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모바일로만 보는 성경 묵상

남녀평등의 "평등"은 '둘이 하나됨'의 차별 없는 균등 배분을 의미해야ㅡ이를 "대등(對等)"이라 착각하니 문제

Tayseek Kwon 2019. 4. 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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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의 "평등"은 '둘이 하나됨'의 차별 없는 균등 배분을 의미해야ㅡ이를 "대등(對等)"이라 착각하니 문제











§  '지식'보다 '전파'에 치중한다는 것은, 소위 식자들만의 전유물이 됨을 막자는 것이니 세상에는 지식과 지혜가 없는 자가 있는 자보다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복음(福音) 즉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함에는 없는 자, 약한 자, 천대 받는 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보다 크다는 사실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음에랴(고전 1:26). 이유는 그런 환경에 있는 이들이 세상에 배 부른 자들보다 오는 세상에 대한 열망의 강도가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고로 이렇게 세상의 대다수가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지식"보다 "전파"에 역점을 두는 것이다. 


한국인들만 철저히 "복음화"하기 위해 한 우물을 파도 일은 절반이나 진척되는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회가 닿는 대로 간단하게나마 영어로 전달할 기회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나(구원의 말씀을 널리 홍보함에는 제약이 있을 수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세계 각처(이시아, 아프리카 및 남북 아메리카 인디안 등)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많은 일꾼 확보가 급선무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일차적 과제이다. 간절한 기도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이다.


구미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받은 역사가 오래이면서도 오래 되면 부패하기 쉽다는 이치대로(하기야 바울 사도 생전에도 바울의 직접 전도를 받은 교회들이 그 가르침을 벗어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따름을 개탄하여 "이와 같이 신속히 떠나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했지만-갈 1:6) 거의 전부가 "다른 복음" 또는 세상 종교화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 "나는 배 부르다"는 착각 아래 쇠귀에 경 읽기가 돼 있은즉 일단은 접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의 활동 상황들을 보고 그들 나름으로 자극을 받아 자체 내의 정화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있는 숫자가 적지 않으므로 그들이 구원의 진리를 받게 되면 현지 선교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는가. 현지어에 어느 정도 통달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을 통해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의 상호 검증 관계를 설명하고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나왔으므로 이 성경의 자체 증명(진실성)의 권위를 알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이다. 한반도 교회는 아아(亞阿-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복음화를 위한 선교 이민을 적극 권장할 때다. 현지 주민으로 동화(同化)되어 그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임하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이 됨이 바람직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의 순수한 믿음의 기도 응답에 의한 고아원 사업 경영에 자극 받고 그런 방침을 선교 사업에 도입 적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역시 크게 성공한 헛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큰 귀감이 된다.


그리고 외지 선교 활동의 효과적인 방략으로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1907년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4개월에 걸친 정오기도회를 들 수 있다. 매일 저녁 식사 때까지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합동 합심 기도로 이룩한 본보기이다. 이 정오 기도회(the noon-day prayer meeting)의 발단은 1857년의 미국 교회 부흥이 도화선이 되어 시작된 것이다. 그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흥은 한 개교회에 유급 채용된 한 사람의 평신도 전도인(Jetemiah Lanphier)에 의해 비롯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유럽 교회 부흥인 모라비아 운동(the Moravian Movement)의 특징은 하루 24시간 연쇄(連鎖) 기도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국 교회 부흥의 특징은 새벽기도이다. 


모름지기 각 선교사는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Praying Hyde"(기도자 하이드)와 같은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인도(印度) 선교를 위해 기도로 몸 바친 인물이다. 그가 장시간 기도하고 있는 집 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별안간 영적 각성이 와 불현듯 하이드가 기도하고 있는 선교관으로 달려왔다는 일화도 있다. 하루에 단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여 완전히 회개시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굳게 정하여 그렇게 장시간 엎드려 기도한 후 밖에 나가 성령의 인도로 전도함으로써 그 목표를 차질없이 달성해 나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외지 선교나 국내 전도나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는 말씀만 전한다고 무조건 할 일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죠지 뮬러가 고아사업을 하게 된 동기도 교회를 맡아 있을 때 한 대장쟁이 교인 집에 심방을 갔더니 기도할 틈도 성경 읽어볼 틈도 도무지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은즉 먹고 살기가 바빠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깊이 느낀 바가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긍구한 것만 아니라 이 모든 것도 겸하여 주신다"는 친히 하신 약속 말씀을 왜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가 내가 그 본을 보여 주리라 결심하고 부부 합의 아래 그 날로부터 목회자로서 정기적(월정액)으로 받는 사례금을 일절 사절하고 순수히 기도 응답으로써 생계를 꾸려 가기로 결심 이를 교인들 앞에 선언한 후 실천해 갔고(그 때가 20대 중반) 그리고 이러한 기도 응답 생활의 본보기로 어떤 것이 좋을까 기도한 끝에 길거리의 부랑 아동들을 수용하여 먹여 살리며 교육시키는 고아사업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유명한 인물도 한국 교회에는 지독한 교파 관념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그는 초교파주의의 "형제회(Brethren)"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가 원래 독일 태생으로 국교회(國敎會) 교역자 지망생으로(안정된 직업을 찾아)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온갖 난봉을 부리며 방탕생활을 하다가 어쩌다 한 조그만 교회에 듈러 거기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광경을 처음 목격하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후 그 길로 회개하여 하나닐 사업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믿음의 개척자로서의 본보기들이 많으니 뜻 있는 자 분발할 일이다.



