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21세기의 바울 사도 (5)ㅡ이병철 질문

Tayseek Kwon 2019. 4. 14. 06:26




★21세기의 바울 사도 (5)ㅡ이병철 질문



9.  ‘21세기 바울 형제'[Brother Paul of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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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율법


"주먹구구"라 하는 것은 진리에 터전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뜻이니, 진리는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확한 개념이다. 법칙 차원에서 살필 때 만유를 창조하신 조물주를 부정하고는 사랑 자체가 존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대로다. 더군다나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인간들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룩하신 구원일진대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이 어찌 화합하겠는가.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일 뿐이다. 진리를 믿든 안믿든 자유다. 결코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살후 2:10]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은 오히려 구원 얻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고 하신 그 "죄인"이라는 의미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시지 않는 이유는 의를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따르고 순종하는 것을 보기 원하시고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천국을 이루어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우리를 품속의 아기처럼 품으시는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사랑이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현재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렇게 별다르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우리가 오관(五官)으로[보고 들음과 같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과 같은 간섭이나 강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극소수이기는 하나 그런 남다른 체험을 하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찰즈 피니[Charles Finney]나 디 엘 무디[D. L. Moody]가 그와 같은 경우다. 그들은 한결같이 "파도처럼 덮쳐 오는 사랑의 물결[waves of lov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를 멈추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겠습니다" 했다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제한적으로 그와 같은 체험을 한 것은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명심하도록 하려 하심이라 할 수 있다. 즉 어찌 하든지 여하한 조건이나 환경에서라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모든 일을 행하기를 원하시고 어떤 경우에서든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일이 없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런 외부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일부러 그런 것을 나타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앎으로서 오직 "진리를 사랑하는"[:10] 것만이 모든 언행심사의 동기가 되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모든 필요한 자료나 정보나 증거는 이미 충분히 주신 터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을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것이다. 죽은 자임을 모르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해당되지를 않는데, 어찌 "세계 종교 통합 운운"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안에다 끌어들이려고 하는가. 자기 부인을 모르는 사랑, 자비, 인애(仁愛)를 부르짖는 것은 위선인 것이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칠 것이 아니라 오직 양심을 따라 이웃 생각하는 마음을 조용히 실천하면 오히려 그것이 아름답고 위선이라는 단죄를 면하는 길이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는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어 있는 것을[롬 6:19,20,22] 가리켜,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고"[7:4] "율법에서 벗어났다"[:6] 한 것을 두고 오해하여, 이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착각하는 이가 있다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고전 9:20],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21]라 한 것이다.


"율법 아래 있지 않으나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 함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율법과 그리스도 오신 후의 율법의 역할이 다름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이었으니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롬 7:7]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인생들을 "단죄(斷罪)하는 역할로서의 율법의 의미는 끝났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는 "살게 하는 율법"[갈 3:21]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설명의 요지는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므로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롬 6:14] 함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어 죄에게 굴복함으로써 죄를 짓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단죄하기만 하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어"[:14] 그러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8: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2] 아래 있기 때문이다[6:17,18].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율법, 계명은 원래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7:10] 것이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바울이 천명한 대로 "신령한"[:14] 것이고,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12]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음으로써 죄인 되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나이므로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던"[:10]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으로 인하여, 그와 같이 나를 죽은 자 또는 죄인으로 확인시켜 주었던 "율법에 대하여 나는 죽었고"[7:4] 그 "율법에서 벗어난"[:6]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죄에 얽매여 있지 않으니 즉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까닭에 얼마든지 죄를 다시는 지을 수가 없고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니 그 종착점이 영생인 것이다[6:19,22].


고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롬 7:25] 갈등 속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게 포로된 실상을 한탄하는[:24]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8:2]써 과거 "하나님의 법을 섬기던"[7:25] 나의 "속 사람[:22]을 무자비하게 얽어매어 오던 "죄의 법을 섬기던 육신"[:25] 곧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게"[고전 9:27] 되는 것이다.


반전(反轉)이 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이제 드디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8:2]. 이것이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함"[7:6]이다. "의문(儀文, written code)"이라 함은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날[days]과 달[months]과 해[years]와 절기[seasons]"[갈 4:10] 등을 말하는 것으로서 바울은 이로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까지 한꺼번에 쓸어 버려진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塗抹)하시고 제하여 버리시어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골 2:14]는 것이 이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a feast day]나 월삭[a new moon]이나 안식일[sabbaths(NKJV), a Sabbath day(NIV), the sabbath days(KJV)]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그리스도께서 그 실체로서 오심을 가리킴]의 그림자"[골 2:16,17]라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로마서 7장 24절을 전후한 "육신"에 대한 설명을 당치도 않게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이라 착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진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말한 이 구절에도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독해력이야말로 실로 한심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창 바울은 열띤 어조로 이상 설명한 대로의 율법 아래에서의 "육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설명 중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진저!" 하는 간투사(間投詞)가 중간에 튀어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극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에서 제1칭으로서의 "나"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야 이런 경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것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어린 아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전후 문맥을 따져도 넉넉히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것과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거이다. 즉 후자로 말미암아 전자로부터 우리가 완전 해방되어 있는 것을 밝힘이다. 그 차이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분간 못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자기 부인"을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부터 배제한 탓 외에 달리 이유가 있을 수 없다. 핵심 부분을 빼어 버리니 온통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령하고"[:14]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12] 하나님의 율법 곧 계명은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있음과 부합하게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니 곧 "새 계명"[요 13:34]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하는 것이다. "새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사랑이다. 이를 성경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도 하고 있다. 또는 "최고의 법"[2:8]이라고도 한다. "자유의 율법"[:12]이라고도 한다. 왜냐면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이 사랑의 법칙은 아담 당시부터 내려오는 삶의 최고 법질서를 따름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법이라고 강조하는 뜻은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생활 규율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 평등은 이러한 한 몸 구조에서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역시 "사랑하라"는 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다"[마 22:37-40] 하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그렇게 해 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7:12]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으니"[갈 5:14]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 한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9,10] 하였다.


