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의 원리(3위1체 법칙)/반신불수 자연과학

자연과학자가 "초자연과학"에 입문하려면 성경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Tayseek Kwon 2019. 4. 10. 12:11







자연과학자가 "초자연과학"에 입문하려면 성경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현대인을 대표하는, 한 5,60대의 망상ㅡ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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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죽을 때 타인 눈으로 내 삶 돌아보게 돼…죄 많았다면 그게 지옥”



질문: 당신이 체험한 사후 세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인가.

답변:

응답 :“내가 경험한 사후 세계는 보편적인 것이다.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나의 설명을 성경, 쿠란, 베다 문헌, 혹은 기타 여러 종교 문헌에 적힌 천국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세계 곳곳의 독자로부터 내 책이 본인들의 종교가 설명하는 천국을 얼마나 완벽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감탄하는 e메일을 받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신(one God)’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 이 사람은 뇌과학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로서 “나는 평생을 뇌와 의식에 대해 연구했다. 공상이나 엉성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과학의 정직성과 깨끗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혼수상태와 임사체험을 통해 의식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우리가 목적 없는 화학반응으로 탄생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인 우주에 살고 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2012년 6월에 신경외과 의사 일을 그만두고 영적인 삶의 중요성에 관해 글을 쓰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 사람이 모르기는 여전하다. 

    위에서 "동일한 한 신(one God)"이라 말한 대목이 그러하다. 르니까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남을 판단하여 말하게 되고 대담무쌍해진다. 자연과학자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자연계만을 알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창조신도 부정하고 성경도 우스개라고 조롱했지만 정작 한 번이라도 비록 지금이라도 초자연계에 일단 접하게 되면 과거에 태산 같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바람 앞의 겨 같이 날아가 버리게 됨에 이르러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에 사로잡혀 적잖게 당황하게 된다. 

    이제는 이 사람의 말과 같이 자연계에서 초자연계로 넘어가는 시대다. 초자연계로 넘어가면 이제는 성경의 하나님을 알게 되느냐ㅡ그렇지 않다. 

    이 사람의 말처럼 "쿠란, 베다 문헌, 혹은 기타 여러 종교 문헌에 적힌 천국"과 성경의 천국은 모두 같다는 생각에 취해 있다. 하나님을 아무리 믿고 초자연계의 존재를 아무리 확신해도 영혼의 불멸을 아무리 의심치 않게 만들어도, 회개하는 죄인을 구속하시는 마지막 아담의 십자가 고난을 부정하는 데에서는 일보의 양보도 없는 것이 사탄의 모든 속임수의 특징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속임수에 붙잡혀 있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다. 하나됨, 한 몸됨에서 오는 더불어 함께 고난 받음을 본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닮고 그 본을 따르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음"(빌 1:29)을 결코 강조하지 않는 것이 사탄의 사이비 특징 중 하나이다. 
     
    이제 21세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초자연계 초능력을 강조하게 되는 때가 왔다. 다시 말해 모두가 이제는 갑자기 유신론자가 되는 시대다. 과거 한 때에는 무신론자가 자기 세상인 것처럼 여겼었다. 이렇게 시대가 갑자기 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사탄의 농락과 조종에 의해서다. 사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 사탄에게 매여 있는 모든 자의 특성인 까닭이다. 
     
    만물이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양면으로 처음부터 창조되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창조물의 최고 절정인 인간이 초자연계의 영역을 벗어나 있을 리 없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인간이 하나님이 대리자로서 그 지으신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연계로만 국한된 비극적 삶은 범죄 때문인 것이다. 범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 이 자연계 몸의 상황이므로 우리의 이 죄의 대가인 죽음에 동참하신 '선(先)고난 후(後)영광'이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특징이다. 절대로 영광이 먼저 올 리 만무하다. 사탄이 강조하는 오늘날의 초자연계(창조신을 가장하는) 초능력의 특징은 이 '선'고난을 생략하는데 있다. 이것이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하는 척도다.
     
    세상의 그 어느 종교도 그리스도의 이 속죄(贖罪)를 모방하지 못한다. 거짓은 먼저 영광을 앞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온 세상 사람이 즐거워하고 환영을 하는 까닭이다. 고난을 먼저 말하고 강조하다가는 이미 믿고 있는 사람도 결국 물 새듯이 다 빠져 나가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구름 같이 따라 다니던 많은 제자가 이 고난의 필연성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썰물처럼 빠져 나간 것이 그 때문이다(요 6:65). 고로 초자연계의 초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3위1체 원리의 둘(갑과 을)이 하나(병)되는 이치를 아는 것이 필수이다. 이 하나됨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고난 받으셨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따라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of of Heaven)"라는 책을 썼지만 이 이상 가는 내용의 책도 나올 수 있다. 아니 이 이상 가는 내용의 소위 "과학적 증명"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인류가 원하는 '그 증명'이 아닌 것이다. 그 증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다. 이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소리 여러 소리들을 하는 것이지 그 증거는 바로 우리 코 앞에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 이상 가는 증거는 없다.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로서 나온 3운법칙도 3위1체의 원리도 모두 성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미 증거가 되어 있으니 새삼스럽게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나와 있는데도 새로이 나왔다고 선전할 때에는 틀림없이 속임수이고 가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제대로 보는 안목이 절실한 지금 이 시대이다.
     
    따라서 죽은 자가 아무리 부활하여 다시 살면서 증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이미 모세의 말을 믿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무슨 수로도              믿지 않게 되어 있음을 밝히신 바와 같이(눅 16:31), '성경 말씀'이라는 최대, 최후, 최고의 증언과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이 있음을 알았다, 보았다" 해도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에 그칠 뿐 아니라 사탄의 조종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늘날 시대는 그와 같은 새삼스럽게 "보았다, 들었다, 갔다 왔다"가 난동을 부리는 때다.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가 주는 경고와 결코 혼동하지 말 것이다.


