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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의 원리(the law of unity as duality)ㅡ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

Tayseek Kwon 2018. 8. 21. 09:14








항상 강조하지만, 한 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수천이면 수천, 수억이면 수억의 사람과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실 때 불의 혀가 갈라짐 같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심에서 보듯이 그래서 한 덩이의 불처럼 그들 전체 위에 임하시지 않았듯이 그리고 성령을 가리켜 성경이 "일곱 영"이라 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믿는 자(구원 받은 자) 개개인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그런즉 나를 종으로 삼으시는 나의 주인(소유주)께서는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심과 동시에) 이 땅에 우리 각 사람과 함께 계시는 것이니 막연히 그 존재를 감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아내/남편처럼 나의 어버이처럼 나의 친구처럼(그러나 이 모든 관계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개별적으로 일대일로 계시는 것이다. 고로 항상 이와 같이 계심을 의식하는 일상 생활이 각자의 구원 받은 증거가 된다. 


둘이 하나됨이니 곧 사랑의 관계다. 모든 사랑 관계에서 가장 1차적인 기본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를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기뻐한다면 바로 그 첫 순위에 오시는 분이 메시아 예수님이신 것이다. 등급이 있다면 1, 2, 3 순위까지도 모두 싹 쓸어 차지하시는 그런 밀접한 관계이시다.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도 겨우 제 4위 이하로 밀려나 있다고 해야. 


왜냐면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주인님, 나의 소유주님)은 1년 365일 24시간을 나만 보시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시는 생각만을 하시고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유일한 목적으로 삼으시고 위치해 계시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일대일 관계가 이런 것이다. 이는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바로 그런 모습, 아니 그 이상의 모습이시다. 엄마가 눈길을 주지 못하면 갓난 아기는 어떤 상태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된다. 엄마가 전적으로 아기를 보살피는 이유다. 


이것은 주님(나의 주인님, 소유주) 친히 나 위하여 자기를 바치심(주심)으로 확증된 사실이요 이렇게 한번 행하신 것은 항구불변이기 때문이다. 나의 새 창조 차원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므로 한번 창조는 영원히 불변이다. 그래서 친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영원히 나의 것이 되어 계신다. 그 대신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맞바꾸어 자신을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은 나를 위해 사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눅 22:27)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알고 당연히 나도 그와 같이 나 자신을 전체로 다 바쳐 사랑하여 그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회개요 구원 얻는 믿음이요 인하여 세례 받아 죄 용서 받고 주님을 성령으로 영원히 모시게 됨으로써 구원은 오늘 믿는 즉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 대 인격 간의 사랑이므로 "한 번 창조는 영원 불변"이라 했지만 그런 사랑으로 피차간 너는 나를 위해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짜임새 내에서 영원 불변이지 어느 쪽이든 일방적으로 이 관계를 무너뜨릴 때 더 이상 이 좋은 관계는 유지될 수 없음이 현실이다. 그래서 악령이든 아담이든 범죄함으로써 오늘의 비극적 결과가 나온 것이다. 


