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회장의 24개항 질문 (31)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이 99%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고 왜 세계의 모범 국가가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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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聖人)들로서의 그리스도 사람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성인(聖人, saint)이라 한다. 성인이니까 성인이라 하는 것이다. 죄인이 성인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의인일 수도 없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니까 의인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을 말함이고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후 5:15/롬 14:7-9]. 천국에 가서 거룩하게 됨을 말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거룩함을 이루므로 성인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롬 3:31].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가리켜 "율법을 폐하는"[:31] 것이라 함은 어린 아이라도 이해하는 용어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이 이 대목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폐기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위의 성경 구절들을 조금이라도 음미해보라, 어디에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런 착각[성경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한 억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가. 여기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세 율법과 혼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그림자로 즉 상징해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갈 4:10] 것 등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에 대한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상, 그림자로서의 모든 것은 당연히 폐기된 것이므로 오늘날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이 그런 것을 아직도 여전히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신 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순신 정신으로 살기를 원하고 이 악한 세상에서 이공처럼 따돌림 받고 응달에서 사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열혈(熱血) 남녀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원치 않고 오직 영생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예 믿을 생각조차 하지 말 것은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므로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공동체['한 몸'] 의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 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계명의 골자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다[고후 5:15]. 그것은 자기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벗어나서는 삶이 유지될 수 없음은 이미 이 세상의 모든 비극적인 현실로써 입증되고 있는 바다. 그런 중에서도 그나마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3운법칙과 같은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가 작용하기 때문인데, 이런 강제적인 것으로 삶이 영위되는 것은 하나님 창조의 원 의도가 아닌 것이므로 영원히는 용납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종료와 함께 이 3운 법칙도 당연히 폐기된다.
공동체 의식의 결여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자기 홀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행동하는 망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써 삶의 법질서인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니 이는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오직 사는"[:15] 것을 말함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롬 14:9/고후 5:15].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곧 자기중심, 위주, 본위 주의(主義)가 모든 죄악의 근본이고 뿌리가 된다 함은 어린 아이라도 쉽게 터득할 수 있는 평범한 상식 수준이다.
공동체 의식은 바로 이러한 한 몸 체제로서의 자기중심[이기주의]의 배격을 말함이다. 자기중심이 곧 죄 다시 말해 한 몸됨을 부정하고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통하는 것이므로 죄를 설명하고 그와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의[義]를 설명하기 위해, 임진란을 통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대조적인 삶을 우리는 조명하기를 자주 하고 공동체 의식으로 철저히 일관하는 이순신 정신을 우리는 기리게 된다.
불교는 이런 자기중심의 폐해는 절감하나 그 방법을 성경에서 찾지 않고 엉뚱한 데에서 찾으므로 절망적이고, 천주교나 개신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든다면서도 실제 성경에 대한 이해를 성령의 가르치심이 아닌[요 6:45] 교부(敎父), 개혁자, 신학자 등 인위적인 데에 의존하여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진리의 문을 닫아버리시는 터라 역시 그들에게서 구원의 진리를 배우기는 완전히 틀렸고 그래서 단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모쪼록 잘 살아보려는 데에만 기를 쓰지만 하나님의 뜻은 당장 이 죽음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구원에 있기 때문에 서로 맞지를 않고 엇갈리게 된다. 고집스러운 인간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않고 아주 엉뚱한 방향에서 틀린 번지로 집을 찾으려 하니 결론은 매양 그 모양으로서 밤낮 없이 오리무중을 헤매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되 하나님의 새 창조를 받아 "다시 출생함"으로써야 그 올바르게 사는 것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가르치는데 반해 인간은 완고하게 하나님의 이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죄가 무엇이냐 하면 공동체 의식에 반하는 일체의 것이다. 자기중심, 이기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죄’에 대비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경계하는 목적이 바로 이런 공동체 의식으로 시종일관하고 자기중심을 버려 자기 부인의 자세를 취하라는 데에 있다. 간단히 말해 한 몸 체제에서 시종일관하게 자기의 지체(肢體)로서의 역할을 다하라 함이다. 이것이 선(善)이고 의(義, 올바름)이고 성(聖, 거룩함)이다.
그러나 이로써만 그치면 세상의 윤리 교과서나 세상 종교의 경전과 하나도 나을 것도 없고 다를 것이 없다. 오직 유일하게 구원의 길잡이가 되는 것은 그 방법 즉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방법을 알림에 있으니, 때문에 처음부터 이를 희소식(喜消息, 복음, good news)이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됨’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유를 상속받아 소유(所有)하고 향유(享有)하는 하나님의 아들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한 영광스럽고도 찬연한 방법이다. 독생자(獨生子, 외아들) 하나님께서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이신데 친히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남"[요 3:3], "새로 창조됨"[고후 5:17]이 그 ‘방법’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셨는데 사람되심은 나를 위해 죽으심에 있으므로 죽으시면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나도 역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실 때 스스로 살아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왜냐면 그렇게 되면 진정으로 죽으시지 않음이 되는 까닭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살아나셔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 "아들이신 하나님"으로서의 진상(眞相)이 밝혀졌음을 이미 설명했다. 이렇게 우리 위해 죽으셔야 함이 필연적이 되기 이전에는,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서 나누어 나타내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의미는, 단지 ‘아들을 살리시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심으로써 아들과 똑같이 아버지 또한 ‘처음 창조’와 ‘새 창조[우리의 구원]’에서 주역(主役)이심이 드러나진 것이다. 이로써 또한 ‘삼위일체의 원리’가 밝혀졌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의미는, 바로 그런 이치 즉 삼위일체의 원리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으로써 나의 구원이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된 내가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소상하게 가르치심에 또한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어 있어 그래서도 중요하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의 하나되심을 강조하여 설명해 주심으로써 이를 밝혀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 의식은 실제적인 공동체 의식의 본질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 면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니, 본질로서의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알 수 있고 따라서 온전히 이룰 수 있어 그 결과 참으로 영생하는 방법이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런즉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공동체 의식으로 살았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선행 자체로써 우리가 구원[영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가운데 충실히 살아 하나님 정하신 생명의 법질서에 부합한 행동이었는지[고후 5:10] 그 여부를 묻는 의미이다.