그러므로 "신령하고"[7:14]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12] 하나님의 율법 곧 계명은 처음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7:10] 것이므로 이 "율법의 요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롬 8:4]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우리가 육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7:24]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었으니 그래서 이를 가리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다"[8:3]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단죄]함이 없다는 것은[8:1]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2] 때문이니,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하여 "육신" 곧 "죄의 몸이 멸해진[to be destroyed]"[6:6] 까닭이다. 즉 우리 육신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이루지 못했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이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이제 다시는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8:4]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산 자가 이 생명의 법칙 다시 말해 사는 도리대로 행하여 이를 따르고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영생을 유지 존속하게 하는 것을 말함인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다시 이 "육신"[7:14-25]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8:5-13]. 요점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7]는 데에 있음이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써 더 다시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따라 행하니 우리는 능히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어"[:4]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게 되고"[:7] 넉넉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을 따를 때에는 육신의 일을 생각했으나 이제는 육신이 멸하였으므로[6:6] 성령을 따르는 자로서 성령의 일을 생각하게 된 까닭이다[8:5].


곧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한 대로 성령으로 능히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막 8:33] 하신 대로, 하나님은 사랑의 일을 생각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를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롬 8:13] 것이니 얼마든지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9:27]. 왜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고 함께 살아나 있어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있는[고전 6:17] 현재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 의도하신 바대로 되어진 정상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상 복구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나 영[성령 안에 있는]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를 가리켜,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니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고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니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롬 8:9,10]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내가 몸과 머리로서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머리로서 당하신 고난에 몸[의 각 지체]도 당연히 동참함이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골 1:24]은 필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자(小子)들[children]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18]을 엄정히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도 할 수 없음"[:18]을 밝히고 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임"[:11]을 확언하고 있다. 


앞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조금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러면 혼자 몸이 아니고 아내/남편이 있는 몸으로서 외간 남자나 여자를 보는 간음 행위는 마땅히 처벌 대상이지만 혼자 살면서 서로 좋아 한다고 해서 행하는 음행, 음란한 행위는 어떤가 할 것이다. "최소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뜻이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것이다.


가장 일차적으로 우리의 상대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우리의 영이든 몸이든 그 무엇이든 나 자신의 것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것이니 그래서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며 주님은 몸을 위하시는"[고전 6:13] 것이다.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기 때문에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서로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로 이 하나됨에서 한다. "하나님은 주님을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다시 살리시게"[:14] 되어 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함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마 19:5,6-하나님의 아들께서 창조하셨고 이는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가리킴] 하신 말씀은,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창녀[harlot]라 할지라도 그렇게 창녀와 관계하는 남자만은 그 창녀와 합하여 한 몸이 됨[고전 6:16]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15] 함과 같다.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17]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으니 내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돌리지 못한다. 이는 아내 남편이 둘이 한 몸이 되어 있으므로 어느 쪽이든 자기 몸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돌릴 수 없음과 똑같은 이치다. 왜냐면 남자의 몸은 아내의 것, 여자의 몸은 남편의 것이기 때문이다[7:4].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6:18] 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9,20] 하였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안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므로 너희도 그러하다"[3:16,17]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돈[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하시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하심과 같이, 둘 다 사랑할 수는 없고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눈 밖에 벗어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든 양자택일일 뿐이니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다. 


단순히 영생을 욕심 내지 말고 어느 쪽이든 자기가 사랑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여기서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이 갈라져 나오는 법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게 된다[고후 5:15]. 불의를 좋아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이다[살후 2:10,1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단지 영생이나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뜻에서다.


왜냐면 영생이라고 하여 단독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고 그 핵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으면 생명도 없다. 사랑하지 않고 영생만 누리는 그런 것은 아예 이 하나님 지으신 세계에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없는 것을 왜 취하려 하는가. 바람 잡고 안개 움켜쥐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사랑으로 하나되어 하나,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 영생의 구조다. 그 구조 자체가 그러하므로 사랑을 떠나서는 영생은 감히 상상도 하지 말 것이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영생이다. 그래서 의를 사랑하여 의를 행하고 선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에 들어가고[롬 2:7-10] 자기중심으로 나감으로써[selfish, self-seeking, “당을 짓는다”는 우리말은 오역-2:8] 악을 행하는 경우 멸망밖에 없음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믿음의 본질이 바로 이런 사랑에서 나오는 복종 곧 선을 행함이니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중심하는 데에서 모든 악과 범죄가 자행되고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서 모든 선과 의가 나오는 것이야 일반 세상 사람도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단지 그렇게 행할 능력이 없어 말만 하고 행함이 없을 뿐이다. 때문에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올 때 그렇게 따라오는 명확한 이유 또는 동기가 마땅히 어떤 것이어야 함을 엄격히 일러 주신 것이다[눅 14:]. 즉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눅 14:25-27] 하신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처음 믿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됨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상과 같은 말씀을 따라 단단히 그런 각오로 믿음에 임해야 하는 것이지, 단지 영생을 소위 "공짜로" 얻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을 경계하심이니, 우리 역시 믿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 알갱이 없는 빈 껍데기만 수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고를 미리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이 되고 속임수가 됨을 명심할 일이다. 이런 거짓된 태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리 없다.


