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교회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신약의 예수님

Tayseek Kwon 2019. 4. 22. 06:33





진노와 저주 가운데에서의 은혜, 자비, 긍휼





윤호진 박사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

에 대한 필자의 답변입니다 

에서 발췌

https://blog.naver.com/trinia/221516402407







모두에서도 밝혔지만 창조자 하나님 성품의 양면성을 이해함이 여기서 필수다. 한국 개신교 대교단 중 하나인 모교파 중진이었던 한 신학자도 과거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도저히 조화시켜 이해할 재간이 없노라고. 이 사람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으니 성경 관련해서는 더 무식무지하다. 왜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함과 동시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한 대목을 간과한 무지이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인자"와 "위엄"(롬 11:22)을 제대로 인식했던 교회였기에 교회 운영의 양대 지주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였다. 


오늘날 교회가 "배도"(살후 2:3)로 치달은 원인 중 하나가 후자만 강조하고 전자를 무단으로 생략한데 있다. 누구 명령으로 그렇게 하는가. 자아중심 곧 죄에게 스스로 굴복한 것이다. 당시 아담이 사탄(용)에게 스스로 굴종하여 따른 것처럼. 신학자라면 아무리 성경을 경시한다 해도 이런 사실은 기본으로 알아두었어야 할 일이다.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엄엄하시기 이를데 없으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신약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란 사실이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으로서 항상 "하나"(요 10:30)로 계시니까. 


이러한 성질이 전혀 별개 즉 정반대인 것끼리 하나로서의 짝을 이룬다는 특이 사항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른바 양자역학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이를 대변한다. 이 역시 이 블로그 카테고리 3위1체의 법칙 또는 양자역학 등에서 참고하실 수 있다. 전술했다시피 현재의 인간고는 아담 부부의 범죄에서 비롯되는 죽음과 썩음에서 유래되어 앓고 있는 중증의 후유증이다. 이러한 인생들에 대한 업보는 기본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뿐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진노와 저주도 형벌 차원이라기보다 인과응보 즉 업보다.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진노와 저주뿐일 수밖에 없음에도 창조자의 또다른 성품이 사랑이시기에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사랑이 부각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그 신학대학 모교수처럼 무식한 변론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그런 가혹한 무자비냐 하는 것인데, 잘못 짚은 것이다. 가혹할 수밖에 없는 현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마는 (비판자가 창조자의 어버이 위치를 강조했듯이)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올바로 짚어가야 하는 것이다. 말이야 비슷하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여기서도 역지사지가 통한다. 내가 만일 창조자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해보라. 반역질하는 것 그냥 귀찮다 하고 쓸어버려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면 된다는 충동에 휩싸일 수 있지만, 그러나 측은지심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경우 그 사랑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을 우리의 죽음과 함께 하시어 죽음에 내던지시는 일까지 감행하시기에 이른다. 이것은 "구세주 예수" 편에서 본격적으로 논하게 될 것이다.

 죄를 지은 죄인이 그 죄에 상당한 벌을 받으면서, "억울하다", "날 이렇게 처분하니 너무 무자비해요" 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형벌감밖에 안되는 죄인이요 수형/受刑 중의 위치인 것이다.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붙잡아 죽여 그 피를 로마 총독의 제물에 섞은 사실을 누가 예수님께 고하면서 억울하다, 로마인의 행패에 분노한다 식으로 생각하는데 대하여 오직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하신 것이다. 지금 비판자와 같은 관점이라면 비정하기 이를데 없는 말씀 같지만 그러나 사실상 진실 그대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모든 인간고가 아담의 범죄, 우리들 자신의 범죄의 결과물임을 자각함이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 첫 걸음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는 철도의 레일과 같은 필요불가결한 평행선인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약하심"과 "지혜롭지 못하심"을 가정/假定적으로나마 입에 올리고 있다(고전 1:25). 그만큼 진폭이 크다는 것이고 여유만만하다는 것이다. 비판자는 지금 성경이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늕 전제하에 자기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거짓말하는 자는 감히 이런 대목을 죽어도 끼워넣을 수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이 되셨다는 등의 표현(창 6:6). 비록 진실이라 할지라도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창조자 하나님의 약하심 또는 미련하심을 굳이 삽임해 넣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하시어(성경의 진실성) 이런 대목을 삽입해 넣도록 조처하셨다고도 보는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을 같은 차원에서 놓고 보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이 다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이기를 바라셨다는 것과 일부는 그럴지라도 대체적으로 자기 이성을 따라 불의, 불법은 행하지 않을 것으로 아셨는데 너무나 예상 밖으로 거의 전체가 부패해 갔을 때가 같을 수 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로봇처럼 모두 일률적으로 행동을 같이 하는 것과 사랑의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같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는 미리 아시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느 정도"라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대충 어리잡을 수도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사실상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기록한 당시 상황과 그 이전 사정의 차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오늘날(교회 초창기와는 달리)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무엇이냐 하면 아담은 처음 에덴 동산에 들어온 후로부터 범죄하기까지에는 현재의 인간과 같은 자연계 육체가 아니라 소위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었는데 "죽음"의 경고를 무시하고 "죽은"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자연계 육신의 썩음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고로 양쪽의 사정이 전혀 다른 것에 유의해야. 성경 기록은 범죄 이후의 형편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범죄 이후 "죽음"과 "죄"(자연계 육체의 본능적이고 자아중심적 사고방식)에 이른 일반적 상황이 너무나 심각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이시라 해도 무방하다. 역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대한 한계인데 그런 것은 우리가 알 것도 없고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우리 사정이 한가하지도 않다. 


고로 범죄 전 아담처럼 유유자적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것과 악한 영물들의 초능력으로 완전히 찌들어진 채 그 지배를 받으며 구차하게 삶을 영위해가는 인생들의 인식과 의식이 결코 같을 수가 없고 후자가 정상적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장차 나타나실 "마지막 아담"이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밝혀 가르쳐주시기까지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 법질서의 위중함을 본으로 보이신 것이 비판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나타나 "무자비"로 오해된 것이고 그대신 생명의 법질서를 따름이 행복한 결과를 거둔다는 뜻으로 은혜를 베푸심이 비판자의 눈에는 "편애"로 보여진 것뿐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인식이 초대교회와 그 이후가 현저히 다른 이유 역시 아담 범죄의 결과이다. 아담을 충동하여 범죄하게 만들어 죽게 한 장본인인 "뱀"이라는 영물/靈物이 아담 대신 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게 된 비극적 사실이니, 이 악마(사탄)가 인간 세계를 좌우지하고 있는 고로 올바른 성경 해석의 통로를 아주 협소하게 만드는 농간질을 해왔기 때문이다. 악령 단독으로 자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앞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의 반역적 행위와 결탁한 결말이니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다. 이런 악령들의 방해 공작은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인식 내지 의식하지 못하는 정도다. 일관되게 집요한 악령들의 활동상만 피부로 와 닿아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