을 비롯해 온 천하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덧없음을 한탄할 것도 없고 말 것도 없다.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분명히 인간고(人間苦)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할 수 없는 고로 이상의 모든 결론이 결국 억지 논리가 되는 것이다.


제일원인으로서의 창조주를 억지로 외면하려 들기 때문에 첫 단추 잘못 끼운 바람에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혼돈의 귀결이다. 논리의 혼돈, 더 정확히 말하면 모순이요 자가당착이다. 모순이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자체 증명이다. 원인은 외면하고 장차의 전망(前望)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채, 현재의 결과만을 놓고 인과 관계를 억지로 꿰어 맞춘 엉성함이니 이런 것이 반(反) 논리다. 그러면 첫 단추부터 바로 끼운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라.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그런 관점에서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다. 나라는 개성(個性)은 우주 천하 유일하게 오직 나뿐이다. 나 외에 또 다른 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나’ 그리고 ‘개성’이, 나만 아니라 세상에 부지기수다. 색깔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별개이고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현실성을 무시하지 않고도 나 개인의 세계 중심임을 유지 보전하는 비결은, ‘한 몸’의 체제 바로 거기에 있다.


한 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임과 동시에 또한 말 그대로 여러 개체가 조합하여 조화하여 통일되게 움직이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대별(大別)하면 머리와 몸 관계다. 머리는 몸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존재하니 상호 의존적이다.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할 뿐이지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위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위하는 경우 이 ‘한 몸’ 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부적으로 살필 때, 몸을 이루고 있는 구성 인자 중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각 지체(肢體) 각 부분은 그 나름의 엄연한 자주 독립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한 몸이라는 세계에서 자기라는 개성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아무리 작고 미미한 존재라도 그 한 몸 구조 속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구성 인자인지라 당당히 칙사 대접을 받는다. 그 중요성은 머리의 중요성만큼이나 인정된다. 왜냐면 한 몸 구성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로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의미에서 당당히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한 몸 구조에서는 그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체제다. 머리도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몸의 모든 지체 각 부분을 위하는 위치다.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각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 보듯이 세포 하나라도 그 중요성은 온 몸이 인정하고 드는 상태다. 그래서 그런 세포 하나라도 자기 개성이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몸의 구성 인자’라는 위치에서는 충분한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게 된다.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자기를 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비로소 여기에서 ‘세계가 바로 나이고 내가 세계’라는 등식(等式)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근거에 의해 성립된다. 왜냐면 나를 위하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세계에서 주인이요 나머지는 나를 위하고 섬기는 종이다. 머리를 포함해서 그렇다. 나 역시 당연히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 각 부분에게 그러하니 즉 종으로 섬기며 그들을 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요 동시에 주인이 되는 오묘한 삶의 지혜가 바로 이 한 몸이 되어 사는 삶의 체제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두고  왜 말이 많은가.


따라서 나는 나의 색깔은 파랑이지만 주위의 모든 색깔을 형형색색으로 다 골고루 그리고 충분히 내가 원하는 대로 맛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그것을 탐할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 “나는 당신의 것으로서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니 할 말이 무엇인가.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러하니 내 스스로는 무소유(無所有)이면서도 만유(萬有)의 주인이다. 나(自)라는 존재는 엄연히 있으면서도 남(他)들과는 일절 충돌 없이 도리어 그 모든 남을 내 것으로 자동적으로 삼을 수 있는 삶의 최고도의 지혜다. 이런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공동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타(他)의 간섭이나 강제가 없이 스스로 즐겨 하는 데에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아니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이니 똑같은 일이지만 남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리 속박으로 비쳐지더라도 나는 그것을 즐김으로써 기뻐 자진해서 할 경우 내게는 분명코 자유이다. 가치 기준을 외부의 사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두는 상대적 개념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내가 그것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면 그것은 분명 내게 속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으신다. 죄를 짓지 않아도 즉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해도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하는 것을 원하신다. 죽인다고 협박을 하고 강제해도 또는 별별 것으로 회유를 하며 간섭해도 거기 개의치 않고 오직 내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신다. 인생 구원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생명(영생) 하나만을 주시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개신교나 천주교 신앙의 전부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자를 만드심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고후 5:15).