§  아담 이래 수천년 전통적 인식일 뿐 아니라 인류의 양식(良識)이기도 한 것에 반(反)하여 소돔 고모라처럼 국지적인 것도 아닌데 오늘날처럼 개화되었다고 믿는 지구촌 시대에 동성 성행위를 그것도 소위 지도 국가로 자처하고 있다는 더군다나 기독교 문화권이라고 자타 인정해 온 구미 제국에서 합법화하는 것을 보아도 인류는 진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퇴화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미개하다고 여기는 타 문화권에서 이를 독자적으로 법제화하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치닫고 있으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자연계에만 집착해 온 고정 관념을 모조리 타파할 때다. 자연과학의 진수처럼 여겨 왔던 진화론도, 수천년 관록의 불교 교리도 그렇다. 자연계의 천년도 초자연계로 치면 하루 정도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위의 둘이 그런 지금까지의 미망(迷罔)의 대표적인 것이기에 거론하게 된다. 사탄이 인류를 퇴화시키면 퇴화된다고 할 정도로 꼼짝 못하게 손 안에 움켜쥐고 좌지우지하고 있으므로 그러하다. 영생하기로 창조되어 있다가 느닷없이 죽은 자로 전락해 있는 인간이니 이것만 해도 퇴화이지 아니라면 무엇인가. 진리라도 이 세상 지배자 사탄이 거짓이라고 하면 거짓으로, 거짓을 진리라고 하면 진리라고 온 세상이 지금까지 믿고 따라 온 인류사가 아니던가.   


§  이제는 교회 설교 방식도 강단에서의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설교자도 편안히 앉아 대화식으로 주고 받는, 아니면 여럿이 주고 받는 것을 사회하는 진행자로서의 역할이 바람직하다(고전 14:27-33). 성경 지식이 전무한 일반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경우야 의당히 주입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듣는 내용이니까 그 수용 여부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구원의 기본 지식으로 토대가 쌓여진 다음에는 직접 성경을 파고 드는 것이 마땅하므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그 은사를 따라 오히려 설교자를 가르치는 경우도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든 일방적으로 몰아서 어떤 은사를 주시는 것이 뜻이 아니다.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초대 교회의 초창기이므로 혹 그런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모든 지체가 함께 교회에 덕을 세워 나가는 일에 참여하는 것인즉, 오직 머리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신 까닭이다.고로 "너희 각자는 '스승'이라, '아비'라, '지도자'라 일컬음 받지 말라" 하신 대로 진작부터 교회는 평준화, 민주화로 방향을 잡아간 것이라 할까. 초대교회는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달되었고 그리고 이 사도에게서 배운 이들이 사도들이 떠난 후에도 그 소임을 맡고 있었다는 것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를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개혁이 필요하면 언제든 단행할 수 있는 그런 유동성, 가변성이 적극 권장될 때다. 이것은 진화 개념이 아니라 환경 적응이다. 변천해 가는 시대상을 따라 유효적절하게 자신의 자질을 확대해가는 대응력이다. 


80세가 되어도 어린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말도 있듯이 어린 아이가 무슨 전문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착안점, 시각, 사고 방식 등을 어른이 마든지 새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간에는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일문일답 식으로 나가는 것이 학습 효과에서는 최상이니, 잊어버리지도 않거니와 핵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용이할 수도 있고 사제간이라도 위와 같은 이유로 피차간에 배울 수가 있기에 그러하다. 예수님도 일방적으로 "전달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각 족속의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 하셨던 것.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항상 이런 대화 방식을 취했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야 진리이고 모든 지혜의 총합이므로 물론 일방적이지 토론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다원적인 교류, 대화는 필수이다.  


§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 나오면 그 진리로서의 절대성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여러가지 실험과 검증이 필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므로 3위1체의 법칙, 3운법칙은 상호 검증하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새삼스럽께 꺼내는 것은, 그런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권위에다 지금까지의 일방적 한계(자연계밖에 모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해 온)의 습성을 따라 아직도 무게를 두는 사람들을 위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