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ㅡ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26)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 버려두었는가? ------------------------------------------------------------------------------------------
역사적 현실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런 우리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일이므로 강제로 할 수 없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그래서 "믿는"[사랑하여 순종하는] 자에게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마련하신 것"[고전 2:9/약 2:5/1:12]이라 하였고 자기를 순종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 함이다[행 5:32/히 5:8]. 따라서 강제로 자동적으로 나를 사들이시는 일은 없다.
반드시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내 스스로 주님 곧 내가 절대로 복종할 영원하신 나의 주인님, 나를 소유하신 소유주로 받들어 모시겠다는 약속 아래 되어지는 일로서 나 자신을 내 스스로 기꺼이 바침으로써 되는 '나를 소유하심'이다. 그래서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는 것이다[행 2:38]. 이 사실이 중요하다[롬 14:7-9]. 그래서 믿고 영생을 얻으라는 말 앞서,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바울은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행 17:30].
나를 섬기시는 자리에 영원히 위치해 계심은 엄마가 아기에게 전적으로 종 노릇하는 격이다. 아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엄마가 전적으로 움직이는 터라 일방적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으니 이 경우 아기가 엄마를 위하는 것이 명백한데 아기의 이 위함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하고 복종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아기는 엄마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이 아니라 아기 역시 엄마를 위하는 것이다.
아기가 이와 같이 엄마를 절대 신뢰하고 그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그와 같이 함이 우리의 순종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하신 것이다. 왜 우리가 구원 얻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모든 인류에게 자동적으로 모두에게 구원이 적용되지 않는지 그 이유가 이로써 밝혀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동시성'이 그 특징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구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약속으로서의 나의" 회개가 동시에 확고히 드러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구원도 지속되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 구원 역시 지속되지 못할 위기에 직면[마치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에 위치한 것처럼]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는 네가 나를 좋아하면 나도 너를 좋아하고 네가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는 그런 이기주의와는 온전히 차원부터 다르다. 이기주의가 아닌 그 반대의 "자기 부인"에 기초한 '둘이 하나됨'의 구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해야 나도 시인할 것"[딤후 2:12/마 10:32,33/눅 12:8,9]이라 하신 경고도 이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한 몸됨의 생명과 사랑의 엄정한 법칙을 따라 말씀하심이다.
얼마나 장중(壯重)한 '아름다운 사랑'의 현실이고 사랑의 언어(言語)인가! 이런 사랑일진대 우리가 이를 위하여 백 번 죽는대도 우리 목숨 아깝다 하지 않으리. 오히려 무한 영광으로 여길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창조, 다시 출생함이 바로 이와 같이 아름다움 일색, 경이로움 그 자체다.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니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막연히 생각하기 쉬우나, 성경을 제대로 읽고 나서 결론을 내릴 일이다.
우리의 폐단은 성경을 읽는 대신 소위 성경을 해석해놓았다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에 더 의존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화근이 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막 7:6,7]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를 다시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 모두가 죽은 사실이 됨을 밝힌다[고후 5:14].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원래 ‘죽은 자’로서의 인간의 의미와도 통하는 말이지만,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에서도 이는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내가 현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어 구원 받은 자가 되어 있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있음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열차 선로의 두 가닥 레일과 같은 것이 나의 '함께 죽음'과 '함께 살아남'이니 그렇지 않고는 '구원이라는 열차' 운행 자체가 불가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논할 때는 반드시 이 죽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장사 지내진 것을 전제한 바탕 위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우리 구원이다.
그래서 세례[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짐을 나타내는-롬 6:3,4/골 2:12]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 받고 성령의 선물[함께 다시 살아남을 통한 새 생명]을 받게 되는 순서다[행 2:38].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자각이 없는 한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죽은 자가 무슨 죄를 짓는가.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인가. 고로 어찌 육신대로 살겠는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고후 5:15] 살겠는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죄 가운데 더 살아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다"[롬 6:2] 함과 같다. 즉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롬 6:4] 자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함 역시 같은 뜻이다.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다가 영생까지 덤으로 얻자는 생각이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믿어보아야 헛 믿는 것이다. 절대로 자기의 구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4,65]고 이미 그리스도 친히 천명하신 바다.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하셨다 해서 아주 간단하게 '믿는 것'을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많은 제자가 아주 물러가 버리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다[:66]. 누구든지 믿으라 해놓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고 할 것인가. 방금 설명한 대로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의 뜻을 잘못 헤아린 결과다. 그래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라는 것이요 부지런히 "찾고 두드리고 구하라"[눅 11:9,10]는 것이다.
이는 약속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이 부지런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진리의 문이 열려질 까닭이 없다는 경고를 동시에 함유하는 것이다. 이 약속 말씀을 특별히 되풀이해서 강조하시고 있다. 성경은 한 구절에만 집착하고 매달려서는 안되는 법이다. 반드시 통독(通讀)하여 여러 대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내리는 결론이 되도록 성경 자체가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부지런히 찾는 자가 아니면 절대로 진리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좋다.
자기 식미(食味, 口味)에 맞는다고 한 구절에만 매달리니까 이단과 사이비(似而非)가 되고 억지 해석이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된다[벧후 3:16]. "누구든지 믿으라" 하는 것과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즉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이유 또는 장애물을 극복한 자라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는 그 의미이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모순도 딜레마도 없다.
그 '장애'가 어떤 것인가. 세상과 인간 곧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막 10:15] 하셨고 하나님에게서 가르치심을 받고 배운 자가 그리스도께 올 수 있다 하셨고[요 6:45] 어린 아이에게 진리를 나타내신다 하셨으므로[마 11:25], 열쇠는 '어린 아이 같이 됨'에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고전 8:3]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 나아왔다는 증거가 된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만 하거나 특별히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따르고 그 말을 듣게 되어 있는[요 14:21,23] 것, 이것은 상식이다. 고로 순종하겠다는 결의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사랑한다는 것은 빈 말이고 믿는다는 말도 헛말이고 진실이 아니다.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시고 또한 나 위해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현실적으로 그 죽으심이 실제 나의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는 작업이 있어야 함이다. 그 작업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면 그렇게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대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오심은 그리스도께서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움직이심이다. 내용으로는 사람으로 오시나 오시는 방법으로서는 하나님으로서 오심이니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가능하시되 사람은 육체이므로 육체가 육체 안에 들어올 수는 없기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니 '사람 그리스도'만이 얼마든지 내 안에 마치 육체로 임하여 오시듯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 영생만을 욕심 내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죄를 짓지 않아야 구원이 되는고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설명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왜 자살하는가 하면 고통스러워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짧디 짧은 인생 수명이건만 그것도 지겨워 스스로 자기 목숨을 단절해 버리는 것이다. 고통에는 육체의 병이나 기타 사고에서 오는 것도 있고 사람 사이의 사랑이 없어 오는 고통도 있다. 영생을 하게 되면 신령한 몸이니까 물론 그런 육체적 고통은 없다. 그러면 사랑 없음에서 오는 고통은 어찌 할 것이냐. 바로 이것이 그 대답이고 그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든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든 죄와 악은 공동체 의식을 버리고 자기 중심에서 오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이웃을 몰라보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을 말함이요 이는 곧 사람 사는 방법, 사람 사는 마땅한 도리로서 통한다. 일관되게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이웃을 위하나, 자연적으로 결과론적으로는 자기가 위해지는 방법인 것이다.