이 글에서 인용된 대목의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20283555?cloc=joongang|home|topnews1

[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죽을 때 타인 눈으로 내 삶 돌아보게 돼…죄 많았다면 그게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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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소개했지만 뇌과학자로서 신경외과 전문의였던 한 50대가 60을 넘긴 지금은 신경외과의로서의 그 전문직을 버리고 영적인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혼수상태와 임사체험을 통해...우리가 목적 없는 화학반응으로 탄생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인 우주에 살고 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뇌와 의식에 대해 연구했다. 공상이나 엉성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과학의 정직성과 깨끗함을 좋아했다", "모든 문화권에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혼이 보고한 영적 경험에 대한 압도적인 실증 데이터는 현대 과학에 최대의 도전이 되고 있다. 진정으로 열린 마음을 가진 회의론자라면 자연히 거짓된 물질주의 패러다임(물질만이 존재하며 뇌의 물질적 작용이 의식을 창조한다는)을 거부하고 더 큰 영적인 풍요를 지닌 견해를 포용할 것이라고 본다”고 그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영혼의 작용이 아닌 "두뇌가 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과학계 상식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 주장에 여전히 매료된 이들에게 나는 두 가지 현상을 이야기한다. 우선 치매 노인들이 임종 직전에 순간적으로 놀라운 인지나 통찰력을 되찾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서번트 증후군’(일종의 뇌 손상을 입은 이들이 탁월한 계산능력이나 완벽한 기억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화된 뇌 신경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갈수록 늘어나는 임사체험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의 진보는 원거리 투시나 텔레파시 등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과학'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또 말하기를, "임사체험 후 우주에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서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살아갈 이유가 있어 이 땅에 온 존재란 걸 깨달았다. 당신의 영혼이 계속 살 것이라 믿으면 천국(天國)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나의 큰 변화 중 하나는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참을성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神)과 하나가 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길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모든 면에서 사랑(love), 연민(compassion), 용서(forgiveness), 용인(acceptance)과 자비(mercy)로 대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성경에서 그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악한 자"가 사랑을 얼마든지 강조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로서의 삶의 법도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와서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온 세상을 속이게 된 이상 가능한 모든 수단 방법을 활용함에 인색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으니 적 그리스도는 <함께 하는 영광>을 말할 수는 있어도 <함께 하는 고난>으로서의 본질은 절대 말못한다는 이것이다. 자아중심은 사랑과는 물과 기름 사이다. 다시 말해 말만의 "사랑"이지 그 본질은 자아중심인 것이다. 양자 중 이미 하나(
자아중심)를 택했으니 그 선택한 방향대로 가는 것이지 달리 반응이 나타날 리가 없다. 사랑은 '고난도 함께 함'에서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다.  


"공상이나 엉성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과학의 정직성과 깨끗함을 좋아했다" 했는데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법칙이니까 정직하고 산뜻 명료한 것이지 달리 나타날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망상, 또는 작위적인 일체의 요소가 일절 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라는 것이다. 거짓이 없을 때 그것이 진리다. 진리 역시 상대적 개념이니 거짓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진리"라는 말도 있을 까닭이 없다. 여기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런 "공상이나 엉성한 것"을 배격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직성과 깨끗함"의 화신이라는 것이니 이유는 명백하다.


이는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설명이 되는데,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속성이 순수하게 이타주의이지 이기주의가 아니라는데 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신데 무엇이 아쉬워 자기를 위하시겠는가. 고로 "사심(私心)"이 없으시다. 허니 이 이상의 순결성과 정직성을 찾아볼 수 있으랴. 사사로운 것이라 함은 "공(公)"과 반대 개념이니 자기를 위한다는 뜻이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니 거기에는 필요에 따라 거짓도 얼마든지 개입된다. 모든 허황된 거짓은 자아중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롬 12:9). 여기서도 사랑의 속성은 드러나는 바 '나'를 위하지 않고 둘이 하나된 '우리'를 위함이 "공"이다. 사랑은 "공"의 특성을 지닌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믿은 아담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을뿐더러 따라서 "공"과 "사"의 개념을 혼동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실 수 있다는 사탄의 말에 동조한 것이니,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공"으로서의 성격인 성경을 믿지 않는다.


또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당신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 인간을 위하심인 고로 그 말씀이 순수, 순결하시다("PURE"ㅡ시 12:6/119:140/잠 15:26/30: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 증거다.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 위해 버리시고 우리 위해 바치신 것이니 이는 또한 아버지의 성품이시다. 자기를 위하셨다면 절대로 그런 죽음을 수용하실 턱이 없다. 천박한 지식의 사람들이 성경을 지어냈다고 하고 그래서 거짓말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하는 것은, 사랑의 "공"적인 속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령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는 사랑을 말하니 거짓이 없는 진리가 아닌가 할 것이다. 석가 자신이야 의식적인 거짓이 없으나 오도(誤導)된 것이다. 우리는 이 경우 이 세상 신의 거짓말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성경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랑의 개념부터 다르다. 성경(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부인에서 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절대로 위하지 않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확인된 바다. 불교에는 삶의 정작 핵심인 인간 관계에서 이런 명확한 정의(定義)가 없다. <둘이 하나됨>의 사랑이요 자기 부인인데 이러한 설명이 없다. 오직 <나> 스스로 깨달아 무욕지심(無慾之心)이 되어 일체의 고뇌에서 해방되고 평안을 향유한다는 것인데, 자아중심 그대로다. 말인즉 천상천하유아독존(獨尊)이니 무한정의 고독이다. 개인의 절대 가치를 말한다지만, 성경의 3위1체 원리는 '나'와 동시에 '너'를 함께 말하여 의식하는 '우리'의 개념이다. 왜냐면 '아름답다' 하면 '추함'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개념화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나' 하면 반드시 '너'를 의식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이런 이치를 알 턱이 없으므로 무조건 '나'뿐이다. 초자연계는 전연 알지 못하니 무시해버리고 자연계의 생멸(生滅)만을 알아 여기에다 기본 교의(敎義)를 두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기만 하고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기만 하는 썩은 웅덩이일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과율에서 결과만 붙들고 원인을 무시하는 탓에 창조신을 부정한다. 결과만 해도 양면성이 있어 역시 하나로 불가분인데 자연계만이 전부인 양 착각한다.
 인간의 현실생활을 고(苦)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규정 짓는 것도 그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사상의 근원이다. 이러한 고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면탈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단정하고,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生滅) 변화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무상(無常)이라고 말하니, 그 소리가 그 소리일 뿐 한 마디로 자연계 특징만을 논함으로 그친다. 자연계만 알고 동전의 다른 면 즉 초자연계의 실존은 깡그리 무시하는 데에서, 동전으로서의 화폐 가치는 창출될 수가 없다. 진리로서의 소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만물을 창조의 결과로 보고 그 원인이신 창조자의 속성을 사랑이시라 선포하며 동시에 그 다른 면(대칭)으로서의 위상이신 "소멸하는 불"로서 가감 없이 설명하고 있다. 후자의 의미는 공평공정 무사(無私)의 거짓 없는 잣대로 세상을 심판하심에 있다. 이러한 엄정하신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데 그 말씀을 기록하는 이들이 함부로 그 내용에 손댈 수 없다는 것쯤이야 누구든 무리 없이 납득하고도 남을 일이다. 유대인들은 성경(구약)을 필사(筆寫)할 때 "여호와" 이름이 나올 적마다 반드시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고는 나머지 작업에 임하지 않았을 정도다. 신약시대에 복음서를 기록할 때도 사도들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도 인간의 가필(加筆)이라든가 인위적 첨언(添言)이 있을 수가 없으니 본 대로 들은 대로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전달하기 위해서만 전력을 다한 까닭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런 일체의 거짓된 것을 용납하실 리가 없다.


