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성령 세례

춘천한마음교회 또는 한마음침례교회 또는 한마음교회의 <이단 시비>

Tayseek Kwon 2019. 4. 4. 05:01



혹자는 교회에서 간증하는 것을 믿음 자랑이라고 부정적으로 대하나 메시야 우리 주님 자랑, 하나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므로 외려 적극 권장할 일입니다. 여기서도 성경을 잘못 알 때 폐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런 "교만"이 걱정되면 바울 사도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전 9:27-10:1-12)는 경고를 명심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구원 받은 자 즉 성령 세례(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행 2:38) 받은 자도 얼마든 멸망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서 때문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라'(:12) 한 것입니다. 중도에서 타락, 믿음에서 벗어나는 경우 "멸망"(:5)이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 것이다, 또 성령 세례가 구원되어 예수님을 성령으로 모시는 의미인데도 그릇되게 해석하여 이 둘을 따로따로 분리해 해석하는 등 성경 무지가 빚어내는 등의 병폐만 해소하면 됩니다. 


춘천 한마음교회는 활발한 간증을 권장하므로 교회가 비교적 살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워낙 오늘날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성경 이해에서 진창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에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이단 시비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담임 김성로 목사에 대한 비판으로 "부활 복음론"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는데, 한 때 떠들썩했던 이단 "구원파"처럼 "부활복음파"가 생긴 것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좋은 의미라면 무슨 별명이 붙은들 무슨 상관입니까. 소위 "부활복음" 자체는 성경적이므로 전연 하자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도 망했을 것"(고전 15:17,18)이라 한 대목 중시는 백 번 잘하는 것입니다. 


절대 다수 교회가 이 중요한 대목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대신 죽음"이라는 인위적인 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우릴 대신해 죽어주셨기 때문이 아니라(바로 이런 잘못된 이해 때문에 구원 받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 양 "한 번 구원된 이상 그 구원은 불변"이라는 미신의 미혹을 받습니다), 아담의 범죄롤 이미 죽어 있는(마 8:22) 나와 하나되시어 죽으심에 있고 그렇게 하나되심으로써 그 부활이 내 부활이 됨을 인하여 지금 하나님의 아들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똑같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주님은 "맏아들"(롬 8:29/히 1:6)이 되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도 이런 성경 무지에서 "대신 죽으심"이라고 버젓이 번역돼 있는데 이를 시급히 수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대신 죽음"이라는 성경 왜곡은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는 당치도 않은 곡해애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유도 없이 처음부터 인간을 <죽는> 존재로 창조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짝의 원리(3위1체의 법칙)를 알아야 하는데, 서로 짝이 되어 있으면 상호 보완을 할 뿐이지(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이를 말함) 둘의 성질이 정반대이므로 절대로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양자얽힘"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이 한 자리에 나란히(제각기의 특성 즉 독립성을 유지한 채) 있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란히 있게 되면 서로 다른 극끼리의 자석(磁石)처럼 달라붙어 엉겨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면 양자(兩者)의 반대되는 성질이 나타나지 않고 그냥 하나로서의 성질만 보이게 됩니다. 이를 짝의 법칙(3위1체 법칙)에서 "제3위"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룬 둘 즉 제1위, 2위와 구별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존재로 만드시면 동시에 죽음을 설정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 되면 즉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있게 되면 위 설명처럼 생명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별개의 제3의 믜미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죽도 밥도 아닙니다. 생명 있는 존재로 만드셨는데 생명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니 이런 일이 생기게 허용하실 리 만무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는 자 곧 영생하는 자, 죽지 않는 자로 인간을 만드셨으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으니 이하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생명에는 죽음이 없고 죽음에는 생명이 없으니까 죽음 일색 아니면 생명 일색이지 그 중간은 없습니다.