이 사실을 다시 친절히 풀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써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눅 14:28-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 버려진다"[:35] 하심과 같이 위장해서도 가장해서도 안되고 얼버무려도 안되고 두루뭉수리로 해도 안되고 처음부터 색깔을 분명히 하고 무엇이든 시작하면 하고 말면 말아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것은 입에서 토하여 내침"[계 3:15,16]을 당하는 것 외에 돌아오는 것은 없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탈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골 2:22]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막 7:6,7] 하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로 따르지 않고 살려고 하지 않고 사람이 만든 교리, 해석 그런 데에다 관심을 두고 있으니 어찌 진리에 이를 수 있으리요. 과거 아무개 누구누구라고 하는 소위 "이름 난" 이들의 성경 해석[신학적 소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니 제대로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주 남남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처음 믿을 때에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끝까지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친 상태를 나 자신이 유지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어느 때든지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 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히 3:12] 수 있으므로 시험 무대로서의 이 세상이 끝나기까지는 시험하는 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받게 되어 있는지라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구원의 양면성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 둘이 하나되는 관계로서의 생명의 법칙을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즉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기쁘게 아니하시고[롬 15:3]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어 나의 구원을 이루셨으니 이제 나 역시 그리스도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며[고후 5:9]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며[:15] 그래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즉 위함으로써 그들로 구원 얻게 하려 함인 것이다[고전 10:33].


이렇게 양쪽이 동시성으로 움직여야 우리 구원도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생명도 아니고 옛 사람도 아니고 옛 계명[그림자의 의미로서의 모세 율법이 핵심을 이루던]도 아니니 새 생명, 새 사람, 새 계명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됨이 우리 구원이다. 이는 다시 "새 땅과 새 하늘"[벧후 3:13]로 연이어져 마침내 종결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계명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15:10,12].


이는 당연하니 계명이 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율법, 계명인 것이다. 그 중의 단 하나도 우리 각자를 위하지 않음이 없다. 앞에서 ‘생명의 시작’과 ‘복종의 시작’이라 했지만 바꾸어 말하면 ‘살았기[생명]’ 때문에 ‘산 자로서의 활동[복종]’을 함은 당연하다. 그 복종의 요체가 고난 받음에 있으니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히 5:8,9], 산 자로서의 마땅한 일은 아직도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에 아들들로서의 동참 즉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6:1].


이 "동시성"이라는 것을 별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세상에 사람이 태어날 때 저절로 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 연유되어 세상에 나는 것이니 엄마 젖꼭지를 물고 눈을 뜨자마자 엄마의 얼굴을 대하게 되어 있는 바로 그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바로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나자마자 그의 상대는 그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 인(因)하여 그 결과로 그가 생긴 것이다. 아기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아니, 당연히 저절로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인과(因果) 관계로 난 것이다.


따라서 영구적으로 하나님은 그 만드신 피조물 인간을 위하시게 되어 있고 우리는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 영원히 하나님 시키는 대로 그 뜻을 따르고 복종하니 하나님만을 위하게 되어 있는[자기를 위할 필요가 있어 위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러운 결과요 흐름이므로 그래서 순리를 따름이다. 육체로 된 엄마 아기 관계는 그 아기가 엄마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지만 어른이 되기 전에도 독립성을 지닌 하나의 엄연한 인격성을 형성하는 것이 정상이고 또한 목적이므로 일정 기간 엄마의 보살핌이 끝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항구적인 것이니 영원히 엄마 품속의 아기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젊음으로서의 생명이신 하나님이시므로 항상 우리 모든 피조물들을 위하시는 위치는 항구불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격성의 특징으로서의 자주 독립성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이것이 바로 동시성의 의미인 것이다. 무슨 특별한 별다른 의미가 아니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니, 마치 처음부터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동시성의 의미인 것이다.


무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하시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잘 위하시기 때문에[우리보다 먼저 계시고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실상 우리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위하지 않는 사유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움직일 때는 아기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오직 그 엄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어 시키시는 모든 것을 따르고 순종함으로써 움직이게 됨이니 무조건이 아니나 무조건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가 당신께 순종한다는 거기에 있지 않고 본원적인 목적은, 머리되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피조물 즉 우리로 말하면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가 하나님 위하듯이 하나님 위하는 차원에서 위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뿐이다.


오직 우리가 언제나 유념해야 하는 것은, 종속적인 의미로 즉 하라고 하니까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사랑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한 몸의 이치에서 만유가 나의 것이니까[한 몸에서는 아무리 가장 낮은 자라도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자기를 위해 주는 자기 것이 되어 있다] 내 스스로 주인으로서 처신하는 주인 의식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선언하시기를,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눅 22:27] 하신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되시어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이제까지의 "상식"대로 판단하여 또는 그리스도 친히 짐짓 그렇게 하시는[제자들의 마음을 떠보시는 양] 것으로 오해하여 "절대로 제 발은 씻기시지 못합니다" 했을 때,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신 것이다[요 13:8]. 왜냐면 말씀 그대로 이것이 "냉혹하고[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엄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따르시고 진리대로 하시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엄중한 현실인 것이다. 이 현실을 따르지 않는 누구든지 '생명의 현실'로부터도 제외될 것이다.


