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3운법칙

자연계와 초자연계

Tayseek Kwon 2019. 4. 1. 20:50




3운법칙ㅡ인간 生涯의 법칙)(트리니 호모, 파쇼모, trini homo, fashomo, fas homo)



자연계와 초자연계


생로병사는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에 속해 있으면서 이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발언이므로 허공에 뜬 변설(辯舌)에 불과할 뿐 실제 상황은 아니다. 변설(辯說)이 아닌 변설(辯舌)이다. 더군다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그런 목표를 달성한다 하니 앞서 설명한 자아중심의 아류(亞流)일 뿐이다. 무조건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일체가 악의 뿌리다.


선(善)과 의(義)는 그 선과 의 자체를 선호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야 하지 그것을 특정 목적을 위해 즉 자기 구원이나 영생을 얻기 위한 수단 방법으로 삼을 때 위선(僞善)이 된다. 모든 종교의 권선징악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면 그런 선행의 결과가 구원이요 영생, 영락(永樂)이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선이 아닌 위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이 아니고 도리어 악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는 진리는 깃들지 못한다. 왜냐면 수단 방법으로만 사용했기에 일단 그 목적을 달성하면 얼마든지 버리고 폐기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구원을 받아놓고 (그 즉석에서 믿음으로써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그 다음부터 선을 행하고 의를 따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主題)로 삼는 성경의 내용이다. 그러면 의와 선을 자기 구원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기 위해서는 구원부터 그것도 오늘 당일 구원 얻는 것이어야 하므로 은혜로 믿음으로 즉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희소식)이다.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면 머리는 하나뿐이어야 통일성이 있고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데 머리가 여럿이다. 그러면 혼란과 분쟁만 가중될 소지가 충분하다. 그렇지 않다고 누가 감히 보장하랴. 비록 동기는 악하지 않다 하더라도 각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여 서로 머리가 되려 할 것이니 그 북새통에 누가 가히 행복을 보장하리요. 칸트(Immanuel Kant(1724-1804), 독일 철학자)가 소위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에 대해 언급한 까닭이 바로 이 머리(둘도 아닌 단 하나)로서의 절대 가치를 수긍했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을 품에 품는 어버이로서의 조물주시라면 머리로서 위치하기에 충분 타당한 조건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모정(母情)과 부정(父情)을 여과없이 나타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 곧 자기의 전부를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갈 2:20) 사실로서 바로 그 증거가 되어 있음에랴(롬 5:8). 다시 강조하거니와, 최대 행복의 삶의 조건이 바로 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비롯되는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타주의로 나가는 데에 있음이니, 이기주의 곧 자아중심은 그 반대 개념이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이 오직 믿기만 하면 되는 조건을 단 것은, 특정 사실(예컨대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 등)을 사실로서 수긍하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자기 부인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 구원의 목적을 명백히 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즉 이제부터의 산 사람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후 5:14,15/롬 14:7-9).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는 당위성에서 나오는 것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으니 나를 위해 살 그 나 자신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부합하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것은 그 성령이 내게 영혼처럼 되시고 나는 그 영혼의 육체처럼 되어, 영혼과 육체와의 상관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와 같은 것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분이라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할 필요성이 사라졌음이다.



그러면 내 아무리 이 한 몸 체제에서 가장 미미한 꼬리 중의 꼬리 부분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지체가 다 나를 위하는 구조이므로 내가 마치 머리인 양 최고도의 대접을 받게 되는 완전한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껏 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니, 왜냐면 이런 구조에서 나는 남을 위하면 위할수록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결과로 부메랑(a boomerang, 적을 향해 던지면 적을 맞추지 않는 한 자기에게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사용하는 일종의 무기)처럼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목표는 나 자신이 아닌 상대를 향하는데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효과다. 내 이웃들이 모두 나를 위하니 그들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남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 한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서 무조건 남을 위하는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면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 다 그러할 때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나 자신이 곱절로 증대되어 위해지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내 이웃의 숫자가 일억이라면 나는 일억 배의 나 자신을 누리게 된다. (자아중심일 때는 이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것이 이상향이다. 이상향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만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제대로 된 방법을 취하지 않고 엉뚱한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에 이상향 타령이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아중심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상보성 이론' 또는 '음양 이원론'과 '3위1체 원리'와의 차이                                                    