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액면 그대로 수용 못하는가. 정직히 말해, 수용하기를 꺼려하는가. 그 마음이 간지럼을 타서 경망스럽게 금방 뱉아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음이다. 이 사실마저 성경에서 밝히시고 있다. 즉 사탄이 새처럼 와서 마음에 뿌려진 씨(곡식 낟알)를 쪼아 먹듯이 쓸어간다 하셨다(마 13:4,19). 강제로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19) 가는 것이 아니다. 싹이 날 수 없을 정도로 땅이 딴딴히 굳어 있다는 방증이니, 세상 삶에 골몰한 나머지 다른 것은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과는 정반대의 마음 상태다. 이런 심리에 동조하여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는 사탄의 필연적 반응, 대응이다.


"우주에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서가 있다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하는 자연과학계는 오늘날 '초자연과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려 하나 문제는, 자연과학자가 "초자연과학"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과학"에 입문하려면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와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유는 성경만이 인류의 원수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 관할하는 신(神)이란 사실을 제대로 유일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지라 감히 있는 대로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한 마디로 역부족이라 불가능함이다.


고로 초자연계에 관한 진실을 구명(究明)하려고 처음 나서는 경우 가장 먼저 봉착하게 되는 것이 사탄의 초능력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완전히 휘말려 버리면 일방적으로 사탄의 거짓과 속임수 일변도로만 물들게 되고 진리에 이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라는 충언이다. 소위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에서 사람이 죽게 되면 휘황찬란 요지경 같은 환락의 세계로 빠져 든다 운운 하는 등의 소위 "천국"이 바로 그 증거다. 왜냐면 사탄 자신이 그렇게 "임사체험"에 들어가도록 만든 장본인이기에 그러하다. 사탄은 얼마든지 그런 것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는 초능력자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있는 까닭에 성경 이외의 것으로 인생들을 인도하시는 법이 없다(눅 16:31). 
이 성경 외의 것을 추구할 때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각종 기적을 보고서도 이를 믿지 않고 더 큰 기적, 표적 보여주기를 요구한 것과 똑같은 구제불능의 선을 벌써 넘어서고 있는 증좌요 그 순간인 것이다(마 12:39/16:4). "임사체험"은 이와 같이 도를 넘어선 경우다. 여기에는 오직 이 세상 신, "악한 자"의 거짓과 속임의 술수만이 판 칠 뿐이다. 


고로 이 세상 신을 성경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과학자든 누구든 두 번 속는다. 처음은 자연계뿐이라고 자신을 기만해 왔지만 이제는 이 세상 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니, 이 60대의 남자처럼 자연계를 초월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찾으려 나설 경우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라고 거듭 경고하는 것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나는 곳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천국이라고 할 만한 너무나 좋은 환경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 소위 임사체험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 경험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결론은, "성경대로의 설명은 진실이 아니다.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한 마당인데 어느 쪽을 더 믿을 것인가. 나와의 직접 체험과는 거리가 먼 오래 전의 성경 기록을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가 아니냐"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도록 사탄은 이미 유도한 것이니, 악령들의 초능력으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되도록 편집하여 대상자들에게 실제와 같은 초(超)영상으로 보여주고도 남을 수 있음이다. 악령들의 초능력을 이길 자연계 존재는 없다. 


그런 '여러 가지 현상'과 동시에 '성경'을 함께 놓고 공평하게 저울질해 보는 객관적 관찰은 왜 없는가. 성경은 처음부터 초능력의 내용들로써 이미 이 방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권위로 자처해 왔었다. 독보적이고 유일하다. 그런데도 성경만은 억지로 외면하니 자가당착이 아닌가. 그것은 과학하는 태도가 아니다. 과학자라 하면서도 비과학적 자세로 임하는 것은 자기 편견과 선입견을 더 중시하는 썩 과학자답지 못한 근성 때문이다. 이 60대 남자는 성경을 겉 핥기로 보고 본격적으로 살펴 보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정확한 관점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불식시키지 못하면 적 그리스도가 인류 최대의 성인으로 가장하여 등장할 때 이에 대처할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60대 남자처럼 소위 "천국의 관점"에서 세계를 다시 보게 된다"는 망상에 저도 모르게 빠져 버리는 탓이다. 천국(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 개념으로서의 멸망이 병존하여 대립해 있음을 성경은 처음부터 밝혀 왔고 이제는 3위1체의 원리로써 확증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앞선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인간이 초자연계 존재로 있다가 현재의 자연계 육체의 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음에 눈뜨지 않고는, 오늘날 구원의 변화를 받기는 글렀다고 단정하게 된다.