내 이웃도 그와 같이 살 것이므로 이웃이 나를 위한다는 것은 내가 그들 곧 내 이웃을 위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임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라고 해도 서로를 믿지 못해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회개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결단하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즉 머리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한 몸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천국에서의 삶이요 교회는 그 예행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충성되지 못한 이는 자기 구원을 스스로 이루지 못함이 되어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적자생존"의 용어와 의미가 여기서만 제 빛을 드러내는 법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이 적자생존의 결과다. 사단을 비롯한 악령들은 "도태된" 경우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영원히 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시니까 성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내 안에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나만 아니라 각 사람 안에 나와 똑같이 계실 수 있고, 또 사람이시니까 사람으로서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 내용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이니,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나는 충분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아난 것으로 나 자신을 인식함이다.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까 나의 "함께 죽음"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내게 임하시는 것이 ‘육체’에 대한 ‘영혼’ 격으로 임하심이 되는 까닭이다. 즉 아담을 창조하실 때 먼저 육체[자연계에 속한]를 만드신 다음 하나님 친히 그 코에 숨[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조성하셨던 그 옛 모습을,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요 20:22]으로써 그대로 재연(再演)해 보이셨음이다. 즉 우리 개개인을 당시 창조하시던 아담[의 육체]처럼 보시고 그래서 영혼이 조성되기 전의 '육체'[자연계에 속했던 아담의 육체처럼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으므로]로 간주하셔서, 친히 그 '영혼'이 되어 임하시는 모습이심을 확고히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때문에 이를 "새 창조"라 한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분석할 때, 이상과 같이 우리 각자를 "새로 창조하시기"[고후 5:17] 위함 다시 말해 "다시 나도록[출생]"[요 3:3]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를 시작하시려면 옛 피조물로서의 사람["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은 죽어 없어져 일단 종결되어야 함이니,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 근거가 된다.
그리고 죽었으면 나의 새 육체를 만드셔야 하는 것이다. 이 ‘만드심’은 내 육체 안에 성령으로 친히 임하여 오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앞의 설명처럼 내 영혼 격으로 오심이므로 나의 육체를 새로 만드시고 그 육체 안에 영혼을 조성하시는 옛 아담 때의 절차와 순서가 내가 성령을 받아 모시는 순간 한꺼번에 이루어짐이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지금 살아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른 나', '제2의 나', '나의 영원하신 짝'이 되시는 것이다. '육체[나 자신]'와 '영혼[그리스도]'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계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되신다. 그래서 아내 남편으로서의 한 몸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이므로 그 무엇이든 그 누구든 그리스도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구원될 수 없으니[눅 14:26] 아내 남편 관계보다 더 우선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고전 7:1-40].
세례 받음으로써 나의 옛 피조물로서의 ‘죽음’과 ‘장사 지내짐’이 일시에 완료된 상태로 상징화되어 있다. 물론 실제 죽음은 성령으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써 되는 것이지만, 순서와 절차가 그렇게 지켜졌다는 의미가 중요하고 그래서 그와 같이 나타내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이 성령 받음이다. 둘이 하나로서 겹쳐지니,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의 살아나심이 나의 다시 살아나 있음 곧 다시 출생함 그리고 성령으로 출생함[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이루어진 변화이므로]으로 현실화, 구체화함이다[요 3:5,6].
이것이 나를 "다시 나게" 하시는 또는 "새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시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나와 하나 되시려고 나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그와 같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즉 내 모습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내 모습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엡 2:6] 또 장차 세상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임하실 것이니, 나 역시 그 때에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게 됨은 무척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골 3:3/롬 8:23].
그리하여 영혼은 몸을 위하고 몸은 영혼을 위하는 관계로서 서로가 불가분이 되어 하나로 존재함과 같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이와 똑같아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이미 이 위하심은 나를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영원히 확증된 것] 나는 그리스도를 위함으로써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으로 확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아담의 범죄와 나 자신의 범죄로 죽어 엄마 품을 떠났던 아기가 다시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 나의 ‘성령 받아 모심’이 된다.
설명하기는 간단하지만,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야 과연 그렇게 사람되시고 우리 위해 죽으실 때 어떤 심정이셨으랴. 보통 사랑이 아니시니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친히 피조물 인간이 되시는 것부터가 얼마나 비천해지시는 일인가. 그러나 이를 감행하셨으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하시겠는가.
둘째, 영원히 사람되시는 것부터도 그렇지만, 그렇게 사람되심으로써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최고도의 고통 혹은 많은 인간의 고통을 일시에 지셔야 하는 것인데다 창피스러움에서 오는 고통까지 겹쳐 가중되었으니 진실로 인간으로서 상상 못할 무한하신 자비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그 어떤 사랑보다[부모의 사랑도 다 포함해서] 뛰어넘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롬 5:8].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시는데, 사람되심은 아들이시고 또한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만유를 창조하신 것도 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어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것도 아들이시나 또한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아버지 친히 그 모든 창조의 일에서[‘처음 창조’에서나 인간 구원의 ‘새 창조’에서나] 당연히 그 ‘실체’로서 아들과 함께 하심이었으니,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통해서] 만유를 지으셨다 하는 것이요 또한 새 창조에서 우리 구원을 그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셨다 하는 것이다.
즉 아들께서 사람으로서 당하신 그 모든 고통에 빠짐없이 다 동참하시어 똑같이 함께 당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 됨’의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우리 각자가 당하는 모든 고통 역시 아버지께서나 아들께서 함께 당하시고 계심은 물론이다. 아이의 고통에 어버이가 함께 하는 그런 유(類)가 아닌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실질적으로 똑같은 분량으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에 현재 함께 하심이다.
또한 그 때문에라도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우리 각 사람의 지체(肢體)됨인 고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통에 우리도 함께 참예함이 마땅하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이다[롬 1:24]. 또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고난에 그리스도 친히 함께 하심이다. 이렇게 애초부터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심을 위하여[혹은,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바로 그 이치를 따라, 우리의 고난 받음이 또한 그리스도 친히 그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심이 되어 남은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나 자신이 곧 나의 생명이요 내 생명이 곧 나 자신인 줄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조물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대칭 관계에 있음을 알았으니. 기본형[하나님]과 대칭형[나 자신]은 하나로서 불가분이다. 그 확실한 증거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아니신가.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이신 사실과, 내가 또한 하나님께 생명되시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생명"이라는 것은 무슨 별난 새로운 표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랑과 생명이 모두 내게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그리하여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심으로 당신의 전부 곧 당신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심을 십자가 사랑으로써 이미 친히 증명하셨기에 그러하다.