자연계 동식물에는 생명과 죽음이 병존하지 않느냐 하겠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위의 설명과 같이 '죽지 않음' 곧 영생입니다. 가령 동물은 개개인 사람처럼 영혼이 없으므로 개면 개, 고양이면 고양이 이렇게 종(種)으로서 헤아려질 뿐이지 '마리' 수(數)로 따져지는 각 개체는 인간으로 말하면 일종의 '신진대사' 작용에 해당될 뿐입니다. 묵은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듯이 개 한 마리는 죽어도 개라는 '종'은 창조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건재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영혼이 있어 태어날 때 육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지만 영혼은 그 육체가 생성되기 전후로 해서 하나님께로서 나는 고로 아담 창조와 같은 개별적인 창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와 죽음 이후 이러한 영원한 영혼과는 관계 없이 육체는 아담의 범죄 후의 육체 즉 이 죽음과 썩음의 자연계 육체입니다. 아담은 범죄 전에는 죽지 않는 육체였다는 뜻입니다. 고로 인간의 죽음은 썩어 없어지는 자연계 육체냐, 아니면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즉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계" 육체냐 그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 구원에서 필수 요건입니다. 죽으심만으로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소위 "부활복음론"도 이상 설명과 같은 성경의 바른 해석을 겸해야 성경적이게 됩니다. 단순히 우리 구원의 핵심이 십자가 죽으심에 있느냐, 부활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는 성경 이해에서만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메시야 구세주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 한 대로, 아담이 처음 초자연계 육체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초자연계 몸이 지금과 같은 자연계 몸이 되어 결국 죽게 된 인간의 비정상 상태를 역으로 치올라가 정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십자가 죽으심은 아담의 범죄 후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부활은 그 범죄 전 영생하는 초자연계 육체로의 회복 곧 정상 상태로 환원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이니, 처음 출생은 범죄로 죽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 즉 "죽은 자"가 되는 것이지만, 이와 짝(대칭/對稱)이 되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영원한 선물로 받아 모심(예수님을 마음에 영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써 완전히 국면 전환을 하게 되는 짝을 이룸입니다. 전자는 물질인 육체와 걸맞게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나 후자의 경우 성질이 정반대로 나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에 의해 사랑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수용하여 나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되는 구원이기에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사랑으로써 역사(役事)


자연계 동식물에는 생명과 죽음이 병존하지 않느냐 하겠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위의 설명과 같이 '죽지 않음' 곧 영생입니다. 가령 동물은 개개인 사람처럼 영혼이 없으므로 개면 개, 고양이면 고양이 이렇게 종(種)으로서 헤아려질 뿐이지 '마리' 수(數)로 따져지는 각 개체는 인간으로 말하면 일종의 '신진대사' 작용에 해당될 뿐입니다. 묵은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듯이 개 한 마리는 죽어도 개라는 '종'은 창조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건재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영혼이 있어 태어날 때 육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지만 영혼은 그 육체가 생성되기 전후로 해서 하나님께로서 나는 고로 아담 창조와 같은 개별적인 창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와 죽음 이후 이러한 영원한 영혼과는 관계 없이 육체는 아담의 범죄 후의 육체 즉 이 죽음과 썩음의 자연계 육체입니다. 아담은 범죄 전에는 죽지 않는 육체였다는 뜻입니다. 고로 인간의 죽음은 썩어 없어지는 자연계 육체냐, 아니면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즉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계" 육체냐 그 차이에 있습니다.