회개의 세례는 믿는 즉시 받는 것이 원칙이나 고넬료의 경우에서처럼 믿어 성령 받음이 먼저이고 세례는 나중에 받아도 하자는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례를 받는 순간에야 비로소 구원되어 성령 받음이 되고 그 전에는 믿기는 믿어도 아직 구원 받는 상태가 아니라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세례는 비록 나중에 받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할 때 이미 성령께서는 임하시고 나의 구원은 그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는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처럼 믿노라고 한다 해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처럼 또는 빌립보 간수처럼 즉석에서 세례 베푸는 일은 드물고 믿기로 결심한 후 일정 기간을 거쳐야 세례를 주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선례가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이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예외가 얼마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예외라고 했으니까, 정상적으로는 세례  받음으로 성령 받아 모심 즉 메시아 예수님을 영접해 모심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성령으로 영접해 모심으로써 예수님이 나 위해 이룩하신 모든 것이 구체화/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3위1체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 다시 말해 "성령"께 대하여 성경대로 올바르게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성령 받아 구원 받았으니 세례 받는 것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니니 생략은 왜 한단 말인가. 주님 친히 세례를 일부러 받으심으로써 나와의 하나되심을 이미 선포하신 터에 내가 세례 받음을 생략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과 하나되는 귀하디 귀한 예식이기에 얼마든지 세례에 임할 용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나의 믿음을 표백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믿게 될 경우 한 사람 한 사람 그 믿는 즉시 세례 주기가 어렵고 여럿을 한번에 주는 것이 합당할 때에는 얼마든지 그 적당한 때를 맞추어 합동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메시아 예수님을 성령으로서 모심은, 아담이 육체 홀로 있다가 영혼을 받아들임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요, 새 창조에서는 나 자신이 그 '홀로 있는 육체'로서(예수님과 함께 죽어 죄의 응보를 충분히 치른 터라 아담 당시와 같은 깨끗한 육체가 되어 있어) 예수님을 성령으로 영접해 모심으로써 내 속에 새로운 내 영혼이 조성됨과 같은(아담처럼) 것이요, 몸의 한 지체로서 머리가 갖추어지는 의미이므로 아주 개인적인 관계로서, 이 관계를 시작으로 여럿이 한 머리를 모신 한 몸 체제(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머리께서 메시아 예수님이심과 동시에 각 지체로서의 각 개인에게 또한 명백히 머리로서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 여럿으로 구성된 몸의 한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는 맞지 않으니, 당당히 주님과 나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구성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세포처럼 작용하여 합성이 됨으로써 "교회의 머리"로서 위치하심이다. 고로 개인적임과 동시에 전체적인 의미를 항상 동시에 양면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께서 하나로 계시는데, 아들께서는 사람으로 오시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모든 하신 말씀과 일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잘 알고 있는가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셨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고 또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라 하였으므로(고후 4:4) 바로 이것이 "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하신 두 분이 하나로 계심이다. 이와 같은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아들께서 나타내신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심을 우리는 충분히 알게 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인데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사심, to dwell)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6-18) 하신 대로, 우리가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는 그대로 아버지를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자연계 육체에 속한 우리 인간처럼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이 별도의 모습과 성질을 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이 곧 아들의 모습이시요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므로 둘이 하나로 계시지만 우리 피조물처럼 따로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모습으로 계심이기에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아버지시라고 해도 되고 아들이시라 해도 하자는 없게 된다. 다만 그렇게 둘이 하나로 존재하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만 알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계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어 영광의 육체로 나타나실 때 이 경우 "아버지"시라고 할 수는 없다. 명백히 '사람'이신 '아들'이시니까. 그러나 둘이 하나로 계심을 알진대 그렇게 아들이신 줄 알고 "주님"이라 불러도 그 모습은 아버지와 함께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심을 알면 되는 것이다. 또 육체로 계신다고 해서 아버지와는 분리해서 계심은 아니니 이미 세상에 계실 때도 그 육체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께서 지금 너희와 함께 계신다"(요 14:17)고 명백히 하셨기 때문이다. 


아들께서 육체로 계셔도 성령으로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것이며 현재와 같이 성령으로 "우리 속에"(:17) 계셔도 아버지와 하나로서 계심에는 변함이 없으시다.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로 계신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자기 속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처럼 하지 않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만유에 충만해 계심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자기더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시지 않았으니 아들은 어디까지 아들이시지 아버지가 아니신 것이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duality as unity 또는 unity as duality)의 오묘함이다. 


혹 우리가 너무나 제약적인 이 자연계 육체에 속해 있어 이를 이해하는 데에 약간 혼동을 느낀다 할지라도 우리가 초자연계의 몸을 입고 있을 때는 그런  모든 불편함은 해소된다. 우리의 이 몸이란 것은 초자연계로 있을 때와 자연계에 속해 있을 때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성령 곧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로서 계심)을 모시고 있으므로, 단지 보이지 않으신다는 그 차이뿐이지 세상에 계시던 메시아 예수님께서 당시 육체로 계시던 것과 똑같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신다고 알면 틀림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