따라서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간으로서 가장 먼저 이 죄와 죽음의 대가 지불 다시 말해 구속(救贖)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길"의 핵심이 됨을 알아야 하는 것. 사탄의 속임수는 처음부터 무조건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모든 면에서의 사랑, 연민, 용서, 용인과 자비"로 나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나 진리가 아닌 거짓의 정체가 여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불교에서도 인간고(人間苦)를 강조하고 있는 판인데 비극적인 현실을 왜 무시하려 드는가. 현실을 무시하고서 무슨 진리에 이른다는 것인가. 무엇이든 순서를 제대로 밟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니, 이 고난의 현실과 이 결과를 빚어낸 원인으로서의 범죄의 악을 반드시 설명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는가. 


인간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인간의 범죄 타락뿐이다. 생명의 일에 범죄했으니 그 보응으로서의 죽음은 필연이고 그것이 바로 이 자연계 몸으로서의 인간 구속(拘束), 제약, 한계로서의 비극적 현상인 것이다. 생명의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를 따라 먼저 죽음의 저주와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 우선이다. 즉 십자가의 도(道)이다. 때문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뿐이라"(갈 6:14,15)고 바울 사도는 강조한 것이다.


이 "새로 지으심 받는 것"을 "다시 출생하는 것"(요 3:3)으로 정하신 것이고 이러한 새 생명 탄생은 현재의 죽음과 저주의 질서를 따라 "해산의 근심"(요 16:21)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이와 같이 묘사하셨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 역시 이 성령의 말씀을 따라 "해산의 수고"(갈 4:19)라고 가르쳤다. 고로 "'선'고난 '후'영광"이 정석(定石)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악수(惡手)이다. 필멸로 끝난다. 현실은 피할 길 없는 고해(苦海)인데도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감언이설을 농하여 천국의 호화찬란함을 말하고 고통, 근심 없는 좋은 말만 하는 것 자체가 거짓임을 스스로 노정하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정신 나간 사람 외에 누가 이런 뻔한 거짓에 탐닉하리요.


현실의 비극적 참상을 직시(直視)하고 바로 설파(說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인 것이니 여기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다는 증거 바로 그 자체다. 다른 데에서 증거를 찾느라 부산을 떨 필요가 없다. 마지막 아담께서 적 그리스도처럼 처음부터 호화찬란한 구세주의 위엄과 영광으로 나타나셨다면 어느 유대인이 감히 대적하고 입을 놀렸으랴. 온 세상이 추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와 함께 고난 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기에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시니 분별없는 세상은 배척하기에만 바빴고 심지어 십자가에까지 매달아 철저히 무시,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진리의 정도(正道)다. 가감 없는 참 모습이다.


오늘날 혹심한 핍박 중에 있는 북한 교회를 위시하여 지구상의 모든 고난 받는 교회가 바로 이런 정 위치에 똑바로 서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양약(良藥)은 원래 입에 쓰다고 예로부터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연면히 그리고 도도히 흘러내려 온 이 진리의 일단을 피력한 소중한 격언이다. 이미 영생과 영광은 확보해놓았으니 느긋하게 때만 기다리고 제대로 순서를 밟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다. 그리고 이 경우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나타난다. 성질만 급하여 좌우지간 결말부터 보고싶어 하는 조급한 마음은 승자가 아닌 패자만이 밟게 마련인 패망의 지름길이다. 성경은 승자의 교과서이지 패자가 읽는 병법서(兵法書)가 아니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는 자연과학자로서는 완전 백지 상태인 초자연계까지 망라하는 것이기에, 자연과학자로서는 손조차 댈 수 없는 분야임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 말하기를 "3운법칙 등이 아무리 성경에서 나왔다지만 그래도 세계가 공인하는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같은 정도가 되어야 이를 근거로 불신자를 상대로 말문이라도 열 것이 아니냐,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라'고만 설명하는데 누가 과연 귀를 모아 들으려 할 것인가" 할 것인가. 백날 이야기해 보아야 원점으로 돌아가는 되풀이 이야기일 뿐이다.


즉 지금까지의 과학은 자연과학에 한하는 것으로서 영혼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실체를 부정하는 판인데, 이에 반해 3운법칙은 육체로 된 인간의 삶과 생애를 주관하니까 자연법칙임이 분명하면서도, 그런 육체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인간 생애의 장단(長短), 성쇠, 흥망 등을 결정하고 있어 말 그대로 자연계 사물을 초월하니 또 초월한다고 해서 독립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계와 밀접한 불가분의 하나로 되어 있으니, 도대체 이런 것을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는 지식 가지고 누가 해명해낼 재주라도 있다는 말인가. 자연계만 알 뿐 그 외에는 일절 무식한 자연과학자들의 권위를 등에 업고자 하는 것은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업히고자 함과 같은 황당무계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60대 남자의 이야기를 다시 더 음미해보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과학계는 초능력 또는 초자연계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고 요란스러운지라 이를 도저히 무시하거나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어 점차 관심이 초자연계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다. 바로 이러한 때에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의 원리가 그 안내자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데 도리어 그런 초보적인 걸음마 단계의(초자연계 실상에 관한 한) 과학자들의 명성에 힘입고자 하는 발상이니 아예 일찌감치 버릴 일이다. 믿으면 좋은 일이지만 안믿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지금은 심판의 시기요 성경으로써 모든 심판을 수행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모든 가치의 척도다. 최고 권위다. 