때문에 이상 바울 사도의 설명에서도 "사망이 사람(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마지막 아담"이신 메시야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고전 15:21) 했습니다. 이것을 무리한 사람들은 또 "영적" 죽음이라 하겠지만 앞서의 설명대로 짝의 법칙이라는 것은 '본질'은 같고 '성질'이 정반대되는 것끼리 하나로서 작용되는 이치입니다. 사망과 부활은 죽음과 생명으로서의 대칭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영적 죽음이라면 부활도 영적 부활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어처구니 없는 궤변도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육체적 죽음 다음의 육체적 부활됨에 있으니까 본질은 같고 성질이 정반대라는 원리대로 하면 당연히 아담의 "사망"은 육체적 죽음이지 "영적"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 구원에서 필수 요건입니다. 죽으심만으로 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소위 "부활복음론"도 이상 설명과 같은 성경의 바른 해석을 겸해야 성경적이게 됩니다. 단순히 우리 구원의 핵심이 십자가 죽으심에 있느냐, 부활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는 성경 이해에서만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메시야 구세주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 한 대로, 아담이 처음 초자연계 육체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초자연계 몸이 지금과 같은 자연계 몸이 되어 결국 죽게 된 인간의 비정상 상태를 역으로 치올라가 정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십자가 죽으심은 아담의 범죄 후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부활은 그 범죄 전 영생하는 초자연계 육체로의 회복 곧 정상 상태로 환원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이니, 처음 출생은 범죄로 죽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 즉 "죽은 자"가 되는 것이지만, 이와 짝(대칭/對稱)이 되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영원한 선물로 받아 모심(예수님을 마음에 영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써 완전히 국면 전환을 하게 되는 짝을 이룸입니다. 전자는 물질인 육체와 걸맞게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나 후자의 경우 성질이 정반대로 나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에 의해 사랑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수용하여 나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되는 구원이기에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주님의 계명,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요 14:15,21,23,24)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순종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믿는다고 해도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니 모든 말씀과 뜻에 대한 순종이지 "교회(에서 지시하는)에 대한 복종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위적으로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으니 성경대로 가르치고 지시하면 성경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지 교회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성경 외적인 것을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따르라고 하는데 반드시 각자 성경을 살펴 성경적인지 여부를 직접 살펴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성경은 베뢰아인들의 예를 들어 칭찬합니다(행 17:11).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처럼 초자연계 몸으로 당장 변환되어야 하는데 왜 여전히 믿기 전 상태와 같은 이런 자연계 몸이냐. 그것은 우리의 머리되시는 주님과 함께 한 몸을 이루는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당연한 모습이 필여적이므로 그러합니다. 한 몸이니까 같은 모양새를 이룸이 마땅하고 같은 상태에 있음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즉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 받는"(12:26) 것이 당연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성령 받음 즉 구원됨을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바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이셨습니다. 머리와 몸이 똑같은 환경이어야 함과 같이 주님과 내가 똑같은(단지 우리는 양자(養子)라는 것뿐-롬 8:15,23)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들로서의 똑같은 대우를 해주시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일부러 나 위해 사람이 되심과 같이 나도 바로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에 있어야 마땅하지만(그러나 나의 분신으로서의 머리되신 주님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과 같이 나도 함께 현재 하늘에 함께 앉아 있는 모습-엡 2:6),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기 위해 다시 말해 사람 살리는 일을 함으로써 핍박과 환난을 무릅쓰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혹은 머리되시는 주님의 보내심을 입어 그 몸의 지체 각 부분으로서) 사람 살리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