우리의 고난 받음은,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가 현재 "죽은 자"로서의 형태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으로써 확증된다.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서의 이 육체는 영생에 비하면 한시적이고 불확실성에 놓여 있으므로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니, 고통은 죽음의 영역으로서 고난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육체인 것이다. 물론 신령한 몸이라 해서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용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러하고 장차 들어가게 될 영원한 불 못이 그러하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인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 했으니[롬 8:22] 머리되시는 하나님 친히 고통 중에 계시므로 천사들이 예외일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나 여하간에 고난 중에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령한 몸으로 당하는 것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당하는 것이 본질상 같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었다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고난만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런 고난을 통한 인생들의 시험 무대로 등장해 있다. 시험은 원래 생명 안에 있어 산 자에게만 가해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격을 말한다. 죽은 자는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중에 놓여 있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노예가 되어 움직이므로 '시험하고, 말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이 영원히 살기로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환경이므로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히 2:15] 양상인지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는 까닭에 자기중심 일변도로 나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인에게는 함정과 덫, 올무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세상에서 악인이 전반적으로 형통하게 되는 까닭이라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구원 받아 "새 생명"[롬 6:4]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 가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와 같이 위협과 회유가 동시에 녹여져 있다[눅 4:7]. 물론 이러한 '죽음의 고난'이라는 환경 자체가 시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만이 있는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범죄한 것이다. 따라서 '고난'이 범죄를 유발하는 유일한 동인(動因)이라는 뜻은 아니고 시험의 한 수단이 된다는 의미만은 불변인 것이다. 이런 것이 이 세상의 실태이고 실상이다.


그 존립의 진정한 의미라고도 할 수 있으니, 곧 인생의 ‘구원’과 동시에 선과 악에 따른 인생의 '선별 작업'이다. 구원을 받은 자들을 상대로 하는 선별 작업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것으로[요 3:18] 감안할 때 인류 전체가 이 분류 작업 아래 놓여 있어 그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으로 이 세상을 인식하면 된다. 천사[영물]들은 이미 그 작업이 완료되어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들로 영원히 양분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인생들을 상대로 하는 그런 선별 작업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범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게 되면 당연히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구조이니 이런 세상에서 일부러 고난을 받자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빠진 사람 건지기 위해서는 물 속으로, 불 속에 있는 이들 구출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불 속으로 뛰어 듦과 같은 필연적인 것이다.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해야 역시 그들을 산 자로 만들 수 있음이다.


시험은 우리의 사랑의 진위(眞僞) 여부를 가려내는 역할도 한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상적인 원래 의미로서의 사랑이니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떠한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왜냐면 모두가 이기적이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의 그 어떤 선도 선이 아니고 단지 위선인 것과 같은 이치다. 자기가 죽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진정한 자기 부인에서만 참으로 사랑을 위한 사랑, 선이 좋아서 행하는 선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선 곧 사랑을 원하시므로 우리를 구원부터 먼저 해놓으시어 일절 우리 자신의 구원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도록"[고후 5:15] 완벽한 조처를 취하신 다음에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선을 행하느냐 여부를 살피시고 그런 자유로운 선택을 따라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신 것이다. 이미 영물들은 그런 과정 다시 말해 선별 작업을 거쳤고, 최초의 사람 아담 역시 그런 선례를 따라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과로 죽음이 임함으로써,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부동하게 세워진 바다.


진정으로 사랑의 법[둘이 하나되는]을 사랑해서 사랑을 행하느냐 즉 그 근원이 되시는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선을 행함이냐, 그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다시 강조하지만 이 세상만한 좋은 시험(試驗)의 여건도 없다. 영원 세월을 통해 이런 시험 기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따라서 시험을 논하는 것은 지금 이 때뿐이므로 여러 모로 살펴 필연적으로 이 세상은 고난일 수밖에 없다. 이 필연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간 되어진 일들[인간의 범죄 등]이 그와 같이 조화를 이루도록 전화위복되게 조정, 조절하시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니 곧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동시에 최고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현재의 이러한 육체라는 질그릇에 담아 있는[고후 4:7] 나의 구원 받은 실상이 이러한 모든 시험을 이기게 하고[고전 10:13]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로서의 나의 소임을 충실히 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내가 모시고 있는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한 것이다.


"내 앞에", "내 우편에" 등 위치까지 분명히 밝힘은 이와 같은 사실이 구체성이 없고 현실과 동떨어져 막연한 어떤 추상적인 것을 말함이 아니라 현실 중의 현실로서 사람인 '나'와 사람이신 '그리스도'와의 일 대 일의 사귐, 교제, 교류를 말함인 것이다.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고 남녀 한 몸이 되어 함께 삶과 같고 어버이를 모신 자식과 같은 것이니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사랑 안의 불가분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며 육체는 희망에 거한다"[:26] 했으니 우리가 진실로 그러하다. 사랑의 기쁨이요 사랑의 노래가 항상 내 입에서 떠나지 않으니 주님을 찬미, 찬송함이다. 또한 확실한 장래를 내다보는 희망에 부풀고 겨운 마음의 즐거움은 참으로 육체에 보약이요 양약(良藥)이다[잠 17: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매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면 이것이 네 몸에 양약[good medicine]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할 것이다"[3:5-8] 함과 같다.


그리고 이는 또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행 2:27]이라는 확실한 보증 또는 보장이 되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윗이 예언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할 것이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님의 거룩한 이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다"[시 16:8-10] 한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이" 곧 그리스도를 그 육체가 썩지 않게 하시고 3일만에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나 역시 그와 같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 됨이다. 그리고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함으로써 이 둘이 하나됨의 관계로 나타나는 동시성에서 내가 그 움직임의 주체가 되어 있음을 밝힌 반면,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베드로는 이를 정확하게 주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움직이심을 밝혀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으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뵙는다"[행 2:25] 한 것이다.