우리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는 것이요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세상 학문은 어차피 세상과 함께 영구히 사라질 운명이다. 간절한 제사장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하라. 나머지 몫 그리고 책임은 성령께서 져주신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인 바울 사도는 사람의 학문의 지식과 지혜로 가르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가리울까 하여 "약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달하기를 힘썼노라고 했다. 우리도 의당히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과학이 비물질적 현상의 연구를 시작하는 날, 과학이 존재해 온 지난 수세기보다 더 많은 진보를 10년 내 이루게 될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 미국 전기공학자)

[출처: 중앙일보] 영적(靈的) 세계를 강조한 말말말   http://news.joins.com/article/20285680



"비물질적 현상의 연구"는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과학"이다. 위의 인용구의 주인공이 표현한 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과학"을 말하는데 이 당연한 말을 한 니콜라 테슬라는 어떤 인물인가 알고 싶어하는 경우 이 글 마지막에 올려드린 소개 글을 대강 훑어보시면 되겠다.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에는 우리말로도 옮겨진 <과학 문명을 1백 년 앞당긴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란 책이 있다. 그가 그리도 대단해서 소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자로서 위의 인용구처럼 말한 이가 지금까지는 드물기 때문에 그의 과학자로서의 입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다시 대두되는 문제는, 그런 "초자연과학"을 손댈 수 있는 현재 인간의 여건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지능을 활용할 도리밖에 없어 그런 제한된 이지(理智)로는 도저히 초자연계를 궁구할 수 없다는 결론이요 판정이다. 영물(靈物, 거룩한 천사나 악령)과 같은 초능력을 발휘, 구사할 수 있는 초자연계 몸이 되어서야 즉 초자연계 존재가 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철벽(鐵壁)에 부딪쳐 오도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자연계 육체로서의 한계다. 기껏 규명해냈다 해보아야 겉만 갉작거리다가 만 시늉만 해 보일 뿐이다. 자연계 저너머 무엇이 분명히 있다는 낌새만 맡을 뿐이지 그 정체를 모르도록 되어 있다. 자연계 육체의 불가항력의 한계성 때문이다. 


그 정체를 확실하게 밝혀 주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3위1체의 원리다. 그리고 이 만물을 주재하는 원리가 성경에서 나왔으니 성경의 선언을 따라야 하는데, 성경의 선언이 무엇이냐 하면 "애당초 향유하던 초능력을 잃었으니 그 원상태로 만회하는 것만이 급선무요 나머지 모든 것은 그렇게 된 다음에나 가능한 일로서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분수를 알라"는 것이다. 자기 분수를 챙겨야지 그 이상으로 덤벙거려보아야 도로무공이라는 경고다. 이 선을 넘어서면 영락없이 사탄의 밥이 되는 것뿐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구원부터 받으라는 것이다. 이 외 그 어떤 것도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영원한 생명)만 상실하는 결과로만 끝난다. 


고로 3위1체의 원리, 3운법칙 이상 가는 권위를 찾지 말라는 소리가 된다. 다시 말해 성경의 권위 이상 가는 것은 없다는 최종, 최후의 결론이다. 자연계만 알아 왔던 인류의 한정된 지식으로 그 이상은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전부인 줄로만 착각하니까 지금까지 여러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제 오늘에 이르러 초자연계라는 실체에 눈 뜨기 시작하면서 절벽만을 굽어보기에 이르니 갈 길을 완전히 잃어 버렸음을 절감하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실속 없이 큰 소리 치기에만 바빴던 진화론도 같은 운명이다. 되돌아가는 것만이 상책이요 여기까지 오느라 부지런히 무시해 왔던 처음의 갈랫길에서의 반대 방향, 즉 "성경"이라는 좁은 길로 찾아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아야 하는 시점이다. 사탄이 덮어 씌운 눈 가리개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접 맞부딪쳐서야 비로소 벗겨지게 되어 있는데 이미 그렇게 되면 완전히 때 늦은 것이다.


성경이 경고하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수용하여 내 스스로 그 눈 가리개를 벗기지 않는 한, 마땅한 대처도 도리도 없는 험악한 현실이다. 눈 가리개로 가려져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벗길 마음조차도 없는데 어찌하랴.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 주신다는 성경의 약속은 이 세상 삶과 그 욕구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방금 지적한 바로 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리고 몹시 창황한 중에 울리는 비명이요 절규를 말함이다. 세상 만사를 살필 때 모순 덩어리이고 불의와 불법이 판 치는 등 도저히 제대로 수용할 수 없는 현행 부조리에 대한 근본 이유와 이치를 알고자 갈망하는 것 즉 진리에의 동경을 지적함이다. 세상 삶과 그 누리는 낙의 거짓됨을 알고 이 세상을 백안시(白眼視)하는 이에게만 비쳐지는 서광(曙光)인 것이다.


왜 거짓됨이라 하는가 하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인데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허둥대며 덤벙대기 때문에 이 경우 딱 들어맞는 표현일 수밖에 없음이다. 하긴 이런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원래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니까. 그런데도 죽음을 자초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이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도 이를 외면하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기를 쓰고 덤비기 때문에 허물이 완연하다. 홀린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 신에게 홀린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성경을 멸시해 온 세상이다. 악마에게 꺼둘려 그 조종 아래 있는 이런 세상 학문의 후광을 업으려고 하다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성경은 본디부터 자체 증명하는 것이요 타의 도움을 일절 사절한다. 세상의 그 무엇, 또는 과학, 또는 지혜의 철학들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기를 요망한 역사가 없다.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는 이러한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그러하듯이 3위1체의 법칙이나 3운법칙 역시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여 상호 검증하는 것으로써 시작하고 끝난다. 자연계만 아는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과학도 한 줌 한 오라기만큼의 도움도 주지 못한다. 초자연계에 관해서는 도무지 무식하여 철저한 문외한이 되어 있는 세상 학문에게 되레 도움을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3운법칙이요 3위1체의 원리다. 이를 수용 못하는 이는, 성경을 수용 못함으로써 자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경우처럼 그 동일한 운명을 자초하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끝난다. 억지로 수용하라고 믿으라고 애걸복걸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경과 3운법칙 및 3위1체 원리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해  소위 "현대 문명"(성경적으로는 이 말 자체에 어폐가 있으니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부터 퇴화돼 있는데 무슨 계명(啓明)이니 개화니 진보 발달이란 말인가)의 교통 통신 분야의 지식 격증(激增-단 12:4)과는 차원이 다르니, "심판"(살후 2:12)과 직결되어 있음이다. 즉 이 정도로까지 자세하게 덤으로(마지막 때라고 해서) 진리와 진실을 밝혀주어도 믿지 않을 때 불가피하게 내려질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이란 판정을 위함이다. 


