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로만 선명하게 나타나는 게시물 (11)
불교가 진화론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되는 까닭이다. 즉 불교가 핵심 교리로 내세우는 것은 무상(無常, 덧없음)이니 곧 생멸전변(生滅轉變)의 이 자연계의 현상만을 본 결론에서 출발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연계와는 180도로 다른 초자연계가 대칭성 원리로 자연계와 똑같이 양면성으로 그리고 동시성으로 존립함을 전혀 모르는 무지 상태에서 그 무슨 결론을 내리든 그것이 어찌 진실을 말함이겠는가. 불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분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그런 바람 잡는 헛된 일을 중단하고 초자연계가 자연계와 똑같이 건재하다는 이 새로운 첨단 지식에 입각하여 인생을 재조명하시라.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할 일이다. 이 DPA pix의 증명 앞에서는 이와 맞먹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다.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로 인생을 자주성과 독립성 없는 피동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랑의 주체성, 주인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 자유 의지는 창조자께서도 간섭 못하신다. 때문에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면서도 그래서 우시면서까지 마음을 태우시면서도 자기 스스로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고 자아중심을 고집하는 인생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시므로 인간을 지으심을 "한탄하신"(창 6:6)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창조를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까지" 하셨다 했으니 일종의 하나님의 실책이시다. 그러나 이를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가 하나님을 원망하랴.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좌로든 우로든 갈 수 있는 완전 자유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물론 그 어떤 피조물도 손 못대는 영역이다. 이 위치에서 인간 각자 자기 선택대로 한 것이니 누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하나님도 실수를 하셨으니 인간 홀로 완전 무결하겠는가. 무슨 말이냐 하면 완전한 자유 선택의 기로에서 자아중심을 택했다는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자기 부인으로 계속 나갔는데 왜 악령들은 자아중심을 택했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자는 당자 자신밖에 없다. 악령도 그렇고 거룩한 천사도 그렇다. 악인도 그렇고 의인도 그렇다.
이러한 결말을 눈 앞에 보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지, 만일 영물들처럼 그런 선례가 없었다면 이런 경고도 없었을 것이다. 영원 선택을 잘못한 실책으로는 한 가지 예가 더 있다. 그룹 중의 하나가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다. 다른 스랍이나 그룹은 멀쩡한데 왜 그만이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품었던가? 이런 모든 의문점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 일임하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는 자신의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너무나 정직한 나머지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한 이상, 우리는 여기에 할 말은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한탄하실 일도 마음에 근심하실 수도 없다는 선입견이 무색해는 순간이다. 문제는 사랑이다. 왜 사랑을 무시하는가. 악령도 악인도 이 '사랑' 하나에 생사가 걸려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뜻이다. 오직 이 사랑 하나로, 사랑이 있고 없음으로 생사가 가름된다는 의미다. 마땅히 사랑을 주제로 삼을 일이다. 사랑이 생명의 핵심인데ㅡ스스로 선택하여 취하고 버림이 오직 이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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