그런즉 성령께서는 두 가지로 말씀하신 것이 되었으니 이 사랑으로 하나됨의 엄밀한 양면성 즉 동시성의 교훈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윗의 예언에서는 어디까지나 내가 믿어야 그래서 순종해야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가리키신 것이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관계가 그리스도 친히 먼저 본을 보이시어 시동(始動)을 거심으로 본격적으로 가동(稼動)되고 있음을 선언하시는 의미이다.


따라서 내가 장차 부활하게 되는 것은 이 관계의 원활한 움직임 곧 쉴 새 없는 주고 받음 또는 물이 계속 흘러오고 계속 흘러가는 유통(流通)의 결과인즉 내 만일 이 흐름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면[마 24:13/히 3:6,14] 더 이상 이런 복된 관계[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를 이루어 있는]가 유지되어 있지 않으므로 나는 부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흐름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을 흘러 보내 나를 비움 즉 자기 부인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함이다.


자기를 위해 쌓기만 한다는 것이니 자기를 중심한다는 뜻이니 이는 고인 물이요 썩어가는 물이고 그래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은 물로서의 사해[Dead Sea]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 곧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킴-요 13:34/고전 9:21]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 역시 상징적으로 우리와 똑같이 복음을 받고 믿은 자들이나 결과론적으로 말할 때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으로써[고전 10:5] 가나안[천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릿발 같은 경고를 내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성령이 이르시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조상들이[고린도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이므로 믿음으로 된 조상들을 말함이니 이는 다시 말해 믿고 구원에 들어갔으나 탈락되는 사례인즉 엄중 경고가 된다-고전 12:2]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하셨으니, 형제들이여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확실"은 오역]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였느냐,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민 14:29/고전 10:5].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쇠사슬을 끊고 자유인이 되었다는 뜻이요, 가나안 행군 도중에 광야에서 시체로 변했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빌 3:18,19)당한 것을 말함이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시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처음에는 믿었으나 즉 읻었기 때문에 이집트에 있을 때 모세가 명령한 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 등에 바름으로써 당시는 사망[장자들의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광야 길을 통과하면서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딤후 4:7].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니["두려워하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다. 저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이로써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성령께서는 "광야 교회"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행 7:38]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다"[히 3:7-4:2/신 33:8].


다시 말해 그들이 멸망한 것은, 우리로 말하면 처음 믿음을 지키지 않고 처음부터 들은 바 명령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 곧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자기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그 들은 바 말씀이 저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명백한 성경의 경고임에도 이를 무시하여 오늘날 강단에서 이를 가르치지도 않고 강조하여 경고하지도 않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으니 어찌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를 개탄하지 않으리요.


그러므로 북한 땅의 그 형제는 무엇인데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본이 되어 있었고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 것인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똑같은 은혜에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랑이다. 동일한 은혜를 받고도 하나는 결과가 그 형제와 같이 나오고 우리는 그와 달라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순종은 고난을 통해 배운다[히 5:8,9]. 따라서 고난을 겪음이 없다면 아직도 순종을 모르는 처지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 하는 것이다. 실상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다[:15].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처방(處方)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너를 권하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하신다. "불로 연단하는" 것과 "희어졌다"는 등의 표현은 고난 받음을 말함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19]. "주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회초리를 드심이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는 것이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심이다...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한다"[히 12:5-13] 함과 같다.


이상 경고는[:5-7]는 솔로몬의 잠언을 인용한 것이다[잠 3:11,12]. 이 자체가 심각한 경고다. 하나님의 지혜를 솔로몬에게 주셨으나 그래서 이런 잠언이나 전도서를 기록하게 되어 성경의 하나로 인정 받고 있으나 정작 솔로몬 자신은 어떠했던가. 그의 처첩들로 하여금 이방신들을 섬기게 하여 우상을 만들어 주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으니 성경은 이 사실만 나타내고 그가 회개했다는 언급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이 멸망했다느니 멸망하지 않았다느니 등의 입씨름을 할 여유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표준으로 하면 이 경우 멸망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그가 그토록 강조한 "지혜"[:13-15]를 버리고 지혜와는 정반대의 짓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심각한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는 경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솔로몬의 예를 들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 이미 성경은 그와 같은 광야 교회의 예로써 오늘 우리에게 충분히 경고하고 있음이다. 솔로몬은 그 구체적인 예 중의 하나로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계 3:20,21]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광야 교회에 닥친 모든 역경은 이 하나님의 징계의 의미도 동시에 됨을 성경은 명백히 히고 있다[신 8:5].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마땅히 처신할 것인가. 앞에서 그리스도 친히 우리 앞에 그리고 옆에 위치해 계심을 역설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상관하게 되는 여러 사람 중의 하나로써 그리스도를 인식하라는 것이 아니니 유일하게 오직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임을 강조하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라면 머리가 하나뿐이지 그 이상이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계 하나가 흐트러지면 모든 것이 모든 관계가 흐트러진다.


그러므로 전심전력으로 이 관계를 정상대로 유지하기를 우리는 모름지기 "힘써야"[히 12:28/고전 7:32,34/고후 5:9-11/롬 12:2/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은 무슨 계약 관계로 되어 있는 것처럼 그런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니, 오직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섬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모시지 않으면 형벌이 닥칠까 해서도 아니요 영생을 잃을까 싶어서도 아니요 그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주님을 그렇게 앞에 모시고 그 계명을 지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삶의 낙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모세 율법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을 인하여 그들을 내치신"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당시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어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억지로 섬기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게 되어 있는 것은 변함없이 강조된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가시적(可視的)인 축복을 풍성히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이 자기 부인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뜻이 여기에 있음이다. 자기 부인이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야[고후 5:15] 그것이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데에는 사랑은 없다. 이기주의 곧 자기중심만이 있을 뿐이다. 애초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바로 그런 뜻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서로 사랑 가운데 모두가 차별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정하셨던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깝기로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이상은 없으니 왜냐면 그리스도 홀로 내 안에 그 영으로 계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영으로 오시되 실질적으로 육체로 오시어 계시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이루실 수 있는 유일무이의 사람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본 자세는 항상 베드로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바다 위로 걸어가던 바로 그런 모양새가 되어 있음이다[마 14:29].