이 자연계에서 사람 이상 가는 피조물이 없으니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영장(靈長)"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래서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인간(아담)을 정하신 것이다. 당연히 에넨낙원의 영물들은 아담의 수하(手下)였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마지막 아담 안에 있어 그와 하나되어 있으면 악령들의 손위(手上)로 위치해 있다. 물론 아직도 그 몸된 교회가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단계에 있으나 신분은 그러하므로 우리가 사탄을 호령할 때 마귀는 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약 4:7). 현재 우리가 "약함으로" 고난 받는 경우는 자진해서 받는 것이므로 핍박을 가하려고 들이닥치는 사탄을 호통쳐서 쫓을 이유가 없다.    


"적 그리스도"의 뜻은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인데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모방함이 아니라 영광 중에 나타나시게 되어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방이다. 이미 그 전에 나타나려고 요동을 쳤지만 "막는 자가 있어"(살후 2:6,7) 오늘에야 그 막는 것이 "옮겨졌으므로" 이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게 되어 있는 시점이므로 적 그리스도의 때가 된 것이다. 그 전에 등장하지 못한 것은 일정 기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각자 자기 육체에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악한 자는 아무리 모방의 명수라 해도 고난 중의 그리스도는 속성상 도무지 흉내 낼 재주가 없다. 잠시 한 때 "죽게 된 것 같다가 살아났다"(계 13:12-14)는 표현대로 그런 상처 받은 것으로써 그리스도로서의 고난의 의미가 되도록 땜질할지는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앞에서 설명했다. 


때문에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유일한 차이를 다른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그 처음 나타나실 때부터 초자연계 몸이시고(마 24:27) 적 그리스도는 그렇지 못해 흉내만 낼 수밖에 없으니 즉 상처 받아 죽는 시늉을 하는 등 자연계 육체임을 노정시키는 것일 뿐임을 명백히 하셨다. 그 후로는 초자연계 특성을 드러낼지는 모른다. 왜냐면 적 그리스도를 "짐승"(창세기에 영물들을 "짐승"으로 표현한 것처럼-창 2:19)이라 했듯이 인간이 아닌 환생(還生, 무저갱으로부터-계 17:8)한 네피림으로서 악령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네피림이라고 해서 초자연계 몸일 수는 없는데 이 경우에만은 유일하게 일시 그런 흉내를 낼 가능성을 전연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모방하기에 안간힘이다. 그래서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아 살아난" 것으로써 인간은 모두 속죄되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몸인 교회 역시 머리의 당하신 고난을 따라 함께 고난 중에 사람 구원하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나머지 핵심 부분(결코 생략될 수 없는)만은 절대로 모방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교회로서의 고난 받음이 실제 우리에게는 핵심이다. 자아중심의 속성상 적 그리스도는 이런 모방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을 이 자연계에 속한 상태의 모습으로는 인식하지 말 일이다.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 사는 것이 인간의 정상 상태이다. 당연히 마지막 아담께서 지금 나타나시면 막강한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으로 오시게 되어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즉 "죽은 자"의 모습으로서의 자연계에 속한 몸은 십자가 죽으시던 그 33년 가량의 그 단 한 때 단 한 번뿐이다. 이제는 영원히 이런 자연계에 속박된 육체로 존재하시지 않는다. 상상도 하지 말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범죄 전)의 모습 그대로이시다. 우리 역시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의 현실을 증오하고 혐오해야 정상 자세다. 초능력으로 오신다는 것은 천사장(archangel)의 나팔소리(혹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번개처럼 구름을 타고 오심을 말하는 것이다(계 1:7/마 24:30/26:64). 적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눅 17:23) 해도 그것은 속임수라고 경고하셨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일정 장소에서 "여기 있다"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그가 아무리 깜짝 놀랄 지경으로 각종 기적을 행하더라도 거기 넘어가지 말고 "믿지도 말라"는 경고이시다.  


'정상적인 인간'의 대표이신즉 절대로 비정상적인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영원히 나타나시지 않는다.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이 아니고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예수님의 그림이니 하여 이제까지 나돈 일체의 것들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일이다. 현재 인간으로서의 자연계 모습은 부끄러운 인간 범죄의 몰골이다.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죄인 중 하나로 간주"(사 53:12)되시느라 여인의 태에서 나오심으로 이런 육체가 되신 것뿐이다. 현재 비정상적이 되어 "죽은 자"로서의 인간을 산 자 다시 말해 초능력의 초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救援者)"의 의미이다. 그런 구원자가 비정상적인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나타날 리가 없다고 정신차려 똑바로 기억해야(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이상과 같은 경계의 말씀들을) 하는 것. 적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 초자연계에 속해 있던 아담의 몸의 '원뿌리'를 계속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초자연계 몸으로써 자연계 몸으로 필요에 따라 변환되는 것이야 얼마든 가능하다. 자연계 몸으로는 그런 반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초자연계 몸으로는 그런 변환 작업은 식은 죽 먹듯이 할 수 있다. 그러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계 초능력의 몸으로 오시기 때문에 "하늘로 올리우셔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행 1:11)이라고 천사들이 예고해준 것이다. 고로 "성전에 앉아"(살후 2:4) 그 아무리 천상의 음악 같은 내용으로 말을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가짜이니 현혹되지 말 것이다. 이 "악한 자"는 "역사상 최대 성인(聖人)"이라는 상찬을 들으며 나타날 것이다. 사랑과 인애와 자비를 말끝마다 강조하게 될 것이다. 속임수다. 