이 공동체에서 머리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이 머리 역할은 너도 해서는 안되고 나도 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서로 머리가 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를 생성시킨 제일원인이 그 머리 역할을 하는 법이다. 인간 삶의 행복과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만유의 어버이이신 창조신의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데에서 칸트의 소위 요청적(要請的) 유신론(有神論)이 나온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필요성은 그와 같이 되도록 처음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런 삶의 결과가 되도록 작정하시고 이 의도하에 피조물(자연계에 속한 기계적 생명체가 아닌 지, 정, 의를 구사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인격성을 지닌)을 만드신 것이다. 피조물을 시종일관 사랑하여 위하심으로써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려는 의향이 없이 만드실 리가 없다. 자기가 낳았다는 단순히 그 사실 때문에 헌신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이 바로 이 창조주의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이들 피조물은 본성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처벌하실 리가 없다. 이를 따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한 몸의 이치대로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으니 피조물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각 지체를 위하게 되어 있는 그 이치를 말한다. 이 이치가 당연히 생명의 법질서(法秩序)가 되어 마땅한 것이다.


즉 머리를 위하고 이웃 지체들을 위해야 하는데 이 이치를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니 범법(犯法) 행위다. 알면서도 어기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 까닭에 용서가 되지 못한다. 한 몸 체제에서 그런 것은 암적(癌的) 존재이므로 암세포는 제거하지 않으면 주위로 전이(轉移)가 되고 몸 전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그래서 부득불 절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또는 멸망이다.


때문에 영물들은 죄의 결과로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고 아담은 영물 사단의 꾐에 넘어가 역시 범죄하게 되자 신령한 몸을 상실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항구적으로 귀속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인생의 죽음과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다. 그 결과다. 죄를 지은 것이 그 원인이요 죽음과 그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고난과 고통이 그 결말이다. 산다는 것은 모름지기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철저히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 상호간을 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기 중심이 되어 그런 암적 역할을 하여 자타 공히 죽음에 빠뜨리는데 그 죄가 용납되겠는가.


새 창조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머리 역할을 새로이 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한 몸 구조다. 고로 이를 알면서 짓는 죄는 용납되지 않으니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면 말하기를 “그리스도 없이도 그렇게 한 몸으로서 이제부터 살면 되지 않는가” 할 것이다. 인과론에서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현재의 결과를 해결하려면 원인 제거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죄를 지음으로써 그 대가로서의 죽음이 현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음으로 일관해야지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면 법질서 확립이 안된다. 이는 그 질서를 뭉개고 없애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시는 이전처럼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고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해도 죽음이라는 결과만 붙들고 있는 몸부림일 뿐이지 원인 제거가 안된다. 즉 죄라는 원인이 있어 죽음이라는 결과를 내었은즉 인과 관계를 따라  죽을 것은 반드시 죽고 나야 한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그 죽은 자에게서 모든 인류가 생겨났으니 그 죽음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미도 있고, 또 우리 자신이 이제까지 사람으로 나서 범죄하였은즉 그 범죄에 대한 대가(代價) 역시 죽음인지라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내 스스로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완전히 고쳐 먹고 바꾸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죽고 난 그 다음에 할 이야기다. 이것이 엄정한 법질서 확립이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죽은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죽을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니 곧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 나와 함께 하나가 되시고자(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가 되시는 역할로서) 함이 목적이고 이렇게 하나가 되시어 다시 살아나실 때 나 역시 함께 살아남이 되도록 하시고자 함이다.


즉 죽는 자로서는 반드시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산 자로서 내가 영원히 살고자 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생소하게 들리면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윗분이 계시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이 제일원인으로서 최고봉이신데 그 위에 한 분 더 상위(上位)에 누가 존재하신다 하면 우선 느끼기에도 마음 든든하고 무엇인가 꽉 짜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위에 계시는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을 낳으신 또는 만드신 분이시다.