이것이 정상이고 이렇지 못할 때 비정상이 된다. 즉 주변의 파도나 바람을 보고 금방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냐면 우리의 삶 자체가 믿음이 아니면 영구 불능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바다 위로 걸어가는 걸음걸이인 것이다. 믿음 아닌 자연법칙으로는 절대로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없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살아나 있는 우리의 다시 출생함, 새로 창조됨이 바로 그러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얼마든지 다니엘처럼 사나 굴에도 들어갈 수 있으니 왜냐면 거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음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풀무 불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자신이 머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는 성경의 지적처럼 과거 믿음 안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믿음의 걸음걸이를 다져 나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걸음씩 믿음의 단계를 따라 진행해 나간 좋은 표본이다. 믿음을 따라 아무 방향도 목적도 정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 따라 나갔고 거기서 더 진전하여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또 거기서 일보 전진하여 이삭을 믿음으로 바치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으로써, 성경의 모든 사실을 내게 관련된 것으로 즉 나의 직접 체험으로 삼을 수 있으니, 무릇 삼을 수 있는 자는 그렇게 함이 능히 가능한 것이다. 다니엘의 경험도 나의 과거 체험으로 삼을 수 있고 아브라함이 일도 나 자신이 그렇게 겪은 것으로 수용할 수 있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고 거기에 자신을 대입(代入)시켜 자기가 지금 그 때 당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혹은 현재 그렇게 예수님 앞에 있다고 믿어 "만병의 의사" 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 각종 기도 응답과 병 고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필자의 모친이 그러하셨다.


그러므로 항상 핵심은 사랑임을 마음에 각인시켜 두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에서 믿음이 나고 믿음이 사랑을 낸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사랑의 상대이시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는 그 어떤 무슨 수로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중심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 없는 것이다. 구원을 목표로 해서도 나아갈 수 없고 기타 어떤 목적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


죄 용서 받음과 사랑함을 직결시켜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눅 7:47]. 다른 그 어떤 무엇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구원부터 이루신 사실이 이를 나타낸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함과 같다[요일 4:19].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원히 사랑으로 진행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자기 부인이 핵심일 수밖에 없다. 자기중심 곧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일절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현실적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내 스스로 이겨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하여 나를 위해 이겨 주는 법은 없다. 많은 이들의 착각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겨 주시는 일이 없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기심을 토대로 그리고 그 이기신 힘을 의지하여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니,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기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능력[힘]이 없으면 내가 싸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싸우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이 아무 효용(效用)이 없다. 이기기 위해 내가 직접 앞에 나아가 싸우는 것은 나의 몫이지 주님의 몫이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의 여호수아처럼 주님 친히 나의 왼발 또는 오른발이 되어 주심으로써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네가 한 쪽 발(양쪽 발이 아닌)로 딛고 있는 땅이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 하셨기 때문이다[수 5:15-"Take your sandal off your foot(feet가 아님)"(KJV)]. 이는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나의 것이나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것임을 밝힘이다.


주님께서 우리 앞장 서시는 것도 이렇게 우리 자신 믿음으로 직접 앞다투어 나가는 경우에만 한정된다. 만일 내가 이와 같이 하여 스스로 싸우지 아니할 때 주님께서는 내게 회초리를 드시는 모습이 되실 수밖에 없다. 이는 강제도 아니고 간섭도 아니니 이런 회초리를 드심으로써 징계가 가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 한하기 때문이다. 순종하려는 태세는 있으나 미흡할 경우이다.


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다"[히 12:14]. 천국에는 아들들만 있지 "사생자"[:8]는 없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위치에 있는 한 이런 징계도 무익한 것이니 왜냐면 그 경우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내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으나 판단이 미숙하고 또는 성장 과정이 늦어 열심을 내지 않을 때에만 한해서 그와 같이 회초리를 드시는 것이다.


§  처음 믿을 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면 놀라기부터 먼저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마 19:25] 하고 낙심부터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려면 먼저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신 것이다[요 6:45]. 모세 율법이 먼저 있어야 했던 이유 즉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리부터 교육을 시켜야 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한 마디로 설명하여,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비참한 인생이이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하는 탄식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탄식이라고 굳이 고집하는 이가 있다면, 그리스도 이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의 심령의 탄식이라고 제대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것이 모세 율법의 존속의 유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니까 더 이상 그런 비참한 상태는 지속되지 않고 완전 종료된 것이다[8:2].