앞서 지적하기를 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을 재주가 없다 했지만 그것보다 바로 지금 설명하는 이 점(적 그리스도는 초자연계 몸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는)이 그리스도와의 최대 격차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과 같이 미리 경고하신 그대로다. 이러한 비정상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음으로 이런 부자유(공중에 날지도 못하고 바다 속도 마음대로 유영하지 못하니 이런 속박이 또 어디 있겠는가)에 갇혀 지내는 것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대신, 여기에 심신이 둘러빠져 그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임을 명심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멋모르고 살아 온 것을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나 자신 역시 하나님의 열화 같은 진노 아래 있음을 <그리스도의 나 위한 처참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나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진노가 느닷없이 걷혀졌기에 이 세상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여전히 진노 아래 있는 이 세상의 속박 아래 신음 중의 인생들을 구원해내라고 세상에 보내심 받아(이것이 구원받은 목적의 하나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지금이 아닌가.


앞서 소개했던 그 40대(http://trinia5.blogspot.kr/2016/07/40.html 현대인을 대표하는, 한 40대의 망상ㅡ착각)는  이제 인간은 ‘지식 혁명’을 넘어 ‘영생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데, 모르니까 아는 것이 없으니 용감하다는 말과 같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생김을 인식하므로 아예 침묵하는 법이다. 속에는 든 것이 없이 얄팍한 지식을 얻어 듣고 전부를 아는 양 하기 때문에 빈 양철통이 더 요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요란함 때문에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간다. 성경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고전 8:1,2)이라 한 꼭 그대로다. 깊이로는 파고 들지 못하고 겉 발림 겉 핥기로만 알아 제대로 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과학적 정의가 바뀌었다. 죽음은 그저 기술적인 문제다...기술 문제에 불과하므로 모든 기술 문제에는 기술적인 해답이 있다고 믿는 게 과학이다. 죽음 극복을 위해 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몇몇 괴짜 연구자들만 있으면 된다. 전통적으로 성직자·신학자가 죽음 전문가였지만 이제 공학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겁 없이 큰 소리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이다. 알기는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이제 돌이켜보니 과학지식의 기초에 해당하는 초자연계가 자연계와 병립해 있다는 사실조차 이제 뒤늦게야 인식하고 있지 않는가. 모든 지식의 ABC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자연계의 아름다움은 있다. 사람이 먼저 이 자연계의 육체로 지으심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 존재로 전락한 후이지만 악령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탐냈다 했고 그래서 네피림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풀은 싱싱할 때는 좋고 그 영광인 꽃도 한창일 때는 그 이상 가는 것은 없을 듯 싶지만 이내 마르고 시들어 땅에 떨어지듯이 끝이 있고 영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계 존재의 숙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에덴 낙원의 식물에 대해서 성경이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을 하고 있으니, 그 땅의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다"(창 2:9)고 극찬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초자연계의 식물이 자연계의 식물보다 훨씬 더 이상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초자연계가 자연계보다 월등하고 더 아름다운 세계라는 것을 성경은 이로써 확증해주고 있다. 장차 나타날 "새 땅과 새 하늘"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쯤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초자연계적 근원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계 아름다움의 '한계성'을 대조시킴이다. 인간의 목숨은 이 시간 후로도 어찌 될지 모른다. "비정상"이라 할 때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 자연계 몸을 비정삼임을 말끝마다 강조한다고 해서 괴이쩍게 생각할 것은 없다. 성경에 세상 모든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라 정의하셨으니 마땅히 이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형세를 취하면서도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어찌 "비정상"이라 아니하리요. 이런 비정상을 여태까지 정상이라고 착각해 온 우리들이 문제인 것이니, 이런 착각은 신속히 버릴수록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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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니콜라 테슬라 기록물Nikola TESLA’S Archive ] 국가/세르비아(Serbia)ㅡ소장 및 관리기관/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박물관ㅡ등재 연도/2003


‘니콜라 테슬라 기록물(Nikola TESLA’S Archive)’은 전 지구의 전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원고, 사진, 과학 및 특허 관련 서류 등의 고유한 컬렉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미국의 발명가·과학자이자 전기화의 선구자였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는 다상 방식(polyphase system, 주파수는 같지만 위상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기전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교류 방식)을 발명하여 문명의 기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다상 방식은 현대의 전기·전력 생산 시스템, 장거리 송전 및 전류·전기·통신의 이용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테슬라의 비동기 전동기(asynchronous motor)는 전 세계 전기 구동의 95%를 차지한다. 또한 전 세계 에너지 총량의 60%는 이들 모터를 구동하는 데 소비되리라 추정된다. 비동기 전동기는 또 공장·광산·발전소 등 달리 말해 모든 산업에서 구동장치로 사용되므로 ‘산업의 복마(draft horse of industry)’라고도 한다. 가정용 모터의 대다수도 비동기 전동기를 이용한다. 19세기 말부터 이용하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상 방식은 비동기 전동기와 더불어 놀랄 만큼, 그리고 지금껏 많은 개선을 통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졌다. 간단히 말해 테슬라의 업적은 현대 세계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엄청난 발전의 주춧돌이 되었다.