그 자신을 내게 전부 남김없이 영원한 선물로서 주셨기 때문에, 사랑의 측면에서 내가 "그 생명"이 아니면 무엇인가. 다시 말해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몽땅 내게 와 있으니 내가 바로 그 생명이고 사랑이라는 데에 하자가 없다. 그래서 내가 나의 주님의 생명이 되고 사랑이 되고 전부가 됨은 진실 그대로의 사실을 말함이다. 이런 것이 사랑이고 그 속성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당신은 나의 생명이요 나의 전부"라 말하지 않는가. 주(主)님 그리스도와 나의 사랑이 이러하다.
그 어느 부모 자식 관계보다 더 하고 아내 남편 사이보다 더 하다. 완전히 '육체와 영혼' 관계의 불가분성이다.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가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함께 죽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유일한 자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갈 2:19]. 원래부터[만물 창조 당시부터] 그러했던 사실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으로 다시 이와 같은 사랑을 "확증해"[롬 5:8] 주신 것이다. 고로 나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나는 절대 복종함이니 그가 친히 "나의 생명"[골 3:4]이 되심을 이제야 내가 확인하게 된 결과다.
육체의 대칭성
"육의 몸" 즉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가 있고 "신령한 몸"[고전 15:44] 즉 장차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입게 될 새 육체가 있으니, 전자는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이나 후자는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42,43]이다. 이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히 못박아 멸한 다음의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다시 산[부활한] 그 "새 생명"[롬 6:4]으로 나는 지금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우뚝 서 있음이다.
그러면 왜 "죽었다"[골 3:3]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현재 ①"썩게 되어 있고, 욕되고 약한 육(肉)의 몸"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②"썩지 않게 되어 있어 영광스럽고 강한 신령한 영(靈)의 몸" 가운데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내가 현재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면 당연히 ②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②가 아닌 ①의 모습으로 먼저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친히 보내심을 받아[요 20:21/17:18] ①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지 ②의 모습일 수는 없다. 순서와 단계가 있으니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① 다음에 ②가 됨이고 이것이 옳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것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다. 즉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시대로서 사람되시기 이전의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렇듯이 시대가 완연하게 달라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도 ①의 모습과 ②의 모습으로 양면성을 띠게 된 것이다. 세상에 계실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①의 모습이셨다.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이후의 모습은 당연히 ②의 모습이시다. 이는 장차 나타나게 될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히 2:10/롬 8:29]의 본으로서의 의미가 되신다. 새로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 역시 같은 순서를 따라 밟아가게 되어 있으니 먼저 ①의 모습, 그 다음이 ②의 모습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17:18]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과거 아담 창조 당시 숨을 내쉬심으로써 영혼을 창조하시던 때의 형용을[창 2:7] 취하셨다. 즉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이다[요 20:22]. 고로 아들께서 나타내 보이신 본을 따라 우리도 ①의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현재 부과된 책무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들로서의 마땅한 과업이니 오직 충성할 뿐이다.
현재 이 세상은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작업장이요 사단 및 그 악령 일당과의 한바탕 격전을 치르는 전장(戰場)이기도 하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①은 전투복이나 작업복을 입은 모습이요 ②가 되어야 평상복 즉 삶의 향락을 누리는 모습이 된다. 때문에 바울도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고 한 것이니 앞의 설명과 같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①과 ②의 과정과 순서를 거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①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그와 같이 주님을 본받아 그 발자취를 따라 가면 결국 주님과 똑같이 ②의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①과 ②로 구분했지만,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①과 ②의 양면성으로 계셨다고 해야 옳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으니까 원칙적으로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가 그 정상적인 원래의 [인간의] 모습이었으므로 따라서 그런 원칙면에서 잠재적으로 ②의 모습으로 계심이었으나, 나와 같은 인간 다시 말해 나 자신의 모습이시기 위해 마땅히 ①의 모습을 먼저 취하신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과업을 수행하신 다음에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그 원래의 모습이신 ②로 환원되셨다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사람으로 처음 세상에 오실 때 ①과 ②의 모습을 동시에 나타내셔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②가 아닌 ①이어야 했으므로 ②는 감추어진 셈이다. 따라서 형평성을 위해 그 감추어진 ②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셔야 할 당위성을 따라 다시 세상에 오시게[再臨] 되어 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로 동일한 양면성을 취하고 있으니 즉 ①과 ②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①을 벗어나 ②에 계시면서 성령으로 내 안에 거처(居處)하시는 터이므로 현재 겉으로 드러나기는 ①이지만 ②도 동시에 함유함이니 내가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되어 있는 까닭이다[엡 2:6]. 그러므로 이런 자부심으로써, "내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기독교"["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를 포함해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의 차이가 이와 같이 엄청나고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종교는 오직 내세에서의 생명 곧 영생만이 목적이다. 불교는 스스로 부처가 됨으로써 그 꿈을 이룬다고 꿈꾸고 있다. 그래서 그 부처가 되는 방편으로서 독경이니 염불이니 하는 등의 종교 행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당장 내가 구원되어 하나님의 아들까지 된 신분이니 하나님 아들답게 이 세상에서 당당히 처신하라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개신교 역시, 말이야 이미 구원 얻었다고 하나, 교회 예배 출석 잘하고, '교회 일'['그리스도의 일'이 아닌]을 충성되게 하는 것 등의 종교 행위를 강조하는 데에서는 아무 나을 것도 없다. 죄 짓지 말고[요일 2:1/3:6-10/5:18/고전 15:34/벧전 4:1] 의를 행하고[요일 2:29] 선을 행하라[요삼 1:11]는 하나님의 명령[계명, 율법-고전 9:21]은 도외시한 채 그런 것만을 강조하니까, 오히려 그네들이 기피하고 사갈시(蛇蝎視)하는 '율법 행위 즉 종교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 스스로 되어 버린 것이다.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이미 구원 얻었다는 말은 양심상 못하고[왜냐면 구원 받은 적이 없으니까, 위와 같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지만] 그 대신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그런 꿈을 이루리라는 망상에 젖어 있다. 양심의 소리에 유의하기로는 개신교보다는 천주교가 낫고 천주교보다는 불교가 나으나,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의존하려는 것이고 불교는 그런 마리아 같은 것이 없이 순수하게 자기 노력으로 하자니까 양심대로 살고자 노력은 하는데도 양심대로 살지는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양심을 따라 행하는"[행 23:1]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소리는 한마디로 공동체 의식을 가르친다. '한 몸' 의식에서 사는 것이 선이요 옳고 바른 것임을 자명종처럼 울려대는 것이다. 불교의 주장처럼 공(空)도 주장하지 않고 무(無)도 역설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중심이 아닌 '우리' 의식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에서는 자기 부인이 핵심임을 계속 강조한 그대로다.
