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교회

"신학의 권위"에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Tayseek Kwon 2019. 4. 4. 09:42





"신학의 권위"에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성경대로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요 왕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적인 해석을 하여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시니

당연히 이 세상을 지배 통치하심이 상식이 아니냐

하고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대한 것이 화근이다. 


주님 친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고 선언하셨다(요 18:36).

그렇다면 당연히 누구의 나라요 세상인가. 

"내 나라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내가 잡히지 않게 할 것"

이라는(요 18:36) 말씀까지도 해주셨건만.

세상 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북한교회와 같은 극심한 핍박 속에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대상이 되어 있지 않은가.

초대교회 이후 교회가 그 못지 않은 탄압을 받음으로 인해

콘스탄틴 황제가 칙령을 내려 신교(信敎)의 자유를 약속할 때

교회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었다. 이것이 사탄의 전술이다.

실은 환영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핍박 못지 않은 극심한 "말씀 혼잡"의 사이비 이단 사상이

교회를 더욱 극심하게 파멸에 몰아넣기 시작한 것이다. 

핍박하면 이판사판이라 더욱 믿음으로 똘똘 뭉쳐질 수라도 있지만

그 반대로 유화정책을 쓰면 간까지도 다 빼어가도 인식을 못한다. 

핍박에, 심하고 심하지 않고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지고 주님 따르는 십자가는 바로 주님 달리신 그 십자가다. 

은혜로써 우리의 처지에 맞는 완화함이야 있을 수 있다 해도

그 마신 잔 그대로이다. 


이 세상 신이 한 번 손쓰면 육체인 인간은 

꼼짝없이 당하는 것밖에 없다.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엄연한 사실 하나에도

눈뜨지 못한 사례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사탄의 불가항력적인 초능력이라기보다 

우리의 자연계 육체(아담의 죄의 대가)의 철저한 무기력을

실감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진실성이 자체 증명되면 되었지 

거짓말은 도저히 발 붙일 토양이 아니라는 확신만은 얻을 수 있다.

이 고난의 실상을 사랑 가운데 기꺼이 포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이 고난 기피하면 영원무궁토록 지속되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그 대가로 내 몫에 태인다는 사실만은 

예상함이 좋다. 나의 자업자득인 것이다. 


무서운 전염병이 돌 때

예방주사 미리 맞아두는 정도의 아픔이다. 

고로 아담의 범죄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결과이니 

영원 멸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는 차원에서 인내할 일이다. 

사랑의 가치를 배워두는 것은 영원을 두고도 후회 않을 좋은 경험이다.

사랑은 하나됨, 한 몸됨에 있은즉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당하는 그 보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