사람마다 개성이 있어 그 가진 바가 가지각색이다. 말하자면 나는 파랑 색인데 내 이웃은 빨강, 노랑, 초록 등 현란하기 짝이 없다. 이럴 경우 모두가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면 오직 나로서는 자기를 부인하여 이타주의로 나가는 것뿐이나 그 모든 색깔이 바로 나의 것이 되어 내가 실컷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공통으로 모시고 있는 세계의 삶의 체제다.


왜냐면 3위1체의 원리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소유가 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다시 말해 모두가 힘 안들이고 저절로 굴러 오는 내 것이 되어 있다. 필요할 때 그들에게 가기만 하면 그들은 저마다 충심으로 하는 소리가 "나는 당신의 것이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해드리리다" 하고 자처해 오는 판이요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그러하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나를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를 확증해 보이셨다(요일 3:16/롬 5:8).



반면에 자아중심(自我中心, selfishness)이 되어 있으면 서로가 자기 것이라 하여 움켜쥐고 있는 판이라 빼앗지 않으면 도저히 그 여러 색깔을 맛볼 재주가 없다. 그래서 뺏고 훔치고 싸우고 정복하고 설욕하고 엎치락뒤치락으로 결국 남는 것은 공멸(共滅)뿐이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하고 따라서 벌써 그렇게 망했을 터이지만 하나님의 강제력이 있어 이 정도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 그 증거가 바로 3운법칙이다. 아무리 죽이려 해도 제 때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죽지 않도록 되어 있음을 화려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의 손에 죽어도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죽으니 그 살인행위가 성공하게 된다. 그러면 죽을 때가 되어 어차피 죽을 것이니 그 살인자는 허물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상대야 죽을 때가 되어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죽을 것이지만 그 살인자만은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상대를 죽일 의사를 품고 행동에 옮겼으므로 고스란히 그 죄가 그대로 구성되고 그 당연한 보응을 받게 된다. 고로 3운법칙은 살인자의 살인을 막는 것이 되니 해를 입을 뻔한 이에게는 보호막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런 강제력이 동원되는 것은 구원 받을 사람은 남김없이 다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원래 삶이란 이렇게 강제로 규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될 사람 다 구원되도록 억지로라도 이 악한 살인자들의 세상을 붙들고 계시자니 부득불 이런 3운법칙을 정해서 세상을 관리하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3운법칙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만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유효적절한 안전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위의 3위1체의 원리 도식(圖式)에서 보듯이 흐름의 방향은 일정하여 상대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됨을 인하여 즉 병(c)을 통하여 갑(a)에서 을(b)로만 가던 것이 을로부터 갑으로도 동시에 흘러가는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의 이치를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3위1체의 원리를 설명하는 도식은 바로 3운법칙의 구성도(構成圖)이기도 하다. 그래서 3운법칙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한다 하는 것이다.



이상 갑, 을, 병의 구조도(構造圖)에서 언제나 병은 보름달, 갑은 반달의 모양으로서 상현(上弦)과 비슷한 모습, 을은 그 반대인 하현과 비슷한 모습을 취한다. 병(丙)의 검은 바탕이 갑(甲)과 을(乙)에서는 반분(半分)한 것으로 나타나니, 이는 갑과 을이 병으로부터 나왔음을 의미한다. 병이 을을 낳음(파생시킴)으로 스스로 갑이 되었음이다. 갑에서 을이 나오고 갑이 을을 낳았으므로 자기의 닮은꼴이지만 같지는 않으니, 이 '같은 본질이면서도 같지는 않은 별개'임을, 갑, 을 서로가 반분된 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검은 바탕의 위치를 정반대가 되도록 바꿈으로써 나타낸다.