이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었으므로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 죽어 현재 무덤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기본 관계에서 시작해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나는 내 이웃을 위하고 내 이웃은 나를 위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것이므로, 그 어느 세상 종교도 이를 모방할 수 없다.
왜냐면 이런 관계는 지금까지의 설명대로 새 창조[고후 5:17/엡 2:10/갈 6:15], "다시 출생"[요 3:3], "성령으로 출생"[:5,6]함으로써만 정착될 수 있는 성질의 획기적 변화인 까닭이다. 개신교는 소위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미신에 빠져 양심의 소리마저 잠재우려 하고 스스로를 무기력화하는 데에 이력이 나 있으니 종교 중에서도 제일 하치이고 하류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가 꿈만 꾸는 판이지 실제 그 꿈이 이룰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뜻과는 천만리 밖에 있다는 데에서는 모두가 공통이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는 한결같이 이상 설명과 같은 ①과 ②에서 ①은 무시하고 ②만 꿈꾸고 있는 까닭이다. ①을 반드시 거쳐야만 ②의 꿈이 이루어지는데 ①은 자기네 마음대로 생략해 버리고 ②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다. 다시금 명심할 것은, ①은 '벌써 구원 받아' 더 다시는 과거처럼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구원 받은' 터이므로 사실상 ②까지도 이미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장(內藏) 되어 있는 격이다. 내장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이 표출될 때만 기다리고 있는 현재이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속성이기 때문에, 그 이미 이루어져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여 '보기만' 하면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나 위하신 그 처절한 고통 중의 죽으심을 나는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라 하고 "값없이 얻는" 구원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은 믿는 즉각 이루어짐이다. 개신교는 이런 사실을 형식으로는 모방한다. 그러나 모방에만 그칠 뿐이다. 즉 형식뿐이다. 때문에 ①은 무시하고 ②에만 욕심을 내는 점에서 기타 종교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순서가 이와 같이 첫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아 다시 탄생하여 새로이 창조되고 둘째, 하나님의 아들의 ①로서의 모습을 먼저 거치고 난 다음의 셋째 단계에서, ②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최종적인 모습으로 부활 또는 "몸의 구속 즉 양자됨"[롬 8:23]이 현실화하고 구체화함이다.
이 몸의 구속 또는 양자됨이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성령으로 계시는]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비록 ②가 아닌 ①의 현실에 있어도 "양자됨"[롬 8:15/갈 4:6] 즉 하나님의 아들되어 있음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 말 그대로의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콘크리트 양생(養生)의 예를 든 것과 같이 ①의 양생을 거쳐야 ②의 콘크리트로 굳혀지는 것이다. ①과 ②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양면성에서 ①없이 ②만 있으면 한 면만 있는 동전이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구원이 아무 효력이 없다.
물론 구원으로 굳혀지지를[콘크리트 굳혀지듯이] 않는 것은 당연하다. 양생을 소홀히 한 콘크리트가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흉물스러운 것으로 전락하여 다시 깨어 부수고 새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이 됨이다. 그러나 우리 구원에서는 그런 콘크리트가 아니라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시므로 다시는 그렇게 깨어 부수고 새로 시작하는 일이 일절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미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현저히 파탄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히 6:6/10:26,29].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따라서 오로지 우승하기 위하여 일편단심 달리는 경주자처럼 한눈 팔지 않고 달려가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다[고전 9:23-10:5/빌 3:7-19].
그러므로 나와 짝을 이루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시다[골 3:4]. 즉 하나님께서 내 생명이신 것이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시라 함은, 마치 내 생명을 뚝 떼어다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생하지 못하고 결국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연계에 속한 이 '나 자신'이라는 "육의 몸"에 영원한 생명이신 영혼이 '그리스도'라는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 된 결과다.
이렇게 이루어진 모든 사실은 약속으로 된 것이니 나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겠다는 약속[이것이 회개다] 즉 ①의 모습에서 충실하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②의 모습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이 약속의 "보증"[고후 1:22]으로 성령을 주신 의미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심으로써 나와 하나를 이루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약속'이라는 엄연하고도 엄숙한 현실을 망각하지 말 일이다.
이와 같은 약속으로 된 구원이므로 내 스스로 이 약속을 파기할 때 자연적으로 나의 구원은 지탱할 수가 없다. 개신교에서 이 가장 중요한 대목을 간과함으로써 스스로의 세상 종교화를 부채질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내가 향유하고 있는 나의 '현재의 소유'인 동시에 똑같이 '약속'[요일 2:25/약 1:12/2:5]인 것이다. 왜냐면 영생이 다름아닌 내게 약속의 보증으로 주신 성령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요일 5:12].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다. 그런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영생이요 구원이요 나의 일상생활이고 예배이다[고후 5:15/롬 14:7-9]. 즉 ②의 푯대를 두고 달려가는 현재의 ①의 모습, 그리고 삶이다. 그래서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빌 1:21]요 따라서 죽는 것도 "유익"[:21] 곧 얻음["gain"]이지 잃는 것[loss]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처음부터 승리의 환희에 겨운 개가를 부름이 우리의 찬미요 찬송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찬양이다. 항상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는"[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신바람 나는 매일의 생활[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의 원동력이 이렇게 되어 샘솟듯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죽음의 재난이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기개세(氣蓋世)다. 세상이 "이런 사람은 감당치 못한다"[히 11:38] 한 그대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상속 분(相續 分)을 받게 하시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다.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다"[벧전 1:4-9] 함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시되 피 흘리시는 죽음이셨으니 곧 십자가 죽으심이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음"[히 9:22]이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贖-대가를 바침으로 죄를 면제 받게 함)하기"[레 17:11] 때문에 이를 확증하시기 위함이다. 죄의 값[응보]은 죽음이니[롬 6:23], 삶[생명]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이므로 생명을 벗어난 까닭에 당연히 그 반대 개념인 죽음이다.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에는 죽음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시 생명의 쾌락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 죽음의 고통이요 땅도 인간으로 인해 함께 저주 받아[창 3:17] 고통 중에 있어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당함"[롬 8:22]이니 이는 생명의 체제가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몸’의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전 12:26]. 삶이라는 것이 '한 몸' 체제에 있는데 '한 몸'에서 벗어나 있으니 죽음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으로서의 나의 모습, 그리고 모든 사람의 모습이니 곧 세상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죄의 모습, 그리고 그 결말이다. 그리고 나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저와 같이 만든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시 범죄할 때는[고의적인 죄로서 다시는 용서가 없는-히 10:26]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가 되어 이 경우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히 6:6]고 표현함이 옳다.
삶 곧 생명은 '한 몸' 체제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머리가 되시고 모든 피조물은 이 한 몸에서의 지체(肢體) 역할로서 그 구성원을 이룸이다.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바로 이 '한 몸' 의식이다. '죄'가 무엇이며 그 반대 개념인 '의[義]' 또는 '선[善]'이 무엇인지는 이 공동체 의식의 유무(有無)로써 나누어진다. 즉 공동체 의식이 선이요 의이며 그런 의식이 없이 자기 중심[이기주의]으로 나갈 때 죄요 악, 불의와 불법이다.
