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불교도와의 허심탄회 토론장

성경 진리만 빼고는 오늘날 기독교인이 불교인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Tayseek Kwon 2019. 4. 30. 18:58






윤호진 박사의 『무아윤회문제의 연구』

무아와 윤회사상 양립할 수 있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09



부파불교시대 이후

논사들의 고민거리


우리나라 최초로

독자적 시각 접근


인간은 죽으면 육체와 함께 영혼(자아)도 영원히 없어져 버리고 마는가? 아니면 영혼은 남아서 업에 의하여 끊임없이 육도의 세계를 윤회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서가 윤호진 스님의 『무아 윤회문제의 연구』이다.


불교를 비롯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대부분 육신은 죽어도 인간은 선악의 업 등에 의하여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한다. 다만 차이점은 인도철학에서는 유아윤회(有我輪廻), 즉 윤회의 주체 또는 실체로서 아트만(영혼, 자아)을 상정하고 있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無我), 선악의 업에 의하여, 또는 아뢰야식에 의하여 윤회한다고 말하고 있다(무아윤회). 


불교의 무아이론과 윤회설, 그리고 인도철학의 아트만과 윤회설은 한마디로 불교와 인도철학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테마이다. 


그러나 윤회를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윤회의 주체로서 영속하는 실체(아트만, 영혼)는 없다고 하는 불교의 무아사상과 윤회이론은 양립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점을 갖고 있다. 영원불멸하는 그 어떤 존재(자아, 영혼, 실체)도 없다면 윤회설은 사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역설적으로 없으니까 윤회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면 현세에 지은 선악의 과보(업)는 누가 받는가? 주체가 없다면 a의 죄가 b나 c에게로 전이(轉移)될 수도 있다. 무아를 주장한다면 당연히 윤회 같은 것은 성립될 수 없고 윤회를 주장한다면 무아사상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초기불교 이후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면서 각파의 논사(論師)들은 모순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단히 탐구했다. 그리하여 ‘아트만이나 영혼 같은 존재는 없지만(무아) 지은 업에 의하여 윤회한다’, 또는 ‘우리의 모든 행위(업)를 저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의하여 윤회한다’ 등 다양한 이론을 전개했지만 아직까지 학문적 종교적으로 속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아에 대한 개념을 보다 분명히 정립해 볼 필요가 있겠다. 즉 불교가 말하고 있는 무아사상을 인도철학의 아트만(자아)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집착하지 말라’는 뜻 즉 무집착을 강조하기 위한 말로 볼 것인가? 


전자의 의미로 파악할 경우 무아사상과 윤회이론은 상충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실체도 없는데 단순히 업이나 아뢰야식에 의하여 윤회한다는 것은 논리상 성립될 수 없다(아뢰야식을 어떤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집착하지 말라.’ ‘애착하지 말라’는 개념으로서 무아를 이해한다면 어떨까? 이 경우 무아사상과 윤회설은 양자가 아무런 모순점을 드러내지 않고 충실하게 각각 별도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뿌쌩, 왈폴라 라훌라 등 쟁쟁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했으며, 또한 저자 자신이 프랑스에서 오래 동안 탐구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무아 윤회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나선비구경을 근거로 부파불교시대 독자부에서 제시한 ‘푸드갈라 이론(人我)’, ‘식(識)이론(아뢰야식 연기설)’, 상속이론(업의 상속에 의하여 윤회) 등을 제시했다. 


윤호진 스님은 1941년 경북 울산에서 태어나 1962년 입산, 동국대 불교학과(1969)와 동대학원(1971)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로 유학, 1981년 소로본느대학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2002년 정년 퇴임했다. 


신국판, 300쪽, 1992년, 민족사 간.

윤창화 〈민족사 대표〉

changhwa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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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3운법칙(3가지 유형의 규칙성으로 

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법칙)이

이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이 3운법칙은 짝의 원리(또는 대칭성 원리) 다시 말해

3위1체의 법칙(현대물리학으로 말하면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그 대표적 접근)의

자법/子法 중 하나로서 그 모법/母法(3위1체의 법칙)의 구조식(도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아주 흥미진진한 모습을 취하고 있어

압도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우주 간의 모든 법칙이 짝의 원리의 子法 아닌 것이 없다)


3위1체의 법칙의 대체적 윤곽은 동양 일원의 음양론에 의해

이미 세상에 밝혀져 익숙해져 있는 터이다.  

음양론과의 차이는 음양론은 짝을 이룬 양자 관계를 석명/釋明하지 못했음에 반해

그 양자/兩者 관계가 모자/母子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뿐인데

이 점이 아주 중요하고 핵심인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성경이 밝히고 있다.

이 3운법칙은 바로 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 짝을 이룬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파생시켰기 때문에 성립됨이다.