그러므로 오늘날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역할을 하지 아니하나 그 근본 취지만은 여전히 유효하니 하나님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제자가 "이 말씀을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는가"[요 6:60] 하고 당장 물러갈 태세일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말이 나오는 대신 베드로처럼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할 수 있을 정도로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양자 택일을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마땅히 명심해 두어야 할 '말씀 전달'의 확고한 지침이다. 그냥 영생하기를 소원하여 그리스도를 믿도록[실제는 이상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앞으로 절대로 나아올 수가 없지만] 유도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결실도 없다. 교회당에 나오는 것이 구원 얻는 것이 아니요 세례 받았다고 죄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하고 이 회개를 하는 데에 필수 조건이 이 세상이 그리고 인생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따라서 죽음밖에 없는 죽은 자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내가 죄인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으로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죽은 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은 자로서의 모습 그대로 즉 사형장에 나가는 사형수처럼 되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결의가 충분히 되어 있지 못하면 그 받는 세례가 회개의 세례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죄 용서가 되지 못하면 당연히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 이루어지지 않아 구원 받음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즉 복음을 믿으라 하기 전에 회개하도록 해야 하며[막 1:15] 회개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인생의 죽은 실상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것은 실상을 알도록 해 줌에 있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 전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먼저 알려야 하는 것과 그 다음 단계로 알려야 하는 것을 순서 있게 차례대로 정확하게 알도록 함이 말의 요점이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마 9:12]는 말씀은, 단순히 영생을 바라는 자를 의미하심은 아니니 영생을 원하지 않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든 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죽은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죽은 자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아무 뜻이 없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려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세운 불 뱀의 형상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하신 것은[요 3:14] 그 뱀이 죽음을 주는 것이므로 그 뱀의 죽음의 독을 풀면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경우 이 세상 자체가 죄요 죽음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 자체가 당시 광야에서의 불 뱀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을 설명하되, 우리를 영생하도록 만드시려고 죽으셨다["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무식한 말을 함으로써]는 말을 해서는 안되고["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우리말 번역은 잘못된 것], 성경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확증하신 의미로서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제까지 사람 사는 세상이라 착각하고 살아온 것은 심각한 오류임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죽음이라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닌가. "죽은 자"[마 8:22]들의 세상이니까 죽음의 세상인 것이다. "세상"이라 하면 인간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 동식물이 서식하는 이 자연계를 말함은 아닌 것이다. 이 자연계는 아담의 죽음을 인하여 저주는 받은 상태이나 그 자체가 죽음은 아닌 것이다. 죽음의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신(神)이요 다스리는 "왕[임금-요 12:31/14:30]"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사망의 세력["the power of death"]을 잡은 자"[히 2:14]라 하는 것이다.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인류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죽음과 죄의 세상으로서의 실상을 성경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런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가 있겠는가. 성경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수도 없으며[요일 2:15] 구원이 될 수도 없음[요 12:25]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인데도 일부러 시험해보기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든가 이 세상 살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아담]이 범죄한 결과로서 "죽은 자"가 이미 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그 결과로서 구조적으로 그런 체제가 되어 있으니 곧 자기중심의 세계요 역시 자기중심의 화신이라고도 할 만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철통 같이 관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즉 이 현실을 감히 외면하고 무시할 것인가.


"자기 부인"은 생명의 법칙의 핵심임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세상과 더불어 자기중심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사전에 막아 주는 방패 역할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은 이 세상의 죽음의 실상을 "생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죽음"으로 비쳐짐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이를 기피하려고만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고 사리에서 벗어나는 일도 아니다.


오직 관점 차이다. 이 세상을 죽음으로 보느냐, 생명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서 갈라진다. 이미 우리는 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지를 조목별로 상세히 검토해보았다. 고로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인 감성적 이끌림이지, 이성적 판단에 의한 사리 분석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이런 것을 가장 배격한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분명히 설정해 주신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보내신다"[요 20:21,22] 하셨기 때문이니 아들을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실 때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목적으로 보내신 것이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살라고 보내신 것은 아님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내심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라고[행 6:4] 보내심인데 이렇게 하여 복음 전달이 완료되면 이 세상을 종료시킨다[마 24:14] 하셨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고로 세상이 있는 목적은 사람 살도록 하심이 아니라 오직 복음 전도하여 사람들 구원해내는 것이요 오직 이 일이 시급하므로 이것이 끝나자마자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다 하시면 이런 줄로 알 것이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라 하셨으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달리 의미를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불복종으로만 흐를 뿐이다.


세상은 에덴낙원 당시의 선악과 역할이다. 왜냐면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라 여자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았을 때 성경이 "먹음 직하고 봄 직하고 지혜 있게 할만큼 탐스러웠다"고 했는데[창 3:6], 요한은 바로 이 표현대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육신의 정욕[먹음 직]과 안목의 정욕[봄 직]과 이생의 자랑[지혜 있게 함 직한 것]"[요일 2:16]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고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사는 이들은 에덴낙원에서의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평생 부지런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달하느라 세상에서 살려고 할 틈도 낼 수 없는 때에 그렇게 너나 없이 부지런히 노력하여 내일이라도 복음이 전달되면 전달되기가 바쁘게 세상은 종막을 내릴 것이니, 세상에 단 한 때나마 살아볼 틈도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는다는 결론이므로,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터에, 뜻이 아닌데도 억지로 살고자 한다면 뜻대로 따르지 않은 까닭에 첫 사람 아담의 범죄처럼 영원히 생명과는 이별이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하는 길을 소개함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행 17:30] 전달하는 것이니 즉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지시를 영원히 따르고 그 뜻을 행하기로 아주 확고하게 마음을 먹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결심이 서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한 다음에야 죄 용서가 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하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즉 거짓말을 할 때 즉결처분을 당하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으로 명백히 나타내신 터에 한번 그렇게 보여 주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계속 그렇게 하실 리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확고한 뜻을 나타냄이다. 그들 부부는 자기 재산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도 전부라고 하는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말이기는 마찬가지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믿어 주시고 죄 용서를 해 주시고 성령에 참예하게 하셨으나-히 6:4] 그렇게 약속 드린 대로 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초대 교회가 막 시작되고 동시에 극렬한 핍박이 일어나 교회 기둥 같이 여기는 12사도들 중에서도 세 기둥과 같은 야고보 사도가 세상 권력의 칼날에 쓰러지는 그런 상황인데도 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5:5,11]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무릇 성경을 읽는 자는 마땅히 깨닫고 마음에 아로새겨 두어야 하는 것이다. 즉 큰 기쁨과 동시에 크게 두려워함이다. 세상이 두려워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두려워했음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다시 말해 모든 정상적인 교회의 특징은 성령의 위로와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인 것이다[9:31].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래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영원한 구조다. 다시 말해 ‘선’과 ‘의’라는 것은 바로 이 법칙을 따라 '한 몸'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이 '한 몸' 의식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니 ‘하나’ 의식이니 하는 용어가 나온다. 여기에는 반드시 머리와 몸의 구분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그 지시를 따라 상부상조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이 나름대로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므로 이런 그림자로서의 형태에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므로 따라서 완전한 이상향적 세계 또는 삶 역시 불가능한 것은 불가피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모시어 문자 모두의 머리로 삼아 그래서 그 아래 모두가 그 한 몸의 지체들로 구성될 때 한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 그 어느 종교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독보적 가치다.