이렇게 갑과 을이 양립해 있으나 독립해서 움직이지 않고 병과 아울러 3각(脚)(tripod)의 모양새를 취하여 삼각(三角)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이는 갑과 을이 불가분임을 병으로써 나타내고 있음이다. 갑과 을로 둘이 양립되어 있으나 각자 스스로를 따로 나타내지 않고 반드시 애초에 병 홀로(또는 갑 홀로) 있던 때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려 하여 바로 그 모습 즉 둘이 아닌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이 나타내려는 성향임을 바로 병으로써 나타내 보임이다. 따라서 병의 모습은 갑과 을로 나누어지기 전 원래의 상태를 나타냄과 동시에 현재의 갑과 을이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보이기도 한다.



반 쪽으로 나누어 있던 검은 바탕이 하나로 뭉쳐지면 온통 검은 바탕이 되니 바로 그런 설명이 된다. 홀로 있는 것보다 둘로서 존재하는 것이 더 나으며 그러나 둘이 서로 어긋남이 없이 하나로서 존재하면 더더욱 나은 것이다. 그래서 굳이 하나로서의 모양새를 유지하려 함인데 그러려면 즉 하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를 구사할 수 있는 인격성을 지닌 영적 존재(사람처럼 영혼이 있거나 아니면 영물(靈物)처럼 그 육체 자체가 신령한 몸이거나)일 경우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엄중한 조건이 붙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이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3원법칙의 구조상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게 되겠지만) 꼭 아래 그림과 같은 3자(者)의 정립(鼎立) 형태로서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만 아니라, 갑과 을의 경우 검은 또는 흰 반(半) 쪽 바탕의 위치가 서로 엇바꾸어져 있는데, 바로 이 모양새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타내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그 열쇠가 되는 것이 3가지 유형(FS, OT, SN)을 나타내는 수식(數式)에서의 '19'라는 숫자다. 갑, 을, 병 중 '을'에 해당되는 유형(SN)에 속해 있다.



즉 3가지 유형을 간단히 말하면, '병(丙)'에 해당하는 것이 FS유형인데, 인간 생애를 7등분하여 그 전성기(LP, Lively Period)가 그 4/7, 그 반대인 침체기(DP, Dull Period)가 나머지 3/7이다. 가령 사람이 만 70세에 죽었다면 7등분이니까 10년씩이고 그 전성기는 40년, 침체기간은 30년이 된다.


두번째 유형으로서 '갑'에 해당되는 것이 OT유형인데, 균일하게 3등분하여 DP, LP 모두 1/3씩 되는데 나머지 1/3은 초창기(草創期, JP, Joseph's Pattern)기간으로서, 이는 '을'에 해당되는 것(SN유형)에도 동일하게 존재하나, '병'에 해당되는 것(FS유형)에는 없다. 문제의 '19'를 나타내는 SN유형('을'에 해당되는)은, DP가 7/19, LP도 7/19, JP는 5/19다.


5는 이 '19'와 관련되어 계산될 때 나오는 것이므로(19-7-7=5, 7+7+5=19, 19-(7x2)=5, 19-5=7x2 등과 같이) 별다른 의미가 없고 유별나게 이 '19'가 생소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두 유형의 7, 3, 4, 1 등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낯 익은 숫자인 것이다. 그러나 '19'만은 낯설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 '19'라는 숫자야말로 위의 그림에서 갑과 을을 나타낼 때 흰 또는 검은 바탕을 서로 반대되도록 엇바꾸어 놓은 뜻을 고스란히 그대로 담아 내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이는 갑과 을을 57등분했을 때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즉 위 그림과 같이 19와 3을 각기 도치(倒置, inversion)시켜  등분하면 '갑'과 '을'이 된다는 그 뜻이다. 세 유형의 상관 관계에서 갑(OT)과 을(SN)은 똑같이 57등분이요 이에 반해 병(FS)만이 56등분이다. 이 숫자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하려면 할 수 있으니, 즉 모두가 균일하게 56등분이거나 57등분이어야 할 것 같으나, 갑과 을이 병과 다르다는 차별을 나타내어 갑과 을은 동일하게 57이나 병은 '1'의 차이를 보이는 56인 것이다.


