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죽음을 생명으로 오인하는 인생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무엇이라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라고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니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사 40:6-11).
하나님은 인간을 마르는 풀로도 시드는 꽃으로도 만드시지 않았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써 죽은 자가 되어 저주를 받은 결과일 뿐이다. 이 죽음과 저주는 "이 세대"(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대는 끝난다)가 종료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아담의 "오는 세대"에서도 여전히 그 영향력이 미쳐진다. 왜냐면 아직은 마지막 심판이 되지 않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기 전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아담의 통치 기간에도 구원 얻은 사람들(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지 않은 이들)은 아직 영생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빚어진 참극이다. 말씀은 법칙이다. 원리원칙이므로 영원 불변이다. 어리석게도 이 법칙을 따르지 않은 것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 온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영원히 선다"고 전할 일이다. 법질서 확립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때가 되었다. 이 세상은 죽음의 질서 아래 있다. 때문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 사탄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히 2:14) 있는 자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죽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죽음 가운데서 구출되기 위함이다. 말씀을 배워 믿으면 단 하루만에 구원의 대역사가 완료될 수 있다. 다만 그 순식간에 이루어질 생명의 대역사의 순간에 이르기 전에 망대 세우기 전 전쟁에 임하기 전의 충분히 셈하고 따져 손익 계산을 하는 시간적 여유는 사람 한 평생이라는 것으로 충분히 주신 것이다.
영원 세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함에 있어 이 시간은 길다면 길다. 오직 이 결단에서 영원 운명을 가리키는 바늘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고로, 이렇게 길다면 긴 심사숙고의 기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왕청스럽게 마치 죽음 아닌 생명, 저주 아닌 하나님의 축복의 시대인 양 착각 억만 금보다 더 귀한 시간들을 낭비하기에만 바빴으니 자살행위가 따로 없다.
이 세상을 원래가 삶의 고장인 양 크게 오해한 것은 성경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덴낙원을 자연계 어느 동산쯤으로 여기지를 않나 사탄을 "그룹"(cherub)이나 "스랍"(seraph)으로 인식하지를 않나, 무식이 대판이다. 사탄에게 꺼둘릴 대로 꺼둘려 온 것이다. 소위 "외계인"으로 가장하는 악령들의 속임수에 말려들지를 않나,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은 똑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외칠 때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아름답게 창조된 아담 이상의 피조물은 없는 것이었다. 먼저 창조되었다면 스랍, 그룹들뿐이다. 그들의 형상도 하나는 사람(하나님의 형상과 모습), 소, 독수리, 사자 등으로 표현되어 있을 정도다. 제6일 창조를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보아도 좋다. 영물들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얼굴처럼 고정 고착화되어 있지 않고 번개처럼 그 형상이 교차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오늘날 나타내고 있는 소위 "외계인"은 눈도 커다랗고 얼마나 보기 흉한가. 그런 상식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그런 황당한 거짓말에 넘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일이 아닌가. 옛 시대 유물로 소위 "외계인"이 "우주복"을 입고 있는 듯이 그려 새겨놓은 것도 악령들이 오늘날과 같은 때를 기다려 그렇게 준비해놓은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들은 오랫동인 이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시작하려 했지만 "막는 자가 있어"(살후 2:7) 오늘날까지 내려 왔으니, 그런 작업도 미리 해두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신(神-고후 4:4)"이라 하겠는가. 물론 전지전능은 아니니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도 있고 착오도 있었다. 사탄은 교만하기도 하지만 그런 실책도 잦은 자다. 욥의 시험에서도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도 의당히 십자가상에서 내려 오실 줄로 알았지만 그 예상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 의미도 없고 살 가치도 없는 죽음과 저주의 질서 아래 있음을 외칠 때이다. 3운법칙이라는 철창 안에 가두어 놓은 꼴인 수성(獸性)의 인간에게 무슨 기댈 것이 있어 삶을 꿈꾼다는 말인가. 모두 3운법칙으로 얽어놓았기 때문에 겨우겨우 지탱해가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께서는 모든 인생을 "죽은 자"(마 8:22)라고 쾌도난마로 정리해주셨건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까지 그러했지만 이제부터는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인생들의 실상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외칠 시점이다. 그런 것 없이 공짜로 주는 영생쯤으로 착각해 왔으니 오늘날과 같은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인간의 피상적인 얄팍한 지식에다 성경을 꿰어 맞추려 하니 그런 구차한 꼴을 보인 것이다. 성경이 아담 이후 현재까지의 연대를 말했으면 말한 대로 수용하면 될 일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러한즉 말하지 않으면 되고 몰라도 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출생함 즉 육으로 났으니 이제는 영으로 나는 것으로써 새로 창조되는 데에 있지 달리는 없다.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기에 감히 성경 내용을 그런 잣대에 얹어놓고 재고 달고 하려는가. 말씀은 가감하는 법이 아니다. 법칙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법칙을 건드리면 범법자가 되는 길 이외에는 없다. 법칙이므로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룬다고 하셨다(마 5:18).
우리 인생이 죽은 자,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새는 둥지가 있고 여우는 굴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지 않았는가. 신학도들이여,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가. 지체할 때가 아니다. 온 세상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바로 보라고 외칠 일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시고 친히 그 팔로 만국을 다스리실 때가 임박했으니 시급히 죽은 자로부터 벗어나 산 자가 될 일이다. 영원 멸망의 낭떠러지가 바로 각자가 내딛는 발 아래 있다고 그 절박한 위험을 알리지 않고서 그 피 값을 모면하리라 감히 생각하지 말 것이다(행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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