그래서 "둘이 하나되어" 존재함으로써 그 특이성을 이룬다.

양말 한 켤레, 신발 한 켤레ㅡ이런 것이 그 좋은 설명이 된다.


930세(아담의 나이는 자연계로 영구 추방된 해로부터 계산)로 

죽은 아담 이후 250년만에 태어난 노아(거의 5천년 전 인물)의

950년 생애도 정확히 이 3운법칙에 지배되었음이 밝혀졌으니

가인이 아벨을 죽인 그 무렵부터 이 3운법칙이 정해졌음이 명백하다.

인간 상호간 더 이상 이런 살해 행위가 없도록 규제하신 조처이니까.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죽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산아 또는 영아 사망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우리로서는 따질 바가 아니다. 


아래의 그 유명한 효봉 선사의 3운법칙에 의한 생애 도표도

그 모든 인간 생애 도표(3운법칙에 의한) 중 하나다. 

인간 생애가 이렇듯이 인간 자신이 절대자에 의해

처리되고 운영되는 것일진대 

이부터 먼저 정리하고 무아설, 윤회설을 논해야 제격이 아니겠는가.

이 3운법칙은 초등학교 산술 수준이면 누구나 

직접 계산해보면 검증 가능해지는 유일한 것이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만인 상대의 문호 개방이다.

이런 만인 구원(구제)과 같은 것은

특정 지식인이나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일 수 없는 것이다. 









성경 진리만 빼고는 오늘날 기독교인이 불교인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힌두교를 뿌리로 하여 불교가 생겨났다.

힌두교의 윤회 사상이 불교의 싯달다(불교인은 석가라 하지만)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만 보아도 이는 확인된다. 그러나 싯달다는 

힌두교의 다신 사상에 반발했다. 무조건적인 종속에 반기를 든 것.

그야 당연하니, 힌두교보다 진일보한 사상이었다.


사탄 즉 원수(아담 및 모든 인류에게) 악령이 아담을 살해한 후

그 자리를 빼앗아 왕노릇하여 철저히 독재를 해서 그렇지

사실은 아담(인간)이 이들 영물/靈物들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라

장차에는 이 아담은 인류를 위시해 모든 악령들을 심판해서

형벌(영원한)에 처하게 되어 있는 머리(수장/首長)였던 것이다.

싯달다는 본성으로 인간의 이 자주 독립성을 주장했으니

옳고 똑똑한 당시의 젊은이였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모든 잡다한 신들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선언했으나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악령 사탄의 수중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는 줄을 싯달다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애석하게도 그 수중에서만 놀아나는 꼴밖에 안되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싯달가가 네피림이 아니라 아담의 혈육을 타고났다면

저승에 가서라도 복음을 듣고(벧전 3:19) 믿음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아담의 혈육을 타고났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자기 결단에 달렸지만.


싯달다가 잡신들의 행패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

창조신 하나님까지 부정하게 될 줄이야 그 자신도 몰랐으리라.

발뿌리에 걸리는 돌을 걷어찬다는 것이 자기 신발까지 날려

무신론의 늪에다가 빠뜨려버린 것이다.

싯달다는 가고 없으나 오늘날 그 추종자들이 문제다.

싯달다가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그런 자주적 인간 정신으로는

메시야 예수님을 영접해 들였을 것이라 보지만

구세주이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시대에 살면서도

이런 실상을 알지 못하는 여타 불교인들은 

여전히 무신론에 물들어 갈 바를 못찾아 헤매는 참상 안타깝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는 그렇다고 기독교를 편드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도 불교 못지 않게 이 세상 신 악마에게 휘둘려온 것이

절대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의 행티다. 

차이는 전자는 성경을 믿지 않고, 후자는 믿는다면서도 벌이는 작태다.

누가 더 어리석은지는 여기서는 논외다. 논할 가치가 없기 때문.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성경에 순종하는 일이다.

기독교인도 거의 전부가 실질적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순종하여 따르지를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부터가

화급하고 제일차적으로 할 일이다. 

불교인들도 창조주를 부정하는 오만한 자세를 버리지 않는 한

미래에 아무 희망도 없다. 성경에 순종치 않는 기독교인과 함께

영원한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무신론의 기반 위에 세워진 불교는 

창조신이 만물을 지배하시고 있다는 그 확실한 증거만 있으면

하루 아침에 붕괴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고 쉽다.

이미 이 세상신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터라

("마지막 아담"께 속해 있지 않는 한 누구든지 그렇다)

악마가 틀어쥐고 있는 한에는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못쫓아내는 이유를 여쭙자

기도(다른 사본에,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신 것을 보아도ㅡ.


기독교인들도 애초에는(초대교회 당시) 오늘날 같이 타락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해이 상태에 들어가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오늘날 하나님 앞 수준으로 따지면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