말하자면 '갑'과 '을'이 주축을 이루고 '병'은 곁다리임을 이로써 드러낸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이 3가지 유형의 셈법이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어린 아이(초등학교 저학년)라도 풀 수 있는 산술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병에는 없고 갑과 을에만 있는 JP 기간은 위의 그림에서 병의 색깔을 갑과 을이 반분하여 나누어 가지는 모양새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이 초창기(JP)의 DP 및 LP도 병의 DP, LP와 똑같이 3/7, 4/7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JP를 FS형의 축소판(축소형)이라 한다. 초창기의 DP, LP라는 것은 그 기간 중에서도 사람의 어릴 때의 성장 환경이 보다 나았던 때와 그에 비하면 조금 또는 상당히 못했을 때와를 구분해서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암울했던 시기와 화창했던 시기의 구분이다. 그리고 3위1체 원리의 '병'에 해당하는 유형(FS)은 7등분이고 '갑'에 해당되는 유형(OT)은 3등분인데, 3등분의 '3', 7등분의 '7'은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에게 친숙해 있는 숫자로서 이는 현재의 '갑'이 원래 '병'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잘 상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갑'이 균일하게 3분의 1씩 DP, LP, JP가 나누어져 있으니 이는 이 3자 중 주축(主軸)이 되어 있는 '갑'의 성격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할 것이다.



'을'은 단지 '갑'의 닮은꼴로서, 본질은 똑같으나 갑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갑의 형태를 도치시킨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와 ◑이요, 이 경우 병은 물론 ●이다. 3위1체의 원리 도식(圖式)이 ◐, ◑, ●의 3각(脚) 구도(tripod)로 되어 있는 이유다. 바꾸어 말하면, 3운법칙이 이러한 모습의 3위1체의 원리의 구성도(構成圖)를 처음으로 드러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3위1체의 원리가 이러한 모양새로 있는 것을 3운법칙이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기보다, 3운법칙이 알려짐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된 3위1체 원리의 모습이라 함이 더 타당한 설명인 것이다. 그만큼 3운법칙의 발견은 중요한 것이다.


레오날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과학자)는 "수학과 결부시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한 것'이라 했고, 철학자 칸트도 "모든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학에 의하여 증명될 때 한해서만 실제 학문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했다. 3운법칙이 여기에  아주 들어맞는 것이다. 간단한 산술로써도 누구나 계산해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섬세하게 구성시켜 놓은 짜임새의 '인간 생애를 철두철미 관장하는' 3운법칙. 가히 21세기의 경이(驚異)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보어의 상보성 이론에 비할 때, 3위1체 원리의 특징은, 상칭(相稱, 혹은 대칭)을 이루고 있는 a(갑)와 b(을)의 '양자(兩者)  관계를 c(병)로써 설명'함에 있다. 즉 서로가 대등한 것이 아니라 a가 b보다 크다는 사실을 추가한 것이고 이 점을 강조함에 상보성과의 차이가 있다. 즉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점이니, 음양 이원론이 이에 보다 가깝다고 하는 것은 양을 음보다 큰 것으로 설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음양사상'은 "이원론"이라는 말 그대로, 큰 것이 작은 것을 파생시켰다는 엄연한 순서를 말하지 않고, '단 하나'만 있던 것이 서로 '대립되는 둘'로 갈라졌다고만 말하니, 3위1체의 본질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둘이 같지 않다 즉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는 것만 말하고 대소, 주종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원인에 대해서는 오직 함구(緘口)하고 있으니, 이 역시 3위1체 원리와의 차이다. 이런 모든 '결과'에  대한 설명은 "창조"(創造)라는 '원인'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오리무중(五里霧中, 5리에 걸쳐 짙은 안개 속에 있어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일에 대해서 도저히 알 길이 없음을 가리킴)일 수밖에 없다.


