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불교도와의 허심탄회 토론장

불교학계 거두 윤호진 박사의 논문ㅡ우리가 볼 때 불교의 심각한 모순점을 학자적 양심으로 지적

Tayseek Kwon 2019. 4. 17. 20:13





자아중심, 이기주의적 일체의 언행을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신 것이니 회개의 이러한 요점을 소위 "무아설"을 내새세우는 불교의 교리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므로 대중에게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것. 더 완벽한 것이 자기 부인이고 이는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 자기 부인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억지로 죽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미 장사지내졌음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어 그 사실을 근거로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죽는 것으로 착각함은 금물. 회개는 우선적으로 이기심의 죄악성을 절감하고 단절하고자 하는 결의를 촉구하는 것이므로 그 결심만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대칭 아담)의 피로 죄 용서 받고 성령으로 주님과 한 영 됨으로써 구원되는 것임. 고로 구원은 어떤 일정한 상태 즉 주님과 둘이 하나됨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삶 자체이므로 의로운 선한 순종의 생활 즉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빌 2:12)임을 명심해야. 

다시금 자아중심이 되어버리면(아담이나 악령들처럼) 영생은 무효가 되므로 결과론적으로 말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구원될 필요가 있었기에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아담의 경우라면(천사와 같은 영물들도 마찬가지) "생명을 지키는 것, 생명을 잃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 우리도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은 계시록에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하심에서도 드러나. 무슨 면류관인가, "생명의 면류관"(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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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무아’설은 불교의 중심 문제가 인생의 괴로움(苦)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괴로움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되며, 욕망과 집착은‘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괴로움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욕망으로서 그것은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므로 ‘나(我)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규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나’라는 것은‘고정 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몇 종류의 요소가 임시로 모여 이루어진 실체(實體)가 없는 존재, 즉 ‘무아적(無我的)인 결론에 이르렀다 보고, 이것을 확실히 이해할 때 더 이상 욕망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결론 내린 것인데 이는 또 하나의 핵심 교리인 윤회설과 상충하게 되는 것으로서 윤회는 나라는 실체를 부정하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까닭이니 그래서 이렇게 모순되고 자가당착인 것은 불교 교리 자체가 진리가 아님을 훌륭히 입증하는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모든 불행이 자아중심에서 나오는 것은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단지 그 해결 방법에서 엉뚱하게 나라는 실체를 부인함에서 찾고자 하므로 진리 아닌 허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불교의 석가가 젊은 나이에 진리 탐구의 극렬한 몸부림에서 얻은 무아/無我이니 자아중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임을 밝혔다는 점을 전도할 때 응용/원용하면 좋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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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그렇게도 상세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에덴낙원을 자연계 동산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보라.

그러니 아담이 초자연계적 존재로 영생하는 자라고  말하면

화들짝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모두 이 세상 신인 악마의 조화술이다. 초능력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연계 육체가 되어버린

모든 인생들의 상대적 비극의 참상들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죽은 자"의 실상이다. 

신중하라, 거듭 경고하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

경거망동하지 말 것이다. 미래 세계의 다가오는 현실은

가볍게 생각해 넘기기에는 너무나 위중하다.

필설로 형용 못하리만치 엄청나다.

이 세상은 그러한 미래 운명에 대비하기 위함

오직 그 의미뿐임을 심비/心碑에 아로새길 일이다.

다시 경고하거니와, 정신차려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라>.



타종교인이 기독교를 박살내려 하기 전에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천주교, 개신교라는 이름의 기독교를

박살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불교의 윤회설과 무아설만이 모순이 아니라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도 그 못지 않은 모순이다.

대칭 아담이신 사람 예수님 이상 가는 가까운 이가 없는데

마리아라는 엉뚱한 존재를 덧붙였으니

초대교회 당시 유대율법주의자들이 모세 율법도 시켜야 구원된다는

그런 군더더기와 똑같은 것이다. 

구약이,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죄인됨을 깨우침에 목적이 있었다면


빛이 어두움에 비침은 어두움으로 하여금 어두춤인 줄 자각하게 함

 어두움을 버리고 빛에 머물도록 함에 목적이 있거늘

그래서 죄인으로서 회개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당연히 그 하나님의 생명의 율법을 지켜야 당연 사리이거늘

빛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만 그치고, 만족하고

여전히 어두움 곧 죄인의 자리에 그대로 머묾이 정상인 줄 아니

해서 하나님 율법(계명) 지킴을 비상(arsenic poison)/인 양 여기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이것이 개신교의 자가당착이 아닌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그러므로 불교인이여, 개신교인이여, 천주교인이여

자기 종교의 구제불능의 모순됨에서 탈피하여 성경으로 돌아오라.

아담으로 인한 범죄의 인간고인즉 대칭 아담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방법 외에는 기사회생의 길이 언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로써 하나같이 입증되는 것은 

이 세상 신 악마의 실존이다. 그에게 꺼둘려 빚어지는 현상이다.