이 낳고 낳아지는 것이 또 어색하게 들리면 실체와 형체, 실질과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면 된다. 즉 실질로서의 어떤 존재가 형상을 띠게 되는 그런 모양새다. 순서상 실질이 있으니까 형상이 생기는 것이지 형상이 있고 나서 실체가 생기는 법은 없다. 고로 실체와 형체는 불가분으로서 항상 함께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원리가 정착하는 것이다. “한 하나님” 즉 하나로서의 모습으로 계시는데 아버지(先在)와 아들(自生이 아닌 獨生)이시다.


하나로서의 빛인데 그 내용을 뜯어 보면 입자와 파동임과 같다. 짝의 원리이니 이 둘로서 짝을 이룬 것을 둘이라 하지 않고 하나로 보아 “한 벌”, “한 켤례” 등으로 단위를 매겨 주는 것과 같다. 대칭에서는 반드시 먼저 있는 기본형이 있기 때문에 그 대칭형이 있는 법이다. 기본형 없는 대칭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상과 실체는 항상 불가분이므로 아들께서 만유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나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에서도 같은 양상이니 아들께서 친히 우리 위해 죽으셨으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어 세상을 자기와 화목(和睦)하게 하시는 일을 하신 것으로 성경은 설명한다(고후 5:19). 아들께서 당하신 죽음의 고통을 아버지 친히 똑같이 나누어 지신 것이 이 "하나"의 개념이다. 내가 구원되는 이치 역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내가 불가분이 되어 "영혼"(그리스도의 영, 성령 곧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원래의 모습)과 "육체"(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나 자신) 관계를 이루고 계심이다.


이런 이중(二重) 구조는 내가 신령한 몸을 입고 있을 영원 세계에서도 변함 없는 ‘영혼’과 ‘육체’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나만 그럴 뿐 아니라 모두가 그와 같이 성령을 모시게 되어 있음으로써 공동의 머리를 각자 모시고 있는지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완전한 "한 몸"으로서의 구조다. 실로 이상향적인 삶의 체제이다. 불교 교리처럼 번연히 존재하는 나를 없다 하고 실체가 아니라고 자기 세뇌 내지 최면시키려고 헛되이 끙끙 댈 이유가 없다. 물 흐르듯 하는 순리를 따르면 그냥 그대로의 태평 연월인 것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내닫는 꼴이다.


처음 창조로서의 한 몸 체제는 인간(아담)의 범죄로 폐기되었고 새 창조에서의 새로 된 한 몸 구조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한 죽으심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육체는 영혼을 위하고 영혼은 육체를 위하는지라 역시 이 점에서도 완연하고 완전한 한 몸 관계다. 성경은 명백히 이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전 6:13,17). 그래서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이 자아중심(self-seeking, selfishness)이 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심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산 자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나 자신과 우리 전체의)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15)이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서로 위하는 관계에서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고 그리고 그 위하심이 한 터럭도 부족하거나 소홀하심이 없다고 믿는 관계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무슨 굉장하고 엄청난 가히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할 무엇이 아니라 아주 상식적으로 알 수 있고 이해하여 그대로 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방법인 것이다. 단지 이 세상은 자기 부인 아닌 자아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있는 세상이므로(그래서 죽음과 죄악의 바다(死海, 罪海)라 하는 것) 자기 부인이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음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난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뿐이다. 자기 부정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중심의 세상과 자기 부인의 삶의 법칙이 상극이 되어 적대 관계에 있는데 어찌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겠는가.


이를 극복하는 것이 승리가 아닌가. 세상에 동화(同化)하여 제 색깔을 선명히 부각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패퇴요 항복(降服)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그것은 지는 것이므로)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는 성경의 경고가 그 뜻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니 오직 어버이 위치에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시는 몫이다. 자기 자신을 모두 내게 선물로 주신(그래서 성령의 선물이요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영원히 소유(所有)하고 있음이다-요이 1:9) 마당에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원하리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랴. 엄마 품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가 그 엄마에게서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를 위해 바치신 것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를 위해 죽으심은 영원토록 나의 소유가 친히 되어주시어 마치 주인처럼 나를 섬기신다는 의미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종 노릇함과 같다.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으로 “확증된 사랑”(롬 5:8) 이상으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과거에는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알았으니 아는 대로 행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무엇이 있고 득이 되는 것이 또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고들 하는데 사람 삶에는 사랑이 핵심이고 사랑에는  자유가 핵심이므로 그래서 자유 의지를 주시고 자유로이 선택하여 자기 운명까지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셨다. 인생들은 지금까지 악마의 압제를 받음으로써 자유를 외치면서도 실제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자유는 사랑 가운데에서만 누리는 법이다. 자유 해방은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주지 못한다.