18. 다음 물음은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이다. 이회장은 아마 이런 종교 광인 즉 광신자들[유난히 기독교에 그런 현상이 있다]을 유심히 지켜본 것 같다. 이런 광인들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기도 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광신자들이나 종교 광신자들이나 사회에 끼치는 해독은 일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워낙 그런 광인들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다보니 그런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질문의 요지는 왜 하나님께서 그런 종교 미치광인들을 정리하시지 않고 방치하느냐 하는 것이리라. "그런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실존이라는 것이 한낱 인간이 지어낸 허구가 아니냐" 하는 반론이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당원들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같이 종교[기독교]도 그런 인간의 일이기에 그렇지 않으냐, 우리는 공산주의를 실속없는 단지 시행착오밖에 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종교나 그런 헛된 망상이나 똑같이 광신자들을 만들어내니 그런 것을 보아도 신의 존재가 수긍이 안간다"는 함의(含意)가 엿보인다.
혹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그렇게 광인이 되었으면 그렇게 비정상으로 나가기 전에 하나님이 왜 손을 써 주시지 않는지, "이것 역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 않은가"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칫하면 광인이 될까 싶어도 선뜻 하나님 믿는 일에 나서지 못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이들은 종교적 열정이라는 미명하에 귀신 들린 이들이니, 오늘날의 "개신교"를 표방하는 일부 사이비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 넋 나간 짓거리는 개신교라 보아 주기에도 과분하고 숫제 '사이비'다. 성경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불어넣어 주어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술책이다. 이런 사유들이 한데 뒤섞여 일찌감치 교회 문을 두드렸을 이회장으로 하여금 그 결단을 망설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주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유심히 지켜 보고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저런 광인이 되는 판이니 어디 안심하고 하나님 믿는 일에 뛰어들겠는가" 하는 우려 섞인 질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광인들을 정리하시지 않는 것은 세상의 악인들을 정리하시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를 한 때나마 승승장구하게 하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 일절 무간섭주의로 일관하시는 듯한 양상이나, 이는 무간섭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의 양식과 상식에 의한 판단에 일임하셨다는 증거다. 왜냐면 모든 필요한 증거와 정보는 충분히 남김없이 다 제공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하실 몫은 없다. 그 이상 하시면 강제가 된다. 그러므로 물러나 지켜만 보시는 단계다. 그렇다고 절대로 손놓고 계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와 같은 악령들의 짓거리가 결코 넘치지 않도록 즉 분수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모든 천사들은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악령 사단의 모든 활동은 허용된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엄격히 제한을 받고 있음이다[욥 2:6]. 앞에서 "귀신 들렸다"는 말도 했지만,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의 이 세상 주재(主宰)와는 연결이 되지 않는 주제(主題)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령 사단[Satan]이다. 그가 직접 이 인간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있음이다. 이 현실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와 관계된 것으로서 사단의 유인(誘引)에 넘어가 아담이 그를 추종한 결과다.
원래 모든 영물은 인간[아담]을 위함이었다. 그 지식으로 인간을 보좌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나 그 중 하나[사단]가 이런 역할을 악용하여 인간을 범죄하게 만듦으로써 이같은 현재의 불행과 죽음 그리고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서의 사단이 이와 같은 모든 인간 부조리의 배경이 되고 인간 각자는 그 주역이 된다. 위에서 지적한 그런 광신자들의 광란도 그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배치되는 종교가 여럿 건재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포함해서 모든 우주를 지배하시고 관장하시는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이다. 비록 사단 등 악령들이 활동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용인하신 까닭에 되어지는 일로서, 목적이 있음이니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악인들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게 하는 역할로서 악령들의 현재의 존재 가치가 있기도 함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선한 일에 거룩한 천사들을 부리시는 것처럼, 그 반대되는 일에 악령들을 부리시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시고 세상 신으로서 군림하게 하심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셔서 된 것이 아니고 인간[아담] 스스로가 불러들인 화근(禍根)이다. 아담이 처음부터 범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런 비극적 상황이 전개되어 있을 리도 없고 사단이 인간 세상에 "이 세상 신과 지배자"로 군림해 있을 까닭도 없다.
사단 스스로 인간을 압박해서 인간을 옥죄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내어 준 자리다. 사단의 꾐에 빠져 사단을 추종하였으니 서열이 바뀌게 된 결과다. 당연히 사단은 인간 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강제가 아니고 간섭일 수도 없고 오로지 각자 자유 의지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각자의 운명이다. 아무리 함정이 되어 있어도 내 스스로 그런 길로 나가지 않고 죽어도 그 불의한 길로 나가지 않기로 작정이 되어 있으면 그 누구도 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확립해 두신 '자유'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정 탓도 아니고 또 나의 어쩌다 저지르는 불의의 실수도 아니고 내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각자 자기 선택에 따라 자기 운명을 결정하게 하시는 데에 의미가 있으니,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런 종교들은 정리하셨을 것이고, 그보다도 그런 종교가 생겨나게 묵인하실 리도 없다. 따라서 시험하는 자로서의 악령이 그 배후가 아니고는 인간 스스로로는 감히 그런 종교를 만들어낼 수가 없음을 이미 밝혔다.