단지 성경은 그 완전하고도 철저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니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 즉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다. 곧 자기 부인[self-denial]이다.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가능한 장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어져 있기 때문이니 지금까지의 설명과 같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은 단지 그 모양새만 말하는 정도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에서 그러하다. 자기 중심 일변도의 세상에서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개략적이나마 즉 성경에서처럼 철저하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는 것이니 따라서 우리는 그 진미(眞味)를 맛볼 수 있는데, 그 현저한 역사적 실례(實例) 가 임진왜란 당시의 이공(李公) 순신(舜臣)과 '나'원균의 대조적인 생애의 삶과 역할임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 의식이 국가도 넉넉히 구원한다는 실증(實證)으로서 이상 사실을 훌륭히 입증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의 양면성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양면성이시니, 무한하신 사랑이라 해서 불완전한 인간들처럼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쏠리심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속성이시다[롬 11:22].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시다[행 17:31/마 3:11,12].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세상에 알리고 정확하게 "이 분이 그리스도시다" 하고 지적해 주는 임무를 띠고 세상에 나타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구원하시는' 분이심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으로서의 그 양면성을[행 17:30,31] 명확하게 알렸다[마 3:11,12].
그리고 ‘사랑’은 세계 공통 용어다. 어린 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알아듣는 이로서 이미 그는 구원의 말씀[복음, 희소식]을 충분히 믿는 사람이다. 앞에서 미리 말하기를 일정한 지식이 없어도[지식은 오히려 오만하게 만들기 쉬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벌써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 있다고 설명한 그대로다[고전 8:3].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따르고 복종할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음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지금까지의 모든 설명은 이와 같은 사랑으로 유도하기 위한 오직 그 목적뿐이다. 아는 것으로만 그치고 사랑이 없는 이는 그 모든 지식이 오히려 심각한 치명적 걸림 돌이 될 수 있음에 스스로 경계할 일이다. 왜냐면 자기의 지식을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써 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이 '사랑'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지 결코 '지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맹목(盲目)이 오늘날 성행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그리스도를 머리로서 인식하여 한 몸을 이룬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요일 2:9-1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에게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해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최대의 선이다. 믿음의 형제를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이 없는 것은 자기를 속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하고, 하나님을 명상하고 있으면 열차를 타고 가는 객석에서도 자유롭게 전도의 말문이 열려지게 된다 하고, 신학생, 교역자라고 하면서도 전혀 전도하지 않는 이가 많다며 개탄하면서도 자기 가정에서는 아내가 눈밖에 나는 모자라는 행동을 한다고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보았지만, 그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이 경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은 빈 말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사람이 좋은 아내, 좋은 여자 데리고 살아보았으면 하는 자기 중심에서 오는 욕심이 있는 한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실 수 없다[롬 14:7-9]. 자기를 위해 사는 자로서 구원 받을 자는 "아무도 없음"[:7]을 바울은 명백히 한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마치 사형수(死刑囚)가 자기의 처형(處刑) 도구인 십자가를 지고[그리스도 당시처럼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하신 것처럼] 일관되게 나아가는 행보(行步)가 없으면 그리고 끝까지 그런 자세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경고하셨다.
사랑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돌보지 않고 오직 그 사랑하는 상대[사람]가 오매불망 마음 가운데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자기 부인(否認)이 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자 증거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해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자기 부인을 한다고 해서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은 부인이 안된 상태에서 자기 부인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상태에 있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자연스럽게 나의 의지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음을 말함이다.
그것을 결코 억지라고 여기지도 않고 힘든다고 여기지도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있는 바탕 위에서①, 자기 스스로 항상 매일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으로 나아가는 의지력을 작동시킴이다②. ①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될 일이 아니다. ② 또한 동시에 작동됨이니 사랑은 의지(意志) 곧 사랑의 의지가 주인[주체] 의식으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
주인 의식은 항상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데 있다.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공동체 의식의 핵심은 이 주인 의식에 있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생명이 있음이다. 어린 아이 같이 된다고 해서 엄마 품속에서 젖만 빠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①. 반드시 엄마 말을 순종하게 되어 있다②. 무조건 따르게 되어 있음이다.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엄마의 맴매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 즉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고 나와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이 나를 위하는 한 몸의 체제가 생명[영원한]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 몸에서는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것이 특징이요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체가 우리를 위하심이지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음을 본으로 보이시고 증거로 나타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과녁을 벗어남이 죄
같은 내용을 계속 되풀이해서 말한다고 하겠으나, 반복법에 의한 학습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죄가 무엇인가? 사람 사는 도리, 그 법도대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즉 한 몸의 이치대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중심하는 이기주의로 나가는 일체의 것이다. "죄"란 단어의 어원(語原)이 어떻게 되는가 하여 살펴보니 "과녁[활(또는 총)을 쏘는 연습을 할 때 목표로 세워 놓은 물건]을 벗어난 화살(또는 총탄)을 뜻함"이라 하여 많은 사람이 그런 의미로 즐겨 쓰고 있는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 또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 애초 목적과 의미를 벗어나 있는 일체를 말함이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행복하게 살라고 만드셨지 불행하게 지내라고 만드시지 않았고 영원히 살라고 만드셨지 죽으라고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대로 살라고 만드신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영원히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바로 그 이치, 곧 삼위일체 법칙이 드러내고 있는 바 '둘이 하나 되는' 이치, 한 몸의 이치다. 즉 개성이 서로 다른 둘 또는 여럿이 상칭(相稱)을 이루어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한 몸’의 체제 또는 구조로 사는 삶을 말함이다. 이것이 선(善)이요 의(義)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한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항상 ‘머리’ 역할이고 그 먼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새로 생긴 즉 나중에 생긴 것이 상대적인 ‘몸’의 역할이다. 저절로 생긴 것이면 절대로 이런 긴밀한 유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저절로 생기면 서로가 머리 주장을 하고 또한 서로를 불신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생김으로써 둘 또는 여럿이 있게 되는 경우 그 먼저 있던 것이 항상 머리 역할 또는 어버이 역할을 하므로 그 나중에 있게 되는 것에게 본을 보이게 되어 자기를 따라 오도록 유도할 수 있어 그런 유기체적 작동이 가능하게 된다.
비로소 조화 통일이 자연스럽게 된다. 따라서 나중에 나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 먼저 있던 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자기의 생명 또는 존재 자체가 먼저 있던 것에 매여 있어 좌우되는 까닭에 순리적으로 그렇게 따르게 되어 있는 구조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말해 최초의 근본 원인이 없이, 세상 종교에서처럼 사랑을 논하고 공동체 의식에서 머리 역할을 논하는 것은 조리가 전혀 맞지 않는 자가당착을 이야기하는 것밖에 안된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실 때 그 창조의 원리는 이 ‘머리와 몸의 관계’다. 친히 머리가 되시어 그 몸의 각 지체 여러 부분을 만드시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창조자와 피조물은 한 몸, 하나로서의 유기체다. 때문에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확고한 불문율이 정해진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고 법칙이고 원리다. 이 이치대로 모든 것은 작동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바 "하나님의 뜻"이다.