당치도 않은 모순 덩어리지만 사실처럼 진실, 진리처럼

믿게 만드는 그의 수완이라기보다 인간의 상대적 나약성이다.

하나님이 이런 나약한 조재로 인간을 처음부터 만드실 리 없다.

범죄로 자연계 육체가 됨으로써 야기된 비극적 참상이다.

악마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면 천하 없어도 맥없이 무너진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현실을 실감하여

대오각성하고 우리의 머리(어버이)되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지체 없이 달려 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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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 한국의 윤호진 박사에 의해 자폭, 자멸해버린 불교의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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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당착, 자기 모순의 늪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되어 있는 불교 철학ㅡ윤회설과 무아설. 교리상 상호간 마찰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리일 수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진리는 일관성이 그 생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 만일 이랬다 저랬다 하면 만물이 한 시인들 존속하겠는가. 


수천년래 내려오는 거대 종교를 그렇게 한 마디로 폄훼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 말로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 신으로서의 악마가 이 인간 세계를 지배해 온 역사가 불교의 역사보다 더 장구하지 않은가. 


그런 악마가 존재하는 것을 무엇으로 입증하는가. 결국 이렇게 되면 SBP pix가 동원되지 않을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 존재인 생물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SBP pix이니까. 이 촬영물, 영상물 일군/一群 하나가 거의 모든 인식과 개념을 송두리째 뒤바꿔놓기에 충분한 것이다.  불가시적인 초자연계를 입증하는 것이니까. 여러분에게 "상식"선상에서의 논평을 부탁 드렸는데  부탁 드린 필자 자신이 먼저 발표해버린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위의 "자가당착", "자기 모순"이라는 지적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상식선을 넘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거짓은 대개 상식선에서 붕괴되어 

정체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필자도 3운법칙, 3위1체의 법칙, SBP pix를 덮고

(SBP는 Supernatural Beings Proved의 약자

또는 DPA pixㅡDevils' Practical Appearances pix)

오직 상식선에서 윤교수의 관점을 짚어보려는데

독자 여러분도 상식적 관점에서 비판해보시고

생각 있으시면 댓글로 달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불교도가 한국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불교인들에게 어떻게 접근을 하는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는지 같이 연구해보는 위치에서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아래에 참고로 윤승려의 사진,소개 글이 있습니다.

이런 학구적인 사람이면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 모든 불교계 전체를 대변한 것이라 하겠고

따라서 그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글로써 그 견해를 세상에다

과감하게 발표할 정도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관계자 측에서 아래 주소의 글을 삭제할 수도.

고로 독자 여러분이 직접 클릭하여 확인해두시면 좋을 것.

왜냐면 그 쪽에서는 삭제해서 없애더라도 여기 이 <퍼 온> 글은

영구히 남아 이 세상이 없어지기 전엔 "증인"으로 남을 것이기에.

귀중한 자료이기에 길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lpul1010&logNo=220418696798&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D%2598%25B8%25EC%25A7%2584%25EC%258A%25A4%25EB%258B%2598%26where%3Dm%26sm%3Dmtp_hty.top

https://blog.naver.com/decorazon/221470431096








호진스님은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사진은 몇 해 전 어렵게 촬영한 것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호진스님은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사진은 몇 해 전 어렵게 촬영한 것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6월의 마지막 날 경주 기림사 동암에서 호진스님을 만났다. 가뭄을 해갈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섯 시간 가량 이어진 만남은 호진스님의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출간을 계기로 어 렵게 이루어졌다. 1981년 파리 제3대학(소르본)에서 받은 호진스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1992년 선보인 책을 다시 보완해 펴낸 책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스님이 천착(穿鑿)해온 무아와 윤회를 심도 있게 다룬 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책이 출판된 지 20년이 넘었다. 다시 손질 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를 다시 발 간한 소감을 담담하게 밝힌 스님은 “1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연구하고 보완했다”면서 “이 책이 ‘30대 학생이 쓴 논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고, 여러 부분에서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지난 2000년 동국대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호진스님은 경주 기림사 동암에서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바깥출입은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오직 책을 벗 삼아 지낼 뿐이다. “ 별다른 뜻이 있어 외출을 자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 보고 글 쓰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호진스님은 흔한 휴대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원고를 쓰는데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고치고 또 고치며 완 성도를 높인다. 학문에 대한 완벽성과 함께 잘못 기술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에 따른 것이다. 당신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스님 뜻에 따라 이날 인터뷰도 <무아·윤 회 문제의 연구>(불광출판사)에 집중됐다. 


“무아를 내세우면 윤회설은 성립 근거를 잃어버리고 윤회설이 무너지면 불교는 존재 이유가 없어져 반대로 무아설을 포기하면 더 이상 불교일 수 없지만 불교는 이 상반된 두 가지 설을 양립시켜야 한다”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까지 이어져 온 이같은 ‘난제’…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개정판에서 나선비구경 비롯해 베다 브라흐마 우빠니샤드 아함경 등을 통해 ‘양립문제’까지 심도 있게 살펴 ‘주목’ - 무아와 윤회의 양립은 불교학계의 오랜 논쟁이었나?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는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붓다의 생존 당시에 제기됐다. 붓다의 열반 후에도 수백 년 동안 이 문제로 여러 가지 설(說)이 나왔고, 이것은 부파불교(部派佛 敎)의 발생 이유가 되기도 했다. 