즉 종교는 자생(自生)한 것이 아니라 악령의 함정, 덫, 올무인 것이다. 또 하나님 편에서 보아도 같은 의미이니 곧 악인을 의인들 중에서도 솎아내고 추려내는 일련의 작업 과정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를 구분한 것이 이 때문이다. 천주교는 과거 개신교도들을 모질게 핍박했었다. 거대한 정치세력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冒頭)에서도 밝혔지만 개신교와 천주교를 정사(正邪) 이분법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다.
성경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종교가 오늘날 전반적으로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할 점은 천주교는 단일 체제가 되어 있는 반면 개신교는 비록 여러 집단으로 대별되어 있지만 거의 개교회 독립 체제다. 따라서 천주교처럼 전체 하나로서 인식할 수 없고 내용으로 따지면 말 그대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다시 말해 개교회를 이끄는 목회자(牧會者) 나름이다. 따라서 여기서 "개신교"라 함은 일반적인 비(非) 천주교 기독교를 총칭함이 아니라 교리 측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 위한 "대신 죽으심"이라고 하는 데 있다. 이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육신 대로 살아도 구원은 된다"는 것이요 로마서 7장[특별히 24절]의 기록을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고 거의 모두가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주장하지 않은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거의 모두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고로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분류하여 이 글에서 지목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논점(論點)은 분명하여 독자들에게 그 어떤 혼동도 준다고 믿지 않는다.
이 세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악령 사단인지라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딴에는 사력(死力)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그야말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 사단의 악[자기중심]의 속성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표방하게 하여 광신으로 흐르도록 만드는 것도 물론 그 일환이다.
하나님을 믿어서 광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악령 사단이 그 기회를 탄 것이다. 아니면 사단이 그런 속이는 목적으로 그런 광신자들을 만든 것이다. 모두 이와 같이 인간의 자유 선택과 악령 사단의 압제(壓制)는 서로 맞물려 있다. 어느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 에덴낙원에서 사단이 강압해서 인간을 자기 말을 믿고 따르도록 한 것이 아니다. 그럴 위치도 아니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오직 인간[아담] 스스로 그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동조함으로 된 것이다.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창조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이 세상을 완전히 관할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악령이 이 세상을 직접 지배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 세상이 악의 소굴처럼 되어 있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자초지종은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것이니, 사단이 이런 사실을 자기 힘이 닿는 한 감추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가셔서 십자가 처형의 언도를 받을 때 증언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현재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하고 거듭 강조하신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럼 왜 그런 악령들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시느냐 하는 것은 악인들이 악을 행하도록 왜 방치하시느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라고 앞에서도 지적했다. 다 같은 악행인데도 악인들은 악을 행하게 하고 악령들은 제지한다면 형평성에서도 어긋난다.
악인들을 그와 같이 통제하거나 제압하신다면 간섭이 된다는 의미에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악한 세상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인생들의 구원에 있어 그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있는 까닭이다. 구원은 절대로 강제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자기 선택에 의해 믿도록 함이 하나님 구원의 특성이다.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해 첫 사람 아담도 범죄하여 우리가 현재의 이런 비극에 빠져 있으니 구원 역시 우리의 자유 의지로 이루어져야 시종 여일(如一)한 것이어서 앞뒤가 맞으므로 당연함을 앞에서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아담을 따라 죄 짓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에 한하여 구원되는 의미가 '믿음'이다. 그래서 믿는 자가 구원되는 의미다.
그런즉 단순히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대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롬 14:9] 작정하는 자에 한해 구원이 이루어짐이니 그래서 회개가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다[행 2:38]. 따라서 악인들도 얼마든지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그런 종교적 광인들도 회개하면 사단의 압제에서 얼마든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어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으므로 단지 그들의 회개만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리시지는 않는다. 미리 아심을 따라 미리 정하심이 있어 그 때를 아심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언제든지 이 세상은 종료하게 되어 있다 하셨으니, 왜냐면 그 무렵이면 더 이상 구원될 사람이 없는 때임을 하나님 친히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하는 질문[19]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악령 사단으로서는 이 둘은 이명동인(異名同人) 격이라 차이가 없다. 질문 18번과 20번은 개신교를 지칭한 것으로서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형제간이 아니면 사촌쯤은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 둘은 교리상으로도 현저한 격차가 있다. 그 두드러진 것이 마리아 신격화다. 내가 그리스도 앞으로 어렵사리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 뜻이 나 위한[나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다.
마리아든 누구든 중간에 그 어떤 중재도 필요 없으니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신 것이 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성경과는 정반대로 설정해놓았으니 "마리아의 도움 운운" 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태(胎)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으시고 "여자여" 하고 일반 여인들을 부르시는 것처럼 하셨다.
이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는 필요성에서 한 여자 곧 마리아라는 처녀의 태를 빌려 나셨다는 것뿐이지 마리아를 통해 처음으로 존재하시게 된 것은 아님을 천명하심이다.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어야 "모친"에 해당되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 편의상 마리아를 "모친"이라 했을 뿐이다. "마리아"가 당시에도 아주 흔한 여자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역시 대체적으로 볼 때 천주교만큼이나 성경 그대로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번안(飜案)도 아닌 완전한 개작(改作)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고의는 아니더라도] 딴 것을 세워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임을 이미 지적했다. 개신교의 종교화는 그리스도의 "대신(代身) 죽음"이 그 골자임을 다시 강조해둔다. 이런 모든 배후에는 항상 이 세상 신(神) 사단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일이다.
우리는 특정 종교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악령 일당과 우리 인간이 대립, 대치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치 상황에서 악령은 인간의 절대 다수를 그 포로로 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이런 포로됨도 인간 스스로 사단에게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써 된 결과이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도든, 천주교도든, 개신교도든, 회교도든 모든 사람이 개개인의 종교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설명을 약간 더 부연할 필요가 있다. 그 전에 먼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귀신 들릴 수 있느냐"에 대한 답변부터 정리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귀신 들리는 것'임을 앞에서 밝혔다.