그 자체가 악마의 장중(掌中) 안에서 요리되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어버이 사랑이다. 엄마 품속에 있을 때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제 하나님 품속으로 돌아가 그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곧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감이다. 원 상태로 회복되고 환원됨이다. 막된 막내아들이 자기 몫으로 자기 유산 분을 미리 다 챙겨 가지고 집을 나가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필경에는 거지가 되어 돌아올 줄 알고 비록 그런 못된 아들이지만 날이면 날마다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는 아버지로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친히 묘사하셨다.


곧 당신의 마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그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막된 아들을 다시 맞아들임을 "잃어버린 자식 되찾고 죽은 아들 다시 살리는" 기쁨에다 비유하셨다(눅 15:32). 또한 “내가 몇 번이나 암탉이 제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로 모으려 함과 같이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하시며 우셨다("weeping"-눅 19:41). 아들께서 아버지의 모습이실진대 아버지께서 그와 같이 눈물지으신 것이다. 그 우시는 사랑의 어버이 마음이 우리를 위해 죽음의 고난까지 함께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최초 원인이시자 근본이시므로, 사랑만 아니시고 동시에 “소멸(消滅)하는 불”(히 12:29)이시다. ‘용서하시는’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결코 ‘용서하시지 않는’ 심판대의 재판장이시다(고후 5:9-11). 때문에 죄를 짓는 자는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다시는 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회개하는 자를 위해 오신 것이지(눅 5:32)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은 아니니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 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이제까지 없던 의인을 이제부터는 있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 그대로 있으면서 구원되기를 바람은 미신이다. 이런 미신을 믿어 마치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온 그리스도’로 착각하여 성경과는 반대로 가르치기 때문에 개신교나 천주교가 모두 세상 종교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이 무신론을 만들어내어 세상에 만연시키는 바람에 이런 무신론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자체만 해도 무슨 큰 공덕이나 쌓는 것처럼 여기나, 하나님 아무리 믿고 성경을 아무리 위해도 성경에 가르치는 이상 이치를 마음에 새기지 않는 한 안개 잡는 형용밖에 안된다.


“유불선(濡佛仙)”이란 말이 있듯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3대종교로서의 유교는 엄격히 종교라고는 할 수 없고 할 수 있다면 ‘조상 숭배교’라 할 수 있고, 선교(仙敎)나 도교(道敎)는 오늘날의 UFO를 종교화하는 모(某)집단과 같고, 불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까 더 말할 것도 없으나, 세계 종교 분포를 볼 때 기독교가 단연 우세하나 이를 구성하는 천주교, 개신교 모두 성경과는 관계 없는 교리를 만들어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으니 이 사실 자체가 마귀(사단)의 존재 다시 말해 그의 이 세상 지배를 입증한다.


그들의 교리가 성경과 배치된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 교리(천주교), 성경 로마서 7장을 사도로서의 바울 자신의 체험으로 믿는 억지 해석(개신교) 등이니 양자가 공통이다.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는 성경임에도 이 정도의 엄청난 곡해(曲解)란 것은 인간 자체만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스도인 체험’으로서의 로마서 7장 해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막무가내로 죄인을 죄인으로 치부하시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는 뜻으로 필연적으로 연이어지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반드시 사단이 그 배경에 있지 않은 인생이 없으므로 사단의 조종으로 그런 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니,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지 죄인이 어찌 의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라 할 것인가. 그런 것이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따로 있는가.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이니 여기서 말을 혼탁하게 만들기는 불교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개신교 교리를 믿는 종교인들을 위선자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개신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절대 다수 또는 거의 전부가 그렇다는 뜻이다.