테슬라는 교류 모터 이외에도 현대의 모든 고주파 장치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된 고주파 변압기, ‘테슬라 코일(
Tesla coil)’의 발명가로 알려졌다. 테슬라 코일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고주파 전류를 테슬라 전류라고 했으며, 그 장치는 테슬라 코일이라 불렀다. 그는 유도 가열의 가능성, 오존 생산, 인체에 대한 효과 등 테슬라 전류가 만들어 낸 효과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컴퓨터 칩의 생산에서 매우 중요해진 플라스마 생성 기법은 그가 발명한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원격 조종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루어진 그의 발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나중에 ‘대역 확산 통신 기술(spread spectrum technique)’이라고 알려진 선별 수신 시스템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논리적인 ‘i회로’의 원리도 발견했다. 이것 없이는 현대의 컴퓨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상상력이 풍부한 과학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아이디어에 따라 여러 가지 중요한 발견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문명은 라디오·레이더·텔레비전, 그리고 각종 모터, 고주파 전기장·자기장, 코일·컴퓨터 등과 같은 기술의 산물을 향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실현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콜로라도스프링스(Colorado Springs)에서 한 자신의 유명한 실험(1899~1900)의 결론으로서, 에너지 문제가  대두되리라는 것을 시대에 앞서 알아차린(1900)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국제단위계의 자기 유도 단위는 그를 기려 ‘테슬라’라고 불린다. 간단히 말해 이곳의 소장품은 현대 세계의 발전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관한 자료이다. 현대 세계는 손쉽게 에너지를 생산하고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은 테슬라의 다상 방식 덕분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이 기록물은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발명에 대한 최초의 설명으로, 고유하며 대체할 수 없는 원천 정보이다. 또한 20세기의 위대한 기술 발전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문헌들이다.


<이상의 글은 아래 주소에서 전문 베껴온 것ㅡ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79544&cid=50412&categoryId=50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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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6.23 테슬라 전기 조명 시스템으로 미국 특허 획득하다

호텔 식당. 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들을 냅킨으로 하나씩정성껏 닦고 있다. 식기가 더러웠을까? 아니다 호텔식당 관계자들은 그가 세균에 대해 병적인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남자의 자리에 놓인 식기들은 다른 자리에 있는 것들에 비해 더 신경 써서 깨끗하게 준비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냅킨 열여덟 장을 다 쓰고 나서야, 음식을 입에 넣는다. 음식을 먹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음식을 한입 떠먹을 때마다 요리의 부피를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그는 그래야만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텔 측에서 준비해 둔 냅킨은 왜 매번 열여덟 장일까? 그는 3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번호가 붙은 방이 아니면 투숙을 하지 않을 정도로 3이란 숫자를 좋아했다.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가재도구나 농사도구를 직접 발명한 어머니

젊은 시절의 니콜라 테슬라ㅡ‘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발전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거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이 남자의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발명의 천재, 전기의 천재, 전기의 마술사, 교류의 아버지, 뉴욕의 마술사 등으로 불린 그의 이름은 니콜라 테슬라이다. 발명가로서 그는 에디슨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학도들 사이에서 테슬라라는 이름은 천재라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을 스밀리안(오늘날 크로아티아 영역)에서 태어났다. 정교회의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테슬라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음에도 가재도구나 농사도구를 직접 발명해서 쓸 정도로 발명에 재능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이미 나름의 발명을 시작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훗날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발명가이셨다. 만약 좋은 환경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셨다면 이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셨을 것이다.” 테슬라는 1875년에 그라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기계장치를 보았다. 그것은 발전기와 모터의 기능을 모두 하는 최신 기계였다. 이 장치에 푹 빠진 그는 직류 대신 교류로 작동하는 장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받던 장학금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 후 프라하 대학에도 다녔지만 역시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직류와 교류에 대한 생각 차이로 에디슨 연구소 그만 둬

1881년 테슬라는 부다페스트로 가 국영 전화국의 기술자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아이디어가 마치 계시처럼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1882년 겨울 그는 친구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해가 지는 모습에 취해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걷다가 갑자기 땅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친구에게 외쳤다. “이게 내 모터야!”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교류 모터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듬 해 파리로 건너간 테슬라는 콘티넨털에디슨 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조잡하나마 최초의 교류 유도 모터를 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 실험을 통해 그것이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알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1884년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쓴 시 몇 편, 동전 몇 개, 하늘을 나는 기계와 관련된 계산 결과 그리고 동료가 토머스 에디슨에게 전해주라고 한 추천서가 전부였다. 추천서 덕분에 그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만다. 그의 능력과 집중력만큼은 에디슨도 인정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바로 직류와 교류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에디슨은 철저한 직류 신봉자였다. 그러니 교류에 집착하는 테슬러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

에디슨과 결별한 테슬러는 1885년에 조지 웨스팅하우스에게 교류 관련 장치들의 특허권을 팔았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그 유명한 ‘전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격렬했다.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6개월 안에 틀림없이 누군가가 죽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개나 고양이를 사 교류에 일부러 감전사시키려는 식으로 교류의 위험성을 과장해 선전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는 교류 쪽으로 기울었다. 시카고 세계 박람회를 밝힐 전기로 교류가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에 교류 시스템이 적용됨으로써 전쟁은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테슬러는 웨스팅하우스에게 받은 돈으로 개인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자동 보트, 고주파 유도 코일인 테슬라 코일 등을 발명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900년 그는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투자를 받아 전세계로 통신을 할 수 있는 무선전신탑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이 계획은 모건의 지원 철회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건설 되다 만 탑도 1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구상들은 자금 부족 때문에 거의 대부분 실제로 구현되지 못한 채 노트 속에만 남게 된다.

25개국에서 272개 특허를 획득한 세기의 발명가

1915년 테슬라는 에디슨과 또 한번 악연을 맺게 된다. 그가 에디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될 거라는 언론 보도가 연이어 난 것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된 온갖 추문이 나돌았다. 테슬라가 에디슨과의 공동 수상을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었고, 테슬라가 상금을 받지 못하도록 에디슨이 계략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었다. 2년 후, 테슬라는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가 주는 에디슨 메달을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수락했다. 시상식 자리에서 그는 “에디슨은 이론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사전에 그 어떤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혼자 힘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날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뢴트겐의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었고, 그의 연구가 나온 이후부터 톰슨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업적을 이루어 현대 물리학의 개념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테슬라 씨는 마르코니의 연구보다 앞섰으며, 무선 전신과 기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1943년 1월 8일 아침 호텔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검시관은 그가 1월 7일 오후 10시 30분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이라고 밝혔다. 그는 1891년 6월 23일 전기 조명 시스템으로 받은 미국 특허를 비롯해 25개국에서 적어도 272개의 특허를 획득한 말 그대로 세기의 발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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