"무조건 ‘좋은 것은 잘 믿어 그렇다, 부정적인 것은 믿지 않아 그렇다’고 둘러대는 말이 아니냐"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광인이 있게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위축되게 하려는 사단의 책략이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 역시 상식에 속한다. 모르는 것을 믿고 자기 전부를 내맡길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 광신자들은 성경대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상 속의[혹은 악령 사단의 사주에 의해]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믿는 것뿐이다.
성경에 밝히신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는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그런 범주에 속하기는 매일반이다. 기독교만 아니라 성경을 믿지 않는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하다. 따라서 "믿는 사람도 미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미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런 세상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대로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미치는 것이니,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그렇게 미치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쯤은 상식 차원에서 이해할 일이다.
이와 같이, 그런 광인들 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믿을 만한 증거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면 잘못 믿은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뿐이다. 잘못 믿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고 그런 사람을 제재하신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강제, 간섭이 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든 하나님은 이미 다 충분히 제공하신 다음이다.
그런 것 없이 믿기를 바라실 리도 없지 않은가. 또 하나님께서는 굳이 믿으라, 믿으라 하시지도 않는다. 왜냐면 우리 인생 각자의 자유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 곧 악인은 거부하시고 차단시키시는 실정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정당하니, 범죄한 아담을 죽음에 이르는 그대로 버려두셨고 범죄한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이르는 짓을 해도 이를 강제하여 제지하시지 않은 선례를 따르심이다. 즉 법질서의 시종일관성이다. 이런 일관성이 없으면 법은 유야무야다.
오직 회개하기를 바라심이니 다시 말해 스스로 잘못[악행]을 깨닫고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욕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구원의 능력이 베풀어 지시는 것이나, 처음부터 그런 것이 없는 이들은 하나님도 외면하실 수밖에 없으니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자율성을 따라 움직이도록 처음부터 창조하셨으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시라도 인간의 적극적 동의 없이는 움직이실 수 없으니 무의미한 것이다.
악인들이 오히려 믿을까 싶어 쉬쉬하신다고 성경이 밝히고 있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행 28:27]. 악이 좋으면 좋은 대로 행하도록 버려두심이다. 악을 좋아하는데도 혹 영생에 들어오는 일이 없을까 그것만 주의하신다는 뜻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간섭이나 강제가 되지 않도록 하심이다. 말씀만은 경고를 하시고[악인에게] 약속하시는[믿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요일 2:29/요삼 1:11/롬 2:7,10/요 5:29]) 이들에게] 등 다 하시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유보하심이니 위협을 함으로써 강제가 되고 회유하듯이 하면 간섭이 되는 까닭이다.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성령께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즉결처분을 내리시는 것도 그 한번만으로 그치셨을 뿐이다. 그 한번의 일벌백계로 모든 교회에 경고를 내리신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동일한 범죄를 짓는 이들이 있어도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 처분을 미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들에게 내리시는 포상도 특별한 경우 현실로 나타나는 수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차후로 미루어지는 일이니 그래야 믿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악인들도 억지로 구원시켜 보아야 아담처럼 또다시 볌죄하여 죽고 말 것인데 무엇 때문에 헛수고를 하시겠는가.
앞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고 보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둘이 하나되는 이치를 따라]’ 죽으심이다. 구약시대의 희생 제물은 짐승[양이나 염소 등]일 뿐이므로 사람이 동물과 함께 '둘이 하나'될 수는 없다. 이렇게 동물들을 제물로 바친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자’로서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짊어지실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의미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짐승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 제물로서의 그런 동물들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의미가 처음부터 아니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림자'로 나타내는 의미로만 한정된 것이다. "우리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고 짊어지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대신하시는’ 의미라고 착각함도 금물이다. 나와 함께 죽으심이니까,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내 모든 허물을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 될 수가 없다.
내 죄와 허물을 짊어지셨지마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아니니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든 아니 죽으셨든 관계없이 나는 이미 죽은 자이다. 고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함’도 아니고 나의 ‘이미 죽은’ 상태를 ‘무효로 돌리기 위함’도 아니니, 오직 '나와 하나 되심'을 목적으로 한 것이므로 그래서 '함께 죽으심'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이 되게 하심이었고 그래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기 위함’ 곧 산 자가 되게 하심이 목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죄인인 나를 나의 모든 허물과 죄와 함께 '죽음으로써 처단[처형]하신' 다음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다시 살려놓으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당겨[원래 '죽은 자'이기는 하나 실제로 육체의 죽음을 당하는 의미에서,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셨으니까] 죽어,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둘이 하나를 이룬 삶으로써 살게 하신 것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갑도 을도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구조가 되어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을 사는 것이 되게 하심이다. 그런즉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계 1:18] 분이 되어 계시는 것처럼, 나 역시 이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 즉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전에는, ‘죽은 자’[마 8:22]는 되어 있었어도 ‘죽었다가 살아난 자’는 아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차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따라서 그 나타나는 결과로 ①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롬 6:9], ②‘죄인’으로서 죽은 자’였던 내가 죽었으므로 과거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려니와, ③그러한 과거의 내가 죽어 장사 지내짐으로써 사라졌으므로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라는 것이 없어졌으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수 있게 되어 원천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현재 내가 같은 육체로 있기는 하나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다르니, 나는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혀 있고 현재의 나의 이 육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엄연히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의 변화이니, "성령으로 출생함"[요 3:5,6]으로써 다시 말해 "다시 출생함"[:3]으로써 새로 얻은, 죽었다가 다시 새로이 얻은 육체가 나의 현재의 이 육체인 셈이다.