성경이 그리스도 오신 후에야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행 17:30). 왜냐면 회개하라는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 즉 죄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라는 의미인데,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회개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 의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즉 죄인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함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을 상징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 밝히는 대로의 자기 중심의 성향인 “육신”(롬 7:4-8:13)이 척결되어 있지 않아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과거에 지은 죄는 죽음이 그 대가(代價)인데 죽지 않은 다음에는 죄가 그대로 있어 의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이상 두 가지가 다 해결되었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비로소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 해서 이런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는 뜻의 “칭의(稱義)”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즉 실제는 의를 행하는 의인이 아니나 “의인이라 불러 준다”는 의미이다. 개신교의 이러한 치명적 오류는 천주교보다 더 험악하다 할 수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양심마저 무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 그대로이므로 줄곧 죄를 책망하고 있어 천주교는 이 양심의 소리만은 차마 거역할 수 없어 ‘마리아’라는 최면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리아’ 교리는 옳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을 이룬 마당에 그래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는”(요이 1:9) 터에 마리아가 무슨 군더더기인가.


그리스도복음(福音, 희소식)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나를 찾아 오시어 내 안에 임하여 계시는 데에 있다. 성경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부(敎父)”의 권위가 어디 있는가. 교부가 여러 수백이 된다 한들 사람일 뿐이다. 오직 ‘인간의 성경 해석’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수천 수만이라 하더라도 사단은 한 사람처럼  취급하여 조종할 수 있다. “칭의(justification)”의 성경적 의미는, 내가 이제까지 의와 선을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있다고 해도 가치가 전혀 없는데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다시는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고후 5:15) 회개 곧 약속 하나만으로써 나를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죄인을 무턱대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당연한 약속을 수용하심으로써 비록 내가 이제까지 지은 것은 죄밖에 없고 의를 행한 것이 없지만 그래서 죄인으로 이제까지 지내왔지만, 죄를 짓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 하나로 나를 믿어주시고 하나님의 아들(養子)로 삼아주심이 “의롭다 하심(to justify)”이다.


단지 약속에 불과하지마는(또한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고 미리부터 인정해 주심이다. 그러나 당연히 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니 약속을 했으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받아들이셨으니 약속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거짓말하고”(행 5:4)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판정된다. 이런 사람이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다. 물론 말로만 회개(약속)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칭의’에서 제외된다.


성실하게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회개하는 사람에게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런 시작을 잘한 사람도 중도에 마음을 돌리고 믿음을 떠나는 수가 많음을 성경은 쉬지 않고 경고하고 있다. 내가 나를 위해 다시는 살지 않기로 회개하는 데에서 나의 죄는 용서되니(행 2:38) 나는 깨끗한 것이며, 그리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않을 것이고 보면 거룩함의 제일보는 이미 내디뎌진 것이다.


끝까지 이러한 거룩함의 상태를 유지 보전하는 것이 성경에서 명령하는 대로의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이미 이루어 주신 사실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지, 감히 믿지 못한다 하여 우물쭈물 대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셨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세우는’ 데에서는 사단이나 우리의 이런 경우에서나 아무 차이가 없다.


오늘날 “황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마 3:3)”가 요구되는 때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외치다가 불의한 자에게 목 베임을 당했다. 우리고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파할 때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세상에 알릴 때 거친 황야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사람 살 수 없는 광야임을 밝히는 뜻이었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다.


사단이 앞세우는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무릇 그리스도를 구원자, 인류의 구주로 믿는 자는 무조건 끌어다가 여지없이 몰살당하게 할 것이다(계 13:15). 그래서 이런 날을 예언하여 바울 사도는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1-40)고 하였다. 바울의 편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당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로서 그 안에는 여러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당장 오실 것처럼 말한 것도 그 때 당시에 금방 오실 것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요 그런 편지이기 때문에, 장차 그 편지를 오늘날 우리가 읽게 될 줄 아시므로 지금 오늘을 위해 그런 말씀을 주신 것이라 믿어도 아무 하자는 없다.