앞에서 말한 ‘과녁’인 셈이다. 화살이나 총을 ‘쏘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다. 그 ‘화살이나 총탄’은 말하자면 우리 피조물들인 것이다. 과녁을 맞추도록 쏘았는데 쏜 사람의 의도대로 가서 박히지 않고 엉뚱한 데에 박혀 버리는 것이 말하자면 "죄(罪)"다. 여기서는 쏜 사람의 실력이 문제가 되기는 하나, 화살을 중심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쏜 이의 의도에서 빗나갔다'는 점에다 무게를 두므로 이런 비유라고 해서 하자는 없다.
올바른 행동이 아니므로 불의라 하고, 그와 같은 기존 질서를 어겼으니 범법(犯法), 불법(不法)이고 결코 좋은[善] 결과가 아니니 나쁘다는 것[惡]이다. 올바르지(義) 못하니 불의(不義)다. 그러므로 서로 위하는 것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이치를 따르는 것이 행복하게 그리고 영원히 사는 도리요 방법이요 이치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 각자 피조물은 머리의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함이 필요불가결이다.
머리를 따르지 않으면 한 몸으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이 같은 운명체이므로 그래서 공동체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잘되면 잘되는 대로 모두 혜택을 누리고, 못되면 못되는 대로 모두가 해를 입는다. 그래서 공동체 운명이다. 또 '몸'은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머리'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몸이 판단할 때 머리가 잘못 하니 나는 나대로 행동하겠다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몸이 머리에서부터 나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사불란함과 통일된 조화에서 삶의 최고도의 지혜가 창출되는 법이다. 몸은 머리의 지시대로 따름으로써 머리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골고루 빠짐없이 누리게 되는 혜택을 입게 된다. 그래서 몸은 머리를 닮아 일색(一色) 일체(一體)가 된다. 그리고 이런 하나됨, 한 몸의 구조에서는 아무리 하나의 지체에 불과하더라도 마치 전체 몸이 되어 있는 양 한 개인으로서는 최고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인 것이다.
왜냐면 위하고 섬기는 측면으로 말하면,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들이 자기를 위해 주기 때문에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가 마치 바로 자기 자신과 같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무리하게 싸우지[전쟁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확대, 확충, 확장할 수 있음이니 곧 사랑에 의한 자기 부인을 통해서다.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대에서는 상관을 잘못 만나면 그 자체가 재앙이다. 잘못된 머리의 판단으로 애꿎게 그 아래 모든 구성원들로서의 지체가 같은 운명이 되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중다한 대중의 머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사람을 초월한 완벽한 지혜와 이성적 판단과 지식을 지니신 하나님만의 몫이다. 사람이 신불(神佛)이 된다는 것은 이런 기본적인 무지에서 비롯하는 엄청난 착각이 된다. 따라서 애초 머리[조물주 하나님] 홀로 존재하고 몸[피조물]이 생기기 전에는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법 또는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 단 하나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또 하나가 생겨 둘이 되고 하는 등으로 해서 마침내 여럿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는 머리 자신도 이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또한 바로 그런 목적으로 애초 여럿을 파생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애초 홀로 계셨다고 해서 현재도 자기를 위하실 수 있다는 그런 법은 없으니 왜냐면 이제부터의 자기는 홀로 존재하는 단일체가 아니라 둘 또는 여럿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체로서의 자기'가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형태는 바뀌었으나 과거나 현재나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나 구조상으로는 다르기 때문이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다. 현재의 '복합체로서의 자기' 자신 외에 또 다른 자기 자신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애초 있던 병(丙, c)이 이제는 갑(甲, a)과 을(乙, b)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꾼 것뿐이다. 실질의 변화가 아니라 형태 변화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이므로 일체(一體)를 이룰 수 있고 한 몸 구조가 가능한 것이다. 일체의 분란, 무질서가 용납되지 않는다.
창조자의 창조 행위는 이 형태 변화의 의미다. 곧 피조물 모두가 조물주 하나님으로서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임에는 변함이 없으나 단지 모습을 이전 홀로 있을 때가 아닌 다른 것 즉 다양성을 갖춘 것으로 변모시켰을 따름이다. 그래서 갑도 무조건 이제는 을을 위하게 되어 있고 을은 갑의 본을 따라 즉 갑이 그렇게 하니까 덩달아 자연스럽게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이며, 사랑은 그래서 반드시 '하나'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조주를 외면하고서는 그 어떤 사랑이든 논해도 탁상공론이 되고 바람 잡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창조신을 부정하는 그 어떤 종교도 허위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아무리 피조물의 수가 많아도 애초 홀로 계시던 때의 그 '모습과 상태와 본질'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므로 얼핏 보기에 하나님을 중심하여 만사가 움직이고 하나님을 위함 일색으로 보일지 모르나, 한 몸의 구조가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일체가 되도록 함이 하나님 정하신 뜻이므로 피조물 개개인으로 볼 때는 전부가 피조물 자신을 위함이다.
서로 교차되는 관계다. 서로를 위함이니 편향되게 위해짐이 없는 완전한 일치 조화다. 그러면 창조주[의 존재]만 시인하면 진실이고 진리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창조주를 아무리 시인해도 과녁을 맞추지 않고 빗나가는[창조주의 창조 의도를 벗어난] 사례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 종교 중에 창조신을 인정하는 종교가 거의 전부이지만, 과녁을 벗어나 있어 여전히 성경 외의 것을 주장하고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까닭이다.
성경과 다른 것을 주장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과녁을 벗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함이다. 만유가 일사불란한 하나의 질서 속에 움직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세상에 성경 하나만이 존재해야 하는데 ‘여러’ 종교가 난립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자체로써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만이 있어야 할 자리에다 거짓 것을 덕지덕지 쑤셔 넣은 것이다. 곧 이 세상이 인류의 원수 사단의 지배 아래 놀아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삼위일체 원리'라든가 '삼운(三運)법칙' 등으로 해서 확인했다. 모든 판단은 순서와 단계를 따라 내리게 되어 있다. 고로 가장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부터 명확히 전제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결론도 내려질 수 없으므로 이회장도 가장 첫째로 신의 존재부터 묻고 그 확증에 대해 궁금히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불행과 고통,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또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계심을 알되, 그 '머리'의 몸을 구성하여 몸의 각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자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머리의 지시[하나님의 말씀]를 어김[이것이 곧 "죄"다]에 있는 것이다[롬 5:12]. 이회장의 질문[5]에 대한 더 진전된 답이기도 하다.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체제 또는 구조가 확립되어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로 움직이는 자가 생겼으니, 이는 우리를 지으심으로써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경우에 따라 어겨도 즉 절대적으로 순종하지는 않아도 생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인데 잘못된 판단임이 드러난 것이다. 오만함[교만]이 이와 같이 일을 그르치게 되는 장본이다.