즉 "새 생명"[롬 6:4]으로서의 육체이다. 이런 육체 가운데에서의 삶은 역시 이런 육체로 계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는 것으로서, 곧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시는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의 삶이셨던 것처럼 나 역시 그리스도와의 하나된 관계에서 그와 동일한 법식(法式)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전에는 죽은 자로서의 나 혼자였으나 이제는 산 자로서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된 구조이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체제다. ①"죄와 사망의 법"[롬 8:2]에 포로되었던 과거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며, ②내 안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으므로 그의 종이 된 나는 마땅히 주인을 따라야 함이니 주인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데"[히 1:9] 나는 그와 상반되게 "불의를 좋아할"[살후 2:12]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와 하나된 구조로서의 나의 '산 자'됨, '다시 남', '새로운 피조물' 됨은 모두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렇게 내 스스로 이를 절대 무효화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다시 말해 머리되시고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가 되시므로 "주님"이라 부르고 "주님"으로 모시겠다는 순종의 약속을 하는 것이 "회개"[행 2:38]인데, 그리하여 나의 회개를 액면대로 수용해 주셔서 "죄 용서가 되고"[:38] 그렇게 깨끗하게 된 바탕이 이루어진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인데, 이 약속을 내 스스로 파기한다면 당초의 약속은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식 차원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온전히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인즉] 온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9/고후 5:15]으로서 내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③과거 내가 나 자신을 위하던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완전히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하면 필요 없는 일이 됨이다. 내가 아무리 나 자신을 위한다 해도, 나를 창조하시어 속속들이 나를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에 미칠 수 있으랴. 내 스스로 위함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것의 만 분의 일이라도 될까.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을 위하게 되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는 구조에 장애만 되는 것뿐인데 누가 감히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리요.
원칙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은 내 스스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복종하려는 의미가 없는 한 그렇다는 것이고, 첫 사람 아담처럼 또는 영물들 가운데 사단을 위시한 악령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스스로 어길 때는 영락없는 범죄행위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같이 육신의 지배를 벗어나 자유 해방이 되어 있다는 그 차이다.
그러나 이 역시 스스로 악이 좋아서 행하는 경우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를 바라는 때에는, 육신의 지배를 지배라고도 여기지 않거니와 물론 자유 해방의 의미도 없다. 그런 사람은 그 스스로 자기 육체와 동조(同調) 동화(同化)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모두가 다 육신에게 포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즉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음"[롬 7:14]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니, 빛을 미워하고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요 3:19,20]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네피림"이 이런 종류에 속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준비된 것이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성경이 명백히 하고 있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그런즉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그대로다[요 6:44,65].
그래서 사람 삶의 이치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그 명령을 따라 이웃 서로 간에 같은 지체로서의 상대를 위함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삶의 사는 도리이고 선이며 의이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악인 줄 알아, 다시 말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지금까지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온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는 경우[이것이 "회개"다], 나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선물로 받아 모시게 되니 뿌리부터 바뀌어진 환경 변화요 실질적인 변모(變貌)다.
이 변화를 못믿으면 그리스도를 아무리 영접했다 해도 현실이 아닌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인데 믿지 않으니 구원이 현실로서 구체화할 리 없는 까닭이다. 이런 모든 변화의 요체는 사랑이니, 사랑에서 오는 순종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와 관계된 것이다. 나의 '사랑의 순종'을 이루는 나의 의지가 여기 이 구원에서 핵심 요소다.
나의 의지가 작용하여 믿기로 선택하고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한 이렇다 할 지식은 제대로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제대로 된 반응을 일으켜 나 역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순종하여 그 모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어가려는 의지만 있으면 그리고 그 마음 변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그런 자세로 나갈 때 나는 넉넉히 구원되고도 남는 것이다. 지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순종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니[고전 8:3]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요 속성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필요함은 그런 사랑과 순종으로 인도하기 위한 안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방금 설명처럼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고로 그런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사랑으로 곧장 직행할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마 18:3]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3] 하셨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지식이 필요한가. 그러나 어린 아이의 최대 강점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사랑은 믿음으로 통한다. 그래서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와 같이 사랑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지식은 많으나 순종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이 경우 이렇다 할 지식이 없어도 구원 얻음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는 그 얘기다.
그래서 만민에게 해당되는, 만민에게 평등한 구원이다. 그리고 공평공정하다. 만민 중에는 남녀노소, 무식한 사람, 문맹자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소위 지식이 있다는 이들은 그 잘못된 지식으로써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는 인위적인 교리를 앞세워 그 핑계를 대고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반면에, 이렇다 할 지식이 없이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오직 사랑의 순종으로 보답하는 것이 양심의 명령인 줄 알아 이를 제대로 받아들여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한 이들은 얼마든지 구원에 들어간 것이다.
지금 이 글에서 설명하는 이런 지식도 "어린 아이 같이 되도록" 내 스스로를 만들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인위적인 성경 해석으로 소위 지식이 있다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함이 없이 순종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따라서 나는 틀림없이 구원되었다"고 하여 그 지식에 의존한 많은 사람은 그대로 구원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성령 추만함으로써 이를 경계하여 회개의 열매가 없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야 이 돌들로도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다고 정문일침(頂門一鍼, 머리의 정수리에 침을 한방 놓는 것)을 놓은 것이다[마 3:7]. 그런즉 반드시 회개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즉 순종하겠다는 결의로 약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로 믿는 것이 아니므로 구원이 해당되지 않음을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하신 점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요 15:1,2] 하신 것과 같다. 즉 우리를 구원하심은 유실수(有實樹)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목적으로 심는 것과 같이 우리가 과실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니, "내 안에 거(居; 머무르다, 살다, 있다)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의 안에 있는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요 15:4-7] 하심과 같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없애 버리신다는 뜻을 이와 같이 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물론 열매가 없다고 당장 버리시는 것은 아니니 참고 기다려 주시나 그래도 순종의 열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마 7:21/요 4:34] 등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 받은"[요 20:21] 의미를 따라 순종하는 열매가 없을 때는 가차없이 찍혀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과원지기에게 말하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시지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십시오' 하였다"[눅 13:7-9]고 경고하심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시 경고하기를,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하였댜.