현대불교학이 시작된 유럽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초기에 ‘가장 열띤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대승불교권에서는 윤회와 무아의 문제가 화두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토론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호진스님이 20여 년 전 책을 출간한 후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호진스님의 책이 2010년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9선>에 선정된 것도 무아ㆍ윤회의 양립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까닭이다. - ‘무아’는 무엇인가? “불교의 중심 문제는 인생의 괴로움(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인간의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되며, 욕망과 집착은‘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난다. 


괴로움의 가장 직접적 인 원인은 욕망이다. 그것은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불교는 ‘나(我)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규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은‘고정 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몇 종류의 요소가 임시로 모여 이루어진 실체(實體)가 없는 존재, 즉 ‘무아적(無我的)인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이해할 때 더 이상 욕망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윤회는? “불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는 윤회설이다. 이 사상은 불교 이전에 성립됐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설을 처음부터 불교 고유의 사상으로 생각했다. 불교는 윤회사상을 전제로 출발 했다. 불교의 거의 모든 교리는 윤회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 왜냐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무아와 윤회가 양립(兩立)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진스님의 이야기다. “무아를 내세우면 윤회설은 성립 근거를 잃어버린다. 윤회설이 무너지면 불교는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반대로 무아설을 포기하면 불교는 더 이상 불교일 수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불교는 이 상반된 두 가지 설(說)을 양립시켜야 한다.” 호진스님은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는 두 개의 기둥”이라면서 “무아설을 포기할 때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고, 역시 윤회설을 제거해 버릴 때 불교라는 구조물은 붕괴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고민은 초기불교부터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난제였으며, 다양한 해결책이 모색됐다. 초기경전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뿟갈라설, 식설, 상속설 등 3가지였다. 이를 내용으로 경전 이 만들어졌고, 부파불교에서 확대 발전되어 나름대로 다양한 설이 만들어지고, 추종자들이 부파(部派)를 만들었다. 호진스님은 이 책에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을 비롯해 <베다> <브라흐마> <우빠니샤드> <아함경> 등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의 내용을 짚어보고, 양립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폈 다. - 1981년 박사학위 논문, 1992년 책과 비교해 이번 개정판에서 달라진 부분은? “<우빠니샤드>의 윤회와 해탈, 그리고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열반(涅槃)에 관한 것이다. 


<우빠니샤드>에 나타난 윤회와 범아일여(梵我一如) 문제를 전보다 깊이 탐구했다. 초기불교 부분의 핵심에서는 전과 동일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살폈다.” 호진스님은 은사 법인스님 권유로 대학에 진학했다. 종비생(2기)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로제 르베리에(Roger Leverrier, 한국명 여동찬) 교수의 소개로 프랑스 유 학길에 올랐다. 1972년이다. 일반인들의 해외유학도 드물던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삐엘끼비르 가톨릭수도원에서 수도사들과 생활하며 프랑스어를 익힌 후 1974년 파리로 옮긴 뒤에 1976년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소르본 대학에 진학했다. 


유학 10년, 고학(苦學) 끝에 무아와 윤회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심사 당시 “이 분야의 연구 중 가장 깊이 있는 논문”이라는 찬사와 함께 최고 점수인 ‘트레 비엥’을 받았다. 지안스님(조계종 고시위원장)은 “30여 년 전 박사학위 논문과 20여 년 전 책을 깊은 연구와 고찰을 거쳐 보완해 선보인 개정판은 호진스님의 투철한 정신과 성실함으로 가능했다”면서 “무아설과 윤회설이 상충되는 소지가 있는데, 호진스님이 이를 잘 분석했다”고 독자들의 일독(一讀)을 권했다. 사실 불교에 있어 무아와 윤회의 관계는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활발한 연구와 토론, 논쟁이 생산적으로 이뤄져야 할 ‘난제’ 임에 틀림없다. 


호진스님이 무 아설과 윤회설의 양립 문제에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호진스님은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가 ‘문제 제기’를 하는 데 어떤 역 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다. 문은 어제 22일 작성한 것이고 오늘 이와 같이 토를 달아두는 것입니다ㅡ2019년 2월 23일




전 동국대학교 윤호진 교수는

1964년 직지사에서 출가. 동국대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초기불교를 전공했다. 종교학 박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2000년까지 초기·부파불교를 강의했다. <인도불적답사기>  <성지에서 쓴 편지>(공저) <인도불교사> <아쇼까왕 비문>(공역) 등의 저서와 <불교의 노동문제> <윤회이론의 기원> <불멸연대고(佛滅年代考)> <나선비구경 연구>(1), <초기불전성립연구>(1, 2), <아쇼까왕과 불교> <불교의 죽음 이해> 등의 논문이 있다.

[불교신문3118호/2015년7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