그리고 이 "스스로 판단 운운"은 모든 피조물[지, 정, 의를 나타내는 인격성을 갖춘 이지적인 존재들]에게 절대적인 다시 말해 하나님도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 자유를 보장해 주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렇게 자기 스스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이지(理智)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를 오용 또는 남용하여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이니 하나님이신들 어찌하실 도리가 없다. 자유에는 철저한 불간섭주의의 의미가 함께 함유되어 있는 까닭이다.
간섭하실 바에야 처음부터 자유라는 것을 주실 리 없다. 또 자유를 주실 때에는 그 판단이 헷갈리지 않도록 충분한 이지(理智)의 능력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이지력은 여기서 일의 수행 능력과는 별개 개념이다. 옳고 그름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정확한 판단력과 그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는 별개인 것이다. 즉 이지적인 판단은 피조물이 할 수 있으나 그런 능력은 머리되시는 하나님 몫이지 피조물의 몫은 아니기에 그렇다.
따라서 피조물은 머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오로지 그리고 단순히 따르고 그 지시에 의하여 움직임이 옳다는 것을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만이 부여된 것이고 또 이것으로써 충분하다. 왜냐면 '머리'께서 나머지 일체를 담당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영역 즉 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고 머리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역이 별도이다.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고로 분수에 맞게 피조물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몸이 머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분수에서 벗어나니 죄다.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위하게 되어 있는데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도 능히 살 수 있다고 과신하는 것은 과녁을 벗어나는 생각이니 이를 성경은 "교만"[to be conceited-딤전 3:6]이라 한다. 말하자면 자만, 자기 과대 평가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스스로 머리되려는 주제넘은 발상이다. '몸을 위하게 되어 있는 머리' 또는 '몸이 위하게 되어 있는 머리'의 개념이 아니라 '몸이 위하지 않아도 되는 머리' '때로는 몸을 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머리' 개념으로 스스로 정하는 망상이다.
그러므로 머리를 의식 않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체의 망념(妄念)이 죄다. 생각에서 언행(言行)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은 현재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이 말해 주듯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야말로 또한 자기 중심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기계적으로 사는 생명체이므로 그와 같이 기계적으로 본능으로만 즉 하나님 설정해 두신 장치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자연계에 속한 모든 생물이 그러하다. 스스로 자유 선택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고로 이런 기계적 생명체에는 죄도, 악도, 불법,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한부 생명인데다 자동적으로 연명해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그 속에 장치된 지시를 따라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또 어떤 경우에는 저렇게 하도록 마치 사람이 컴퓨터 장치를 해놓는 것과 같이 미리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녹여 장치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니 스스로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생리적 기계로서의 특성 때문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는 개체별로 보면 시한부 생명이나 인격성이 없으므로, 마치 끊임없이 소멸해 가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세포 조직처럼 그 전체의 종(種)으로 따지면 창조시부터 지금까지도 생존해 왔으니 항구적이고 한시적(限時的)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개체로서의 인간은 각 사람이 자기 고유의 영혼을 타고나는 인격적인 자유 독립성을 구가하므로 자기의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됨과 동시에 더 다시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이다.
이 때 비로소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창조되어 신령한 몸을 입고 있던 원래의 상태[아담의]를 기준으로 하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다가 불시에라도 육체의 기능이 정지됨으로써 썩음을 당하게 되어 있는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마 8:22]다. 아담에게 "죽을 것이라" 경고하셨던 것을 무시한 결과 과연 아담은 죽었고 그래서 아담에게서 나오는 모든 인생들이 죽은 자인 것이다.
또 스스로 판단하여 그 옳은 것을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이런 기계적 작용의 속성으로 되어 있는 육체[자연계에 속한]야말로 치명적인 것으로서 ‘죄’요 따라서 ‘죽음’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짐승들이 자기 생명을 자체적으로 이어 나가도록 되어 있는 자연적인 본능의 역할은 인간에게는 자기중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같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지만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움직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로서 후자의 경우 영락없는 죽음인 것이다.
인간[아담]은 처음부터 이런 육체[자연계에 속한]의 지배를 받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자연계 생명체의 정점(頂點)으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 육체[일반 동물들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를 일단 지으신 다음에는, 영계에 속한 생명체의 시작점(始作點)으로서 영혼을 다시 조성하심으로써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인간 창조였다. ‘자연계[육체]’와 ‘영계[영혼]’라는 이중(二重) 구조로서의 창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원성을 지닌 인간의 영혼에 부합하게 영계(靈界)를 다시 만드시게 되니 곧 에덴낙원이다. 거기서 신령한 식물[이 중에는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등 각종 비상한 능력의 나무들뿐이므로]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이 된다. 따라서 신령한 몸으로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자동 장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영혼의 자유 의사와 의지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도록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신령한 몸이 되면서부터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같은 그런 자기 중심의 본능적 요소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미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지라 인간[아담] 역시 그 에덴낙원에서의 산물(産物)인 영물들처럼 스스로의 판단과 자유 의지에 의해 행동하게 되어 있었으니, 따라서 아담[인간]의 범죄도 육체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 의지를 따른 스스로의 선택으로 죽음의 길을 자초(自招)한 것이다. 악령들의 범죄가 바로 그런 속성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의 직접 동기는, 먹으면 죽는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와 버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도록 하나님이 미리 경고하여 일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먹은데 따른 결과였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과연 죽었지만 그렇게 먹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에덴낙원 중앙에 ①생명나무가 있고 이와 더불어 ②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가 있었던 것이니 ①은 인간의 영계의 속성을 대변하고 ②는 자연계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므로 따라서 ②를 먹으면 자연계의 속성으로 육체가 환원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들 나무는 모두 능력이 출중한 식물들이니 에덴낙원 자체가 자연계가 아닌 영계이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이런 종류의 나무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한낱 신화로 만듦으로써 사단의 농락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 이 두 종류의 나무는 인간의 이중(二重) 구조 즉 일면으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 다른 일면으로는 영원한 영혼과 결부되는 영원성을 지니는 신령한 육체로 되어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원래 자연계에 속한 육체[아담]의 본능적 요소[자기 중심]가 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변환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흡입(吸入) 되어 있었거나 아무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①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먹으면 영생하는 신령한 육체가 되는 것이었고[계 2:7], ②는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다가 먹으면 도리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버리는 그런 특질이었다. 처음부터 주의를 주시기를 ①을 먹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니라 ②를 먹지 말라 하심이었다.