즉 3위1체의 원리가 인과론을 확증하고 있는데 이 인과론을 외면하니 3위1체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된다. 원인은 무시한 채 결과로 나타난 형태상의 설명만 하고 있을 뿐이니, 이런 결론이야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대수로운 것도 아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 어떤 대칭 관계를 보아도 반드시 그 기준형이 있고 난 다음의 그 대칭형이 생기게 마련인즉 항상 이와 같은 형식의 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있음(기준형)과 나중 있음(대칭형)의 차이 곧 기준형과 대칭형의 엄연한 구별이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별인 것이다. 이를 실제 하나의 원리로서 나타내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다. 나중에 생겨났다는 것은 먼저 있던 것으로부터 당연히 생겨난 것임을 가리킨다. 작도를 해도 먼저 기준을 정한 다음 그 닮은꼴을 만든다. 그러니 전자가 당연히 크고(파생시켰으니까) 후자는 작을(파생되었으므로)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소 관계만 아니라 주종(主從, 하나는 인도하고 다른 하나는 이를 따르는 것) 관계를 형성한다. 이것이 인과(因果) 관계다. 원인이 있은즉 결과가 있고 이 원인과 결과는 따로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로서 그 모습을 드러냄이다. 즉 인과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인 것이다. 양성 평등주의자는 이 말에 발끈 할 것인가. 그러면 모녀 관계라 할까. 그래도 편파적이다. 그러면 '부녀 또는 모자 관계'라 할까. 앞뒤의 순서를 따지니까 이 역시 어느 한 쪽은 반드시 못마땅히 여기게 되어 있다.



그러면 이런 경우 이런 표현은 항구적으로 쓸 수 없는 것인가. 이런 간단한 예에서도 보듯이 소위 "평등"의 잘못된 개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평등"이란 것은 '차별 속의 조화'가 그 정확한 개념이다. 대등하지 않으면서도 평등이니 어찌 보면 역설적이기는 하나 실상은 진실이요 진리다. 왜냐면 3위1체 원리의 3각(脚) 구도에서 '갑'과 '을'은 확실히 상반되는 것으로서 모순이요 절대로 화합이 안된다. 그럼에도 하나로서 조화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병'의 개념인 것이다.


대등한 데에서는 절대로 그런 행복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주종, 대소, 인과 관계를 형성한 데에서만 '조화로서의 평등'('개별적인 평등'이 아닌)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대표성'을 인정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어떤 조직에서든 집단에서든 대표가 있게 마련이다. 이 대표를 때에 따라서는 "장(長)"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대표성이 바로 '병'의 존재요 그 역할인 것이다.



가정에는 가장(家長)이 있게 마련이다. 가정에도 이렇게 당연히 대표가 있다. 머리와 몸의 관계다. 만물은 항상 이런 대칭성을 띠게 마련이다. 먼저 있던 것이 머리이고 나중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 몸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에서 이는 확인되고 또한 비롯된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니 이 '하나'로 계심을 일컬어 "아버지"시라 할 수도 없고 "아들"이시라 할 수도 없어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는 이름이 "성령"이시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기 때문에 아들께서는 아버지보다 작으시고 아버지보다는 나중에 계심이다. 반면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시고(요 14:28) 먼저 계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주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따르신다(요 5:19,30/8:28/14:10). 아들께서 모르시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아신다(마 24:36). 이렇게 엄연한 차이가 있다. 결코 대등, 평등하지 않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친히 본을 보이시는 대로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아들만을 위하시므로) 아들께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아들께서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시므로 아버지 친히 아들 안에서 즉 아들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행하고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의미가 됨은 당연하다(14:10).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의 본질이자 특징이다.