우리가 지금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억지로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분리해서 하나를 더 강조한다거나 다른 하나를 덜 여긴다거나 하는 "말씀 혼잡"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하여 백해무익입니다. 야고보가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은 사람이 선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경고했습니다(약 3:1).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한 바울을 본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이 자세부터 터득해야 비로소 강단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함이 정상인데 오늘날 전혀 그런 것을 거론하지조차도 않는 것은 자못 유감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힘쓰는 것도 본의 아니게 "말씀 혼잡"을 초래하지 않는 한 가지 지혜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성령께 대한 올바른 이해 결여가 문제를 낳지 않았나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는 성자 예수님 곧 나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장장 6시간에 걸쳐 고통 중에 운명하신 사랑하는 나의 주님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전 그 영광스러운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신 그대로, 육체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그 영(하나님,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는 오늘날 그 몸된 교회가 위치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마 28:19)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 또는 "나의 영"이라 하시지 않은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둘이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구별해서 강조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혹자의 주장대로 부활하신 후 하늘 성소에 오르시어 십자가 죽으심의 하나님 어린양으로서의 마지막 제사를 완료하셨다 운운의 이론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처럼 똑같이 되신 것이니, 다시 말해 독생자 하나님이시라 해서 우리와 별다르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 육체 안에 성령이 계셨으므로 그 육체의 활동이 종료되시는 순간 바로 그것이 하늘 성소에서의 <제물 드림>이 되었으니, 이 "단번에 제물로 드림"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운명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듯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제물, 제사장, 지성소(성전의) 등은 대칭 아담께서 세상에 오신 후부터 시작되어 그 죽으심과 부활 전체를 망라해서 이룩하실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여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영"(성령)으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가 되시어 우리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어주신 사실 그 하나만으로써 일체의 모든(구약이 상징했던) 것을 한꺼번에 이루시고 승천하시어 성부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심으로써 남김없이 완결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또 보태고 더하고 빼고 할 것이 일절 없습니다.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희생양으로서 고난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에만 높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으로 예수님과 함께 계시어 동일한 죽음의 고통을 맛보신 것이니 왜냐면 '둘이 하나'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둘의 하나'되심은 불변입니다. 오직 단 한 때 예수님께서 사람되시기 위해 마리아의 태중으로 오실 때에만 한해서 성부 하나님과 격리되어 계신 것이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자 성령이 임하실 때 다시 그 '둘로 하나'되심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성령 임하심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다시 하나님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의미의 '성령 받아 모심'과 일치가 되는 의미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등이 모두 <성부(聖父) 하나님의 바로 앞 면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일련의 사실들입니다. 부활 후 다시 하늘에 올라 성부 앞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시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핵심은 내가 대칭 아담("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마지막"이 "대칭(對稱)"을 의미하므로)과 '둘이 하나'되어 있다는 이 사실에 있습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이 나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거니와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죄의 대가인 죽음을 죄다 치름(지불)으로 인하여 죄 용서가 되고, 그러나 죽어 있는 채로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죄 용서가 무의미하기에(산 자에게 자기 죄 용서가 필요하지 죽어 있을 바에야 죄의 대가인 응분의 죽음으로 죽었은즉 그것으로 영원히 끝장이니까-고전 15:14), 다시 나를 위해 부활하시니 그 나와 함께 '둘이 하나'되어 죽으신 사실을 근거로 역시 나와 하나되어 부활하심으로써 내가 덩달아 주님 덕분에(주님과 나는 이제 불가분의 하나이니까) 이제 살아 있는(아담의 범죄 전 상태로서의 살아 있음이니까 당연히 영생)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이지 이 부활을 엉뚱한 데에다 결부시키면 가장 핵심 요소로서의 의미가 퇴색됩니다. 그 핵심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주님과 나와의 '둘이 하나'됨의 구조이니 모름지기 둘이 하나되는 경우 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즉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될 때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 되는 이것입니다. 육체의 한 몸 됨은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고전 7:4)임을 말합니다. 주님과 나와의 한 몸됨에서는 나의 삶과 나 자신 전체가 주님의 것, 주님의 삶과 주님의 전체가 나의 것이 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행 2:38)의 의미하는 바가 주님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주님이 무덤에 장사지내지심이 바로 내가 무덤에 묻힘, 그 부활 곧 내 부활, 그 승천 곧 내 승천,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않으심이 내가 그렇게 주님과  함께 앉음(엡 2:6). 그리고 권능 및 다스림. 주님이 만유의 창조주로서 다 그의 소유이니까 나 또한 만유의 상속자. 아버지의 상속자. 부활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부활의 핵심적인 의미가 "하늘 성소에서의 완성된 제사를 목적으로 한 부활"일진대 아주 완전히 가려지는 것입니다. 본질을 흐려도 유분수입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어 그랬다면 이제는 알았으니 두 번 다시는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영생하게 되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위의 설명대로의 하나님 목적하시는 바(첫 창조로든 우리의 새 창조로든)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생명의 법칙(둘의 하나됨으로 인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체제)대로 삶으로써 구현되는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요 의, 의의 열매요 선을 행함 등등입니다. 곧 주님이 말씀하신 바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중심은 철저히 배격됩니다. 한 몸됨이 요체이니까 지금은 함께 고통을 당하는 때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골 1:24)이라 하는 것이고 몸된 우리는 이에 합류함으로써 지금까지 연이어지는 교회의 수난사의 기록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써 이 행군/行軍은 끝납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것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구원파"처럼  되어버려) 자기 부인 가운데에서의 무한 기쁨과 평안과 확신과 감사가 넘쳐나느냐 여부를 따져야 한 아버지 품속에서의 형제로서의 횡적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 그 아무리 좋은 설교, 엄청난 초능력의 신유, 방언 기타 등등을 나타내도 활화산 같은 전도의 열심을 나타내어도 하는 짓이라고는 마귀의 주구 노릇뿐입니다. 아주 간단한 척도입니다. 그리고 확고불변의 기준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미워함이요 자기의 모든 소유 버림이요(눅 14:25-35) 사형 형구인 십자가를 짊어직 지고 가는 사형수의 행보(이것은 주님처럼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모든 사람 그리고 교회를 위함이라 그 보람이 또한 엄청난 것),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고자 발버둥치지 않는 유유자적 자유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됩니다.   


바라건대 한마음 교회는 애초 순수한 믿음과 사랑 가운데에서 도약 발판을 찾고 더 이상 이상한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개개인의 위치는 순수함을 압니다. 그 순수함을 보존하는 방법이 빗나가면 만사휴의이니 성령의 계시하심을 따라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일을 개별적으로 게을리하지 않는차원에서 내가 직접 성경을 읽고 가르치심을 받는다는 결의로 스스로를 다져나갈 일이요 섬경과 부합하지 않은 설교나 가르침에 흔들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