이로써도 이미 아담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음을 드러낸다. 신령한 몸이 되어 있은 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①의 성질이라 하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어쩌다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었을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므로 첫 사람 아담에는 해당되지 않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니[:7], 우리 자신은 영계에 있어본 적이 없지만 아담은 그러하였으므로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우리 역시 한 때 신령한 몸으로 있었던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의 경고를 듣지 않고 사단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피조물 사단의 말을 더 믿고 [때문에 현재 사단이 이 인간 세계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신(神)이 되어 있는 것이니 인간이 사단을 추종하여 그 아래에 들어 간 결과이므로] ②를 먹은 결과 아담 내외는 다시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①을 먹고자 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에덴낙원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단지 ①을 먹고자 해서 추방된 것만 아니라, 이미 ②를 먹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었으니 이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보다 법질서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어김으로써 범죄에 이른 의미가 더 크므로 범죄의 결과는 죽음인지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과 나무 과일을 먹어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은 법질서 차원에서 용납되지 않음이다. 또 자기 스스로 죽지 않기 위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손을 들어 생명과를 먹는 행위이므로 이는 곧장 범죄로 연결된다.
아담에게 죄의 대가(代價)로서의 죽음은, 영물(靈物)인 사단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이중 구조의 특성상 영생하지 못하고 한 때뿐인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로 있다가 그 수명을 끝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자연계로 돌아가는 운명이 된지라 더 이상 영계[에덴낙원]에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머리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함이 되었으니[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고자] 알고도 죄를 지은 고의적인 것이어서 일단 죽음에 이른 것을 번복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같은 고의적인 범죄라도 앞에서 설명했듯이 아담의 고범죄(故犯罪)와 우리의 고범죄와는 성격이 다르다. 후자는 사단 등 악령들의 고범죄에 해당하여 곧바로 멸망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단과는 달리 이중 구조로서의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만 한정되고 고착화하는 죽음에 이른 것이므로 현재 우리와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이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태어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몸으로 다시 복귀되는 상태에서의 고범죄이므로[짐짓 죄를 범하는 경우-히 6:6/10:26,29] 사단 등 악령들의 범죄와 같은 양상이 되어 멸망밖에 없다.
오늘날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어도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믿지 않는 것이므로 모두 준(準) 고범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그 상태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으나 회개하지 않는 한 그 상태는 영원 멸망으로 통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담은 고의적인 범죄라도 그래서 같은 "죽음"의 대가이지만 범죄한 영물들처럼 영원한 멸망은 아니니 자연계에도 영계에도 함께 속한 첫 사람[아담]으로서의 특질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는 의미로서의 "죽음"이므로 여기서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인생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는 또 당연하기도 하니, 왜냐면 아담과 똑같은 자유 선택의 기회가 아담 이후 모든 인생들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 나무 이름과 같은 '선'과 '악'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인 동식물들이 본능으로[기계적으로] 그런 선[자기 생존에 좋은 것]과 악[나쁜 것]을 기계적으로 식별하여 따름으로써 생육 번성하여 생존해 가는 것을 가리킴이니 곧 좋은 것과 나쁜 것과의 분별을 말함이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은 그런 본능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들로 말미암아 지식면에서의 그들의 보좌를 받아 그런 식별을 하게 되어 있는 체제였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그렇게 남들의 보필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좋은 것[선]과 나쁜 것[악]을 알아 일을 처리하게 된다는 말에 솔깃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나 영물들이나 한 쪽으로 쏠리거나 하여 일방적으로 우위(優位)를 차지하지 않고 상호 보완 관계에서 '머리와 몸'의 구실을 하도록 하신 것이나, 인간[여자]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도록 사단이 일부러 부추긴 셈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지[이것이 순종이다], 지체(肢體)된 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것이 죄(罪)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적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심"[고후 5:15]이다.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심"[:15/롬 14:7-9]이니 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심이다. 범죄의 결과 이렇게 죽음에 이르러 이전의 그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고 보니 자유의지보다 가장 먼저 이 "육신[본능 작용-롬 7:5-8:13]"이라는 것이 죄와 죽음의 직접 원인이 되어 인생들을 죄와 죽음의 쇠사슬로 속박하게 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즉 "죄와 사망의 법"[롬 8:2] 아래에서 그 지배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되도록 처음부터 머리를 짜낸 사단의 속임수, 그의 머리 씀도 과연 교묘하기는 하다[창 3:1].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뱀의 지혜"[마 10:16]를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가 있도록 창조되었으나 그는 어리석게도 그 지혜를 '과녁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오용, 남용 결국 악용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범죄 후의 아담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요 또한 죽은 자로서 자연계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영원히 영계에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도 능력만으로 하시지 않고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까닭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 하면 무조건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여 모든 능력을 얼마든지 구사하시므로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로 알고 있는데 물론 그러하시다. 그러나 원리원칙대로 하시면서도 그렇게 전지전능하시다는 의미이니, 단순히 만유의 조물주로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의미로 착각하면 곤란한 것이다.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므로 그런 "원리원칙을 따라도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그런 뜻임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능력이 많으시더라도 일단 한번 죽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간을 다시 영생하게 하시는 즉 ‘산 자’가 되게 하시는 방도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무조건 죽어야 하는 것이요, 죽어야만 해결될 문제다. 질서 확립 차원에서 한번 되어진 일은 변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살아나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죽을 것은 죽고 죽은 자는 죽은 자로서 일단 그 삶을 끝낸 다음에야 다시 살아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즉 다시 출생하는 묘수(妙手)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시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서 성경이 "하나님"이시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나중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살려 주셨기 때문에 된 일임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면 죽으셨다가 스스로 다시 살아나신다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으신 것처럼 위장(僞裝)하셨다고 인식될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죽으신 것은 분명하고 따라서 아버지 친히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살아나셨음을 확실히 해두어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역시 죽은 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죽은 사실 그대로일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는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그 비밀이 드러나진 것이다.
또 우리의 이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은, 이미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모든 인생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 죽음이라는 결과를 완전히 청산한다는 점에서도 당연히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은 어정쩡하거나 애매 모호함이 없이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원리원칙을 따름이 이같이 철저하니 이런 것을 두고, 흔히 말하는 대로 "과학적"이라 해도 좋다. "과학적"이라 함은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진실과도 통한다고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 확립되어 있는 자연법칙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에 거짓이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진화론 같은 것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고 있으니 과학은 정직하나 인간은 어리석다. 사단의 마수(魔手)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이비,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어 스스로를 속인다. 우리는 이로써 과학에도 인간의 어쭙잖은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있음을 체득하고 있고, 바로 그런 증거를 소위 "진화론" 사건을 계기로 확보해두고 있는 터이므로 앞으로 사단이 "과학"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온갖 속임수를 써더라도 이에 동요하지 않는 충분한 태세를 갖추고 있게 된 것이다. 소위 "진화론'을 통해서 이미 그런 것을 맛본 학습 효과가 있기 때문이니 그런 의미에서 그런 사단의 속임수는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덕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분명히 나누어져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개념이다. 이전에는 이렇게 명백하게 구분되어 나타나시지 않았으나[단지 "우리"로서만 표현되셨을 뿐-창 1:26/11:7] 이제 우리의 구원에 임하여 그 실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이다[골 1:26,27]. 그래서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주신 일이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였다[행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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