우리가 구원되는 것도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의미함이니 이를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20:21) 표현됨은 당연하다. 아들께서만물을 창조하셨으니 곧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창조주 홀로 계시지 않고 그 위에 보다 더 근본이신 이가 계시니 곧 아버지시다. 그래서 아버지 친히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설명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은 빈 틈 없이 꽉 차 있는 구조와 체제가 된다. 최고 근본이시고 원초(原初)로서의 창조주 친히 홀로 계셔도 무방하고 충분한데도, 또 ‘그 위의 분’이 계신다 함이니 얼마나 든든한 기분이 드는가. 더군다나 그 아버지께서 아들과 똑같이 움직이시어 아들과 하나로서 계심이 아닌가. 바로 이렇게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고 그러나 둘이 따로 계시지 않고 하나가 되어 계심으로써 갑(a), 을(b), 병(c)으로서 정립(鼎立)해 계신 모습을 따라 만물을 만드시니 여기서 '만유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가 태동되어 나온 것이다.



그 만드신 피조물로서 이런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그 형태를 띠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니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다"(롬 1:19)고 단언한 것이다.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하는데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19-21)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대로 만유가 창조된 까닭에, 보어의 "상보성" 이론이나 음양 이론도 이를 근거하므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일단 비쳐지나, 그러나 단지 맛만 약간 보였을 뿐으로 그 배후에 엄청난 사실과 원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만 모두에게 던져 주는 채로 강한 인상만 남기는 정도였는데, 이제 그 원리가 성경을 통해 온전한 모습대로 드러나진 것이다. 처음부터 성경은 이를 설명하고 있었으나 우리 인간의 인식이 이를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우주 만물이 이 원리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제조표(製造標, make mark)라 하는 것이다.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음이 드러나진 까닭이다.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도 바로 이 원리를 따름이니 곧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이다. 무릇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들은 이 원리를 따르지 않음이 없다 한 그대로다. 성경의 그같은 표현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에서 이 3위1체의 원리가 밝혀졌기 때문에 신학용어로서의 ‘3위1체’를 그대로 원용(援用)하여 "3위1체의 원리(the law of Trinity)"라 한 것이다. 
 

"trini law", "trini homo", "trini econo"


3위1체의 원리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우주 질서의 원리원칙을 성경만이 밝히고 이를 설명하고 있으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3위1체"(trinity)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직접 표현하고 있는 말은 아니지만, "성부(聖父, the Father), 성자(聖子, the Son), 성령(聖靈, the Holy Spirit)의 이름"(마 28:19)이라고 말씀하신 데에서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로 같은 의미의 말씀을 그리스도 친히 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기에, 알기 쉽도록 그대로 따와서 이름을 지은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다. 부르기 쉬워야 하므로 "trini law"라고도 한다.



이와 일치되게 인간 생애의 법칙(3운법칙)도 "트리니 호모(trini homo)", 경제 3환법칙도 "trnini econo"다.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또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3환(環)법칙이라는 것은 3위1체 원리의 갑, 을, 병 3자(者)의 순환 즉 갑→을→병→갑을 하나의 경제 원리로 정착시킨 것을 말하다.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 지금까지 구 시대의 모세 율법의 십일조 정도를 내는 것으로만 최대한의 사회 기부 행위로 알았지, 자기 자신 자기 부인으로써 가난하게 살면서 전부를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으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 3환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간단히 말해 기업 경영자가 자기의 기업 이익을 전액 사회에 환원시킨다고 할 때 소비자의 사랑을 받게 되고 결국 그 기업은 발전하지 않을 수 없고 이래서 이 운동은 확산되어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부조리가 인간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하나님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삶의 원리는 한 몸됨에 있어 이런 체제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자기 부인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각자 자신의 삶을 똑같이 공평공정하게 최대한으로 확대, 확장, 확충시켜 사는 것이니, 고로 가장 이상적인 삶의 유일한 실천 방안이요 지혜이다.