그래서 이 열매 맺는 뜻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직결시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요 15:7]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을 "내가 한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씀으로써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 거하는 곳, 사는 곳)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요 14:23] 하신 대로다.
즉 "내 말을 지킨다" 곧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심이니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행 5:32] 즉 구원하신다는 의미 그대로다. 그런즉 "너희가 내 말에 거(居)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요 8:32] 하셨다. 다시 말해 우리가 순종하면, 순종하기로 확고하게 작정하면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능히 순종하도록 역사(役事)하신다는 사실을 가리켜, "진리를 알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다"[요 8:33,34,36] 하셨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줄을 알아야"[:43] 하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 듣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다[요 6:44,45,65/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인데 이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를 자유케 하셨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순종하는데 무슨 죄를 짓는가. 불복종이 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가리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 것은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라"[요일 3:8,9] 하였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또 묻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나 역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터이므로 신령한 몸이 되어야 마땅한데 왜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냐"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시기 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1] 하신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이제 나는 영구히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터이기에 그렇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나의 부활과 승천이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도 내가 그렇게 함께 앉아 있는 것임과 같이[엡 2:6],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강림(降臨)하심 역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강림한 의미이다. 그리스도 친히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바로 그런 의미다.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 이 구차한 세상 육체의 삶의 낙을 누리려고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성령을 받아 모시는 것[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내 자신[내 육체] 안에 다시 오는 격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 육체를 마련해 주신 것과 같으니[히 10:5] 나의 경우 나의 육체가 바로 그 보내심을 받은 육체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나를 위해 나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므로 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함께 같은 육체에 속하셨던 것이다[히 2:14]. 내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죽은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 역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죽으시려 세상에 오셨다. 그래야 명실 상부하게 나와 함께 죽으시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내가 신령한 몸일 수가 없고, 이런 육체로서 "보내심을 받은 바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룬"[요 4:34] 다음에야 얻도록 되어 있는 신령한 육체다. 곧 "양자 될 것 곧 몸의 구속"[롬 8:23]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함과 같이, 우리 역시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하나님의 양자(養子, 아들)가 되어 있지만[8:14-16] 신령한 몸을 입음으로써 "양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므로 그 사람으로서의 온전함을 이루셨다는 의미이고, 우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온전함을 이루는 의미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온전함을 이루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하신 모든 것이 우리 각자의 본으로서 즉 사람[구원 받은 자]의 대표로서 하신 것이므로 이와 같이 본이 되심에 완전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 역시 주님을 본으로 하여 주님을 따라 온전함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 함이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사람[우리의 대표 또는 본으로서]'으로서의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본보기'이신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보통 어폐(語弊)가 있지 않다. 성경은 그런 모순된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그런 모순된 표현을 방치하시거나 묵과하실 리도 없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뜻을 행하고 일을 온전히 이루심으로써 즉 죽음의 고난 후 부활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셨으니 우리도 당연히 그러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한 바울 사도는 우리의 본으로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교제, fellowship]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르렀다"가 아니라 "이르려 한다" 했으니 과거도 아니고 현재 완료도 아니고 진행형이다. 진행형이지만 미래에 가서야 우리가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완료[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구원은 받아 이미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시고 있는 것이니 죽은 자가 아니라 당당히 산 자이다. 산 자이므로 산 자로서의 당당한 일을 하는데 첫 사람 아담처럼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나가는지 여부가 다루어지는 터이므로 '부활에 이르려 한다" 하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 되어 부활해 있는 나의 현재 상태지만[그러니까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이다]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러야 함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스스로 본받아 나도 죽음에 이르는 것이 나의 보내심 받아 있는 마땅히 할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해 그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내기 위해 내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요 20:21,22].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를 보내신 뜻을 행하고 보내신 일을 온전히 이룸으로써[요 4:34] 그렇게 "양자됨"이 인정되는 것이니,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됨이 기계적으로[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한 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임"[:13]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의 특징이 드러나는 법이기에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고 "육신대로 산다면"[:13]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면서 "육신대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데"[:13],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결과가 "죽음"일 리 없다. "죽지"[:13] 않으려면 즉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 스스로 "죽여야"[:13]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肢體)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골 3:5,6] 함과 같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단죄됨을 면하도록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32] 한 대로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우리가 믿음에 있는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 자신을 확증해야"[고후 13:5] 함이니, 바울이 본을 보임과 같이 "우리 몸을 쳐 복종시켜야"[고전 9:27] 하는 것이다.