이상의 모든 설명을 단지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의 해명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피력한 "일설(一說)"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세상 사람들에 의해 옛날부터 오랫동안 회자되어 오는 용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사단(Satan)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성경을 알되 피상적으로만 이해해왔음에 대한 맹성을 촉구함이 되어야 한다. 또 이런 증명은 성경이 밝히는 대로 이런 사단 등 영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증명이요 이는 다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이 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상 사실(용이 사단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동양에서는 용을 상서로운 것으로 믿어 천자(天子)나 군왕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이고 종교(특별히 불교 계통)에서도 이를 기리고 있는 형편에 유독 성경만이 악마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설명해도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를 믿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퉁구스 충돌 사건도 성경에 예언된 것을 따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 용을 묘사하기를, "큰 뱀과 같은 형상으로 등에는 뻣뻣한 비늘이 있고, 얼굴은 사나우며, 뿔과 귀와 수염과 네 개의 발이 있고 깊은 연못, 호수, 바다 등 물 속에서 살며 때로는 하늘을 날고 구름과 비를 일으킨다"고 했으니 예로부터 용을 실제 목도한 이들의 증언에 따른 것임이 확인된다. "비, 구름을 일으킨다"는 것은, 위의 설명에서 나오는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 "충돌의 중심이라 확인된 장소의 습지 쪽으로 다가가서 보았더니, 하늘 높이 치솟는 수증기, 검은 연기, 소나기 내리 때리듯 하는 진흙탕으로 제대로는 보지 못했지만 습지 한가운데에서 하늘 높이 뿜어져 올라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의 악마 사단의 실존, 그런 피조물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실존, 이런 모든 사실을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이 되는 것 등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많고 따라서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의 중요성이다. 그냥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정도로 참고로 일이 둘 일이 아니다. 영원한 생사 간의 운명을 결정 짓는 중차대한 순간의 기로에 현재 위치해 있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이 일관되게 '가(可)'표(또는 '부(否)'표)를 던져도 나만은 신념 있게 '부'표(또는 '가'표)를 던지겠다는 결의에 차 있어야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이요 개성이다. 절대 다수라 해서 그것이 진리 편일 수가 없다. 대세를 동원하여 진리 연(然)하여 인생들을 속이려고 사단은 세상에 "네피림"을 많이 양산하여 절대 다수의 우위를 차지하도록 이 세상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두고 있다. 이 절대 다수 속에는 소위 "내로라"는 쟁쟁한 인물들로 그득하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고전 1:26),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거의 전부 그 편에 속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27,28) 데에 있다고 한 대목을 결코 소홀히 들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 따라 부화뇌동(附和雷同, 자신의 일정한 견식이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거기 어울리어 행동하는 것)할 일이 아니다.





 마지막 조언



노아 홍수 전 당시 세상에 대하여 노아는 경고하였다.
허나 이 경고에 유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증거는 당시 세상에서 구출된 사람은 오직 노아의 직계 가족 8명
곧 노아 부부와 아들 3형제와 자부들뿐이었음에서 드러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던 전날 밤 롯이 그 사위들에게 경고를 해 주었으나
그들은 롯이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경고는 받아도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늘날도 노아 때와 같으리라고 주님은 미리 경고하셨다(눅 17:26).
오늘날도 이런 경고를 역시 농담쯤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날 이 경고도 온 세상에 알려지지만 이에 유의하는 사람 과연 몇일까?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리고 "역사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망한다"는
음산한 이 경고가 자신에게 적응되지 않도록 각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들 악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육체로 있을지라도
우리의 배후에는 그들보다 더 막강한 천사들의 세력이 포진해 있다.
악령들이 정도에 지나친 행동을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천사도 악령도 없는 완전 중립 지대처럼 되어
오직 인간만이 이 지상에 우뚝 서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를 보우하는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들의 지나친 간섭이나 강제나 무리한 행동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당해야 하는 것은
남김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 채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 의지는 그 천사도 악령도 추호도 손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여 행동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필요 이상 이들 악령들의 존재와 활동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소위 “외계인”이라 하여 악령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므로
그 정체는 알아두어야 하겠기에 이런 말도 여분으로 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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