이런 방법이 있는데도 성경대로 믿지 않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착안하지 못하고 거의 사장(死藏)시켜 온 것인데 결국 이 마지막 때이기는 하나 드러내어졌으니 하나님의 은혜다. 누구든지 이 3환법칙대로 행하는 이는 진실로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고질적인 사회적 폐단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경제적 평등의 이상적인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원칙대로 살아 형통하는 것을 아무리 악한 이 세상 지배자(사타나)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 그가 이 세상 지배자이기는 하나 막지 못하다.


그의 역할의 한계는,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고 눈뜨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니, 따라서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이런 원리로써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부조리의 정화(淨化) 운동을 펴는 이가 전무하다시피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단 3환법칙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삶에서의 기본은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부인이다. 이런 정상적인 삶의 도리를 따라 행하는데 악령들(이 세상 지배자로서의)이라고 해서 간섭하거나 방해할 권한은 없다



여기서 '방해'라는 것은 그런 사업체를 융성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행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공격을 가하고(요 13:2/고후 10:4,5)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받아 우리의 육체에 한정된 해를 끼치는 것이야 할 수 있지만(욥 1:1-2:7), 이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일 자체는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비록 인간에게는 죽음의 세계이지만 하나님의 원리원칙만은 영원히 확고 불변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비록 적(敵) 그리스도의 때가 진행되더라도 이 사실은 변역(變易)될 수 없다. 
 

삼운(三運) 법칙


"삼운(三運) 법칙"은 '인간 생애의 법칙'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애를 마름질하는 것이기에 '사람 운명의 세 가지 갈래'라는 뜻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운(命運) 즉 운수와 명수(命數)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을 둘러싸고 닥치는 여러 가지 선악과 길흉을 가름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인생의 제반 사건이 필연의 초인간적 위력 곧 하나님에 의해 지배된다고 할 때는 그 지적이 옳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길흉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LP(Lively Period, 전성기 또는 활동기)와 DP(Dull Period, 비활동기 또는 침체기)로 인생의 전체 생애가 일정 기간 나누어지기는 하나 그 두드러진 특징이 일반 점술 따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계의 거두 효봉 선사는 젊을 때 세상이 부러워하는 판사 직에 10년간 있었음에도 그 기간이 그의 활동기로 나타나지 않고 침체기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해당 인간의 그 생애의 색채를 아주 정확하게 집어내는 것이므로 길흉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어릴 때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고승(高僧) 이효봉(1888-1966)은 평남 태생으로, 그의 LP가 법정(法廷)을 울리던 판사가 되는 때부터도 아니고 승려가 될 때부터도 아니고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민족주의 독립투사에게 본의 아닌 사형을 선고하게 되자(어떤 기록에는, 죄수를 오판하여 사형선고를 내려 사형 집행을 하고 나니 그 후 진범이 나타났기 때문이라 하나) 심적 부담을 느껴 10년간 입었던 법복을 미련 없이 팽개친 후 야인이 된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독립투사들의 처벌은 동족인 조선인 판사들이 담당하도록 했기 때문에 내심 하루하루가 고뇌에 찬 삶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바 길흉화복의 점괘와 같은 활동기와는 전혀 판이한 것이다. 그래서 가족  몰래 서울로 가서 신사복을 벗어 버리고 엿장수 행색이 되어 3년간 정처 없이 8도 강산 방랑생활을 하다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승려가 되는 시점 역시 그의 LP(활동기)와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 이런 것이 ‘trini homo(인간 생애의  법칙, 3운법칙, 트리니 호모)’의 감히 범하지 못할 그 자체만이 지니는 권위이다.