그러므로 첫째로 머리를 위하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을 위함이니 곧 자기와 함께 된 각 지체(肢體)에게 봉사(奉仕)함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 계명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심이다.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다[마 22:40]. 한 몸의 이치에서 이는 당연하다.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하기 전,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영원히 확립되어 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변함이 있을 수 없는 삶의 법칙인 것이다. 그들 범죄자들은 이를 어긴 것이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위의 설명대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것 자체가[머리를 포함해서]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내 이웃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 여러 수천 억을 헤아린다 해도 그 모두가 바로 나 자신, 그 개개인이 ‘또 하나의 나 자신의 모습’이니 이는 실로 필설로 형용 못할 자기 확장, 확대, 확충의 충만 그대로다. 여기서 비로소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진다. 즉 한 몸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더 바랄 수 없는 이상향의 구현이다.


말로만 "나는 너, 너는 나" 한다고 해서 이상과 같은 아름다움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세우신 이상 설명과 같은 삶의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지식이 양심을 통해 누구에게나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존 지식을 따라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뿐, 정작 그 방법에 가서는 이와 같이 성경에 밝히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아무도 알 턱이 없다.


불교는 이런 방법을 모르고 엉뚱한 말로만 얼버무리는 것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色] 즉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空] 실체(實體)는 없다’ 하니 곧 바람 잡는 소리다.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實體)는 없다'는 뜻이니 이는 양면성의 원리[대칭 원리 또는 짝의 원리]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형체가 있으면 실체가 있다는 증명인데 실체가 없다니, 이는 원인 없이 결과만 있다는 뜻이 되므로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말이 안되는데도 계속 고집하면 궤변이 되고 결국 미신이 된다.


이 "공"을 가리켜 마음이라 하는 어떤 이도 있다. 보이는 것[물체, 형체]과 보이지 않는 것[마음은 볼 수 없으니까]과의 구별로 나눈 모양인데 마음은 마음이고 육체는 육체이지 마음이 육체일 수 없다. 마음을 영혼의 영역이라 한다면 영혼과 육체를 "불가분으로서 하나"라 하면 말이 통해도, 이 둘을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일함'과 '불가분'은 전연 다르다. 그럼 사람만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동물이나 식물에도 이를 적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동식물이 사람처럼 영혼이 있다면 사람과 의당히 대화라도 나누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과 동물[자연계에 속한]은 현재로서는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원래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창조된 것이다.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도록 그렇게 애초 만드신 것이다. 그 증거로 인간은 피부가 매끄럽고 털북숭이가 아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동물들은 자연 현상으로 인한 기후 등 각종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털로 뒤덮여 있다. 인간[아담]은 신령한 몸이 되어 광채로 옷 입을 뿐 아니라 능력이 있어 자연계를 초월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영적 존재로서 영혼이 그 다음 단계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창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언어의 희롱’에 가까운 논법에 심취되어 그런 교리의 대표자로 추앙되고 있던 어떤 이는 죽을 때, "나는 많은 남녀를 속였고 지옥에 떨어진다, 운운"의 말을 했는데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그것 보란 듯이 죽을 때에야 바로 참회하는구나 착각해서 그 종교의 허구성을 일깨워 준답시고 그 종교 관계자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귀찮게 자꾸 보낸 적도 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그가 죽으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로서는 대통(大通)했다고 자랑스럽게 한 소리다.


즉 속여도 속인 것이 아니고 지옥에 떨어져도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논법을 따라 그것을 대담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자기야말로 더 이상 구도(求道)의 필요가 없는 완성된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라 해서 이를 암암리에 내비치기 위해 한 소리이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런 장문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래도 상식대로 말을 하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죽은 이는 상식마저 무시하고 인간의 언어 자체를 '도통했다는 자만심'에서 무참히 짓밟아 버렸으니 인간 자체를 모독한 셈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 하는 식대로 한다면, 도대체 세상에 인간의 말이란 것이 어떻게 제 구실을 하며 존재하겠는가. 가는 것도 오는 것이요 오는 것도 가는 것이다. 먹은 것도 먹지 않은 것이요 먹지 않은 것도 먹은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다. 짐승은 할 수가 없는 인간만이 사용하는 말인데, 이런 언어에 대한 불경(不敬)이 이렇듯이 자심하니 이는 인간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렇게 인간 공적(公敵)이 되면서 자기만은 열반에 들어가고 해탈해도 좋다는 것인가. 모두 한 면 즉 외곬으로만 흐르는 생각의 편향성이 빚어내는 웃음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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