그런즉 최후 순간까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지" 그 여부가 관건이다. 고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롬 8:14] 됨의 위치를 끝까지 지킨 결과가 "양자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당연 순서요 논리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그 중간에라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아니하여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고 "육신대로 살아"[롬 8:13]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고후 5:15] 반드시 "죽는다"[롬 8:13]는 결론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죽을[멸망할] 수 있는가. 고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성령을 받아 모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나[갈 4:6] 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반환해 버린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겠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감히 발로 밟고 감히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아닌가[히 6:6/10:26,29].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겠지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또다시 나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살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육신대로 행하면 죽을"[롬 8:13] 것이므로 그래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13]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골 3:5] 것이니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내 몸을 쳐서["to beat my body", "to harden my body with blows"] 복종시킴"[고전 9:27]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죽을’ 것이지만 내가 먼저 ‘죽임’으로써 죽지 않게 됨이니 이것이 바로 결과론적으로 말해 "내 구원을 스스로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나를 죽이려는 상대를 먼저 [부지런히] 죽이는 것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음으로써 이 죽이는 작업을 고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빌 4:4/살전 5:16] 매사에 감사하며[살전 5:18] 이 전투를 계속하니 한도 끝도 없이 신바람 나게 할 수 있음이다.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함이다. 언제나 명심하여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싸움이 나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삶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골 3:4] 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이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마음 가짐, 몸 가짐은 불변이다. 이는 물론 이 세상에서만 한정된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저울질되고 다루어졌으므로 시험하는 일이 죄다 끝났으므로 더 이상 이런 "조심하는"[고전 10:12] 일이 필요가 없게 됨이다. 더 이상 시험하여 저울질해 볼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모든 선별 작업이 완료된 단계이니, 영물들[거룩한 천사들이나 사단 등 악령들이나]은 이미 그 작업이 완료되어 있음과 같다.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은, 고난 받음으로써["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골 1:24)이니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지, 결단코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한 몸은 아닌 것이다. 삶의 낙을 누리려면 마땅히 신령한 몸이 되어야 제대로의 낙을 누릴 수 있음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내일 일도 모르는 구차한 몸으로 삶의 낙을 누리려는 것부터가 넌센스[언어도단]다. 믿기 전에는 ‘고난 받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서 이를 기피하기 위해 즉 죽는 것이 두려워 범죄하고[자기중심이 되어 어쨌든 살겠다는 욕심에서] 그래서 죄의 종이 되었으나[히 2:15],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구원 받아야 할 인생들을 위해 ‘스스로 고난 받기 위한 몸’으로서의 완벽한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데에 생명이 있다. 십자가에 나아가시면서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 기쁨을 너희에게 끼친다"[요 14:27/15:11/16:33]는 말씀으로 주님 죽으신다는 말씀에 잔뜩 기가 죽어 있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실 정도의 넘치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셨으니 왜냐면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러하니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사랑의 낙은 현재도 유한(有限)없이 넘치는 것이다.
삶의 낙은 없으나 사랑의 낙은 있으니 삶의 핵심이 사랑이므로 그 평안과 기쁨은 항상 넘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억지의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주인 의식의 고난 받음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어쨌든 어느 경우에서나, 이런 자연계에 속한 연약하기 짝이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몸은 살자고 있는 몸이 아니니, 이런 몸을 가지고 살려고 버둥대고 몸부림치고 아우성 치는 한없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와는 이제는 마땅히 결별되어야 하고 담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 미망(迷妄)으로부터 인생들이여, 그리고 천주교도들, 불교도들, 개신교도들, 무신론자들, 무종교인들이여 하루 빨리 벗어날 일이다. "화 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다. 화 있을 것이다. 지금 배부른 이들이여, 그대들은 굶주리게 된다. 화 있을 것이다, 지금 웃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눅 6:24-26]. 찰라 같은 현재에 눈이 가리워져 매몰되어 영원한 죽음의 고난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큰 불행은 없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해석도 가능하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부활하셨으니 성령은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니 그리스도의 영이심과 더불어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들께서는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함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롬 8:11] 한 대로, 아들이 아니시라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실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에 살리셨음이다. 왜냐면 일단 죽으셨으므로 죽으신 다음에는 살아나시는 법이 없다. 만일 살아나신다면 그 죽으심이 진실이 아님을 만천하에 입증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죽으심이 사실이요 따라서 절대로 살아나실 수가 없지마는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 한에는 아들께서 아무라 죽으셨다 해도 그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실 수가 없음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영원한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라 하는 것이다. 따로따로의 둘이 아닌 것이다. 둘이라면 절대로 살리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님이다.
우리의 다시 살아남도 그러하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내가 아무리 죽는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한 내가 절대로 죽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는 이미 설명한 바 삼위일체 원리의 대소, 주종, 인과(因果) 관계에서 작은 자는 반드시 큰 자를 따르게 되어 있음이다. 이와 같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일에서도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따르심으로써 하시지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시는 법이 없으시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롬 8:15]의 차이는 같은 일을 하되 주인으로서 기쁨으로 자진해서 즉 하고 싶어서 하느냐 아니면 종으로서 마지못해 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 자기 일이니까 하고 싶어서 즐거이 하고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아니면, 남의 일이고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놀고 싶어 하고 삶의 낙을 즐기고자 하는 그런 차이다. 그런 것은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나 자신의 일로서 여김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구원 받고 못받음의 차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됨"이 우리의 구원이니 이는 당연하다. 아버지의 상속자 즉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할 때 잘못 믿은 것이거나 믿지 않는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小子, 어린 아이들, children]인 것을 증언하심이니"[롬 8:16], "소자(小子)들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17]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이런 ‘고난 받는 육체’ 가운데 이 세상에서 잠정적으로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우리의 염원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위함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가운데 "자기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구하여"[빌 2:21] "그리스도의 일을 위함으로써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함"[:30]이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奉仕)하며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3:3]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므로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려 힘쓰는"[고후 5:9] 것이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함이 이 뜻이다. 에덴낙원에 있던 첫 사람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담을 시험하는 저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순종하는지 여부를 이로써 가름하여 저울에 달아보는 것이었다. 순종하지 않으면 범죄요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하나님 친히 아담 내외가 불복종한다 하여 사형에 처하여 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동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죽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죽지 않도록 먹지 말라는 주의를 주셨음에도 이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선악과를 먹었으니 당연히 그 결과는 죽음이다. 이런 선악과의 의미가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때인 줄 알고 이에 충실하고 충성하느냐 하는 그 자유 선택으로써 가름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을 속이던 사단의 거짓말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면 당시는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요 12:25] 하시는데도, 악신(惡神) 사단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해도 구원은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즉 "육신대로 살아도 죽지[멸망하지]"[롬 8:13]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위해 살아도[고후 5:15] 무관하다"는 것이 된다.
이 세상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육신에게 포로되어 있다 함이니 사단의 속임수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 하던 그대로의 거짓말이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신하다니 될 말인가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성경을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까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심각하고도 엄중한 경고도 엉뚱한 뜻으로 해석하여 상급 타는 것을 의미한다는 기발한 착상으로 얼버무리는 것이니 사단의 거짓말 바로 그대로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아담과 같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10,11] 일편단심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7,8]이다.
그리스도 안에 현재 있지마는 "그리스도 안에 끝까지 남아 있는 나 자신을 만들려고" 하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이 말에 유의할 일이다. 나와 더불어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웃의 행복한 삶[영원한]과 직결되기에 "가장 고상'[surpassing greatness, excellence, so much more valuable(NKJV,NIV,GNB)]한 지식임은 물론이지만,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으로서 가장 고상하시고 우아하시고 기품 있으시고 아름다우시고 수려하시고 등등 '한 사람'을 두고 상찬하고 기릴 수 있는 그 어떤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들어맞고 오히려 부족하기만 하신 그런 분이시기에 그러하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에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단편이 있다. 고향 집 인근 산머리의 바위 얼굴을 항상 멀찍이 쳐다보며 자란 한 소년이 그런 바위 얼굴과 같은 인품을 가진 인물을 그리워하며 나타나기를 기다리나 연로해지기까지도 그 얼굴[인품]만한 인물은 출현하지 않고, 그렇게 고대하던 그 바위 얼굴의 주인공은 결국 서서히 자기 얼굴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닮게 되어 있는 위치에 우리 각자는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8:29] 함과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알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서도 아니고 전연 그런 것은 없건만 오직 이 세상 신 약령 사단의 조종 아래 있는 인생들이고 가장 무엇보다도 인생들 자신에게 허물이 있어] 달에게 기도하고 사단이 세워놓은 우상 신에게 기원하지만 그래서 그런 애틋한 감정을 각종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번 대면하면 숨이 콱 막힐 듯한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 그런 유일한[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분이 바로 '사람' 예수 그리스도시다.
'나[我]라는 한 개인'의 존재를 구성함에서, 이 분이 그 양면성을 이루는 일면이 되어 계시다는 사실은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분의 '엄마로서의 품속에 있는 아기'가 우리 각자인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형상이시요 동시에 아들의 모습이시다. 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삶의 낙을 구하고, 그래서 자기 부인 곧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받음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수고가 달갑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아이가 그 부모를 닮아갈 때 효자이다. 이 세상의 실상을 성경을 통해 바로 깨달아 우리가 사단과의 전쟁 중에 있고 사단의 압제 아래 있고 영원 멸망을 앞 둔 구원 받을 사람들의 영혼의 처절한 절규[왜냐면 곧 영원 세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 될 것이므로]에 묻혀 있는 실상을 느낀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실상을 바로 "아버지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요 6:44,45].
이와 같이 배워 이 실상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고[:65] 나아왔더라도 그 물러간 많은 제자들처럼 떠나가게 되어 있고[:66] 아니면 마지막 심판 때까지도 이를 깨닫지 못하다가 급기야 멸망에 들어가는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되니[마 7:21/25:45] 이런 비극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이러한 나의 모든 순종 즉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고"[고후 5:1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게 하려는"[빌 1:20] 등의 모든 "내가 가진 의(義, "옳은 행실"-계 19:8)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빌 3:7]이다.
"더욱 힘써 믿음에 덕(德)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함"[벧후 1:5-7]으로써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며"[:10]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동참, 교제]을 알려 하는"[빌 3:10] 등의 일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빌 3:7] 곧 구원 얻기 위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으로써 맺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열매요 그 당연 결과이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7]이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율법으로 난 의" 또는 율법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못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을 목적하여[자기중심의] 의를 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의, 율법을 지킴[고전 9:21-"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 하나님의 계명 준수[고전 7:19]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데에서 난 것이므로 산 자로서의 '산 자의 법'을 지킴이다. 산 자로서의 법은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롬 14:7-9].
즉 오로지 '머리'이신 하나님을 위하고 '한 몸'을 이룬 내 형제들을 위함이다. 이는 영원한 삶이 법질서이다. 만일 여기서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머리도 나의 지체된 이웃도 위하지 않을 때 과연 그 생명체에 머물러 있겠는가. 당연히 퇴출(退出)될 것이 아닌가. 남이 나를 추방시키기 전에 내 자신 스스로 그 생명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행위가 범죄인 것이다. 생명 자체가 한 몸으로 사는 방법 외에는 없는데[그러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핵심이다] 저 잘났다고 자기 자신을 위하니 자기 스스로를 그 한 몸의 체제로부터 분리, 격리시킴이다.
때문에 이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라는 의미에서 성경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계명 준수를 독려하여 경고하는 것이다[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 왜냐면 불복종으로 끝내 고집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도 부적격으로 판정되어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마 7:21/25:45].
그래서 "항상 복종하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되"[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하였으니 이는 구원 얻은 자의 넘치는 기쁨이요 평안을 말함이다. 때문에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이미 얻었다 함에도 있지 않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에도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3:12] 데에 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감"[:13]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것과 같이 우리도 이와 같은 자세로 달음질하는 것이다"[고전 9:22-27].
왜냐면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 남아 있는 의미가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남은 일을 하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에 있고[요 20:21,22]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그 일을 함에 있으니[골 1:24] 즉 성령의 권능[power]을 받음으로써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됨"[행 1:9]에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한 것이다.
왜냐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에 있는 목적을 이루지 못함이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신 의미도 함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기기를[성공하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함과 같으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이 차이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고전 9:22-27].
바로 이런 것이 "온전히 이루었다"[빌 3:15] 하는 자들의 정상적인 자세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 되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땅의 일을 생각하는"[:19] 것이 되므로, 바울처럼 "눈물로써"[:9/행 20:31] 직언(直言)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결말은 "멸망"[빌 3:1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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