다시 말해 해당 인물의 생애의 색채를 선명하게 진단하고 부각시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이 아는 대로의 활동 여하에 따라 마름질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참새 한 마리도 창조주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짐이 없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마 10:29-31) 하신 말씀대로, 창조주의 직접 개입(介入)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 증명인 것이다. 한 인간의 진정한 색깔이 저울질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공통점을 나타내는 것이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소프라노) Jenny Lind(1820-1887)다. 그는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목소리가 고운 사람)"로 불려질 정도의 당대의 명가수로 성공하여 당연히 수입도 상당하였으므로 부도 쌓았고 그래서 자선가(慈善家)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성경을 매일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대 생활이 자기의 믿음 생활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과감히 무대를 떠나 버린 그 특유의 생애를 3운법칙은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음이다. 



Jenny Lind의 생애 역시 가수 생활을 처음 하기 시작한 즉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때로부터(Lind는 우리 나이로 19세(1838)에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그 후 11년간 줄곧 화려한 무대를 장식하다가 30세에 무대를 떠났다) LP가 시작되지 않고, 한창 나이와 한창 잘 나가던 생의 최고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시점에 와서 홀연히 무대를 떠난 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효봉 선사와 같은 생애의 유형이다.


효봉 선사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특이한 의미를 따라서 효봉 선사나 Jenny Lind나 3운법칙에 따라 활동기(LP)와 비활동기(DP)가 어김없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어김없다"는 것은 수치 상으로 정해진 1/3, 7/4 또는 7/19로 정확히 맞추어진다는 뜻이다. Jenny Lind가 그런 화려한 무대 생활을 스스로 원치 않아 떠났기 때문에 그의 화려한 가수 생활이 그의 LP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트리니 호모(3운법칙)'의 뜻이다.



그 후 음악 활동을 간헐적으로 계속하기는 했으나 무대 생활에서는 완전히 떠난 것이다. 효봉 선사도 이제는 더 이상 원치 않아서 판사직을 미련 없이 털고 나왔으므로 세상 사람들이야 아무리 그런 자리를 흠모해 마지않아도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라 그 판사 재임 기간(10년간)이 그의 LP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것이 trini homo(인간 생애의 법칙)의 기묘한 특색이요 특성이다. 이를 두고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치면 코걸이 식이라 감히 말할 것인가.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상 두 사람의 생애 분석이다. 즉 똑같은 사례가 여러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이 인정되고 있음이다. 결코 편한 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이와 약간 다르기는 하나,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LP(통상적으로 말하는 활동기)가 아닌 DP(비활동기로 보통 설명되는)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것이 LP로 붙여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공통점이 여러 사람의 생애에서 나타날 때에 그 확실성은 보장되는 것이다. 결코 생애 분석자 임의의 해석이 아님이 입증된다는 그 뜻이다.



이로써 3운법칙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즉 지금까지 세상에서 알고 있는바 '생년월일로 길흉화복을 헤아리는 점성술이나 사주(四柱)' 따위와는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임이 자체 증명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3운법칙이 우리에게 집어내어 주는 의미는, 남들은 아무리 하늘처럼 위하는 직업이라도 자기가 싫어서 버릴 때에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나타내어 주는 정도로만 그치지 않고, ‘그런 판사직이라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양심의 자유를 찾은 인물’ 곧 구도자로서의 특징을 지니는 생애였다는 뜻 풀이까지 정확히 해 주는 데에 있다.


Jenny Lind의 경우 ‘세속적인 영화나 갈채나 명예나 부귀보다 자기의 개인적인 영혼의 갈구를 더 중시했던 사람’으로 그 생애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있음과 같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치수를 자로 잰 듯이 나타내는" 3운법칙이 그렇게 족집게로 집어내듯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으니 어이 하리요. 이런 사람들의 생애가 이와 같이 '공통적으로 분류되어' 나타나는 데에서야 누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인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간디와 네루도 이런 점에서 좋은 대조가 된다. 간디는 7년을 옥살이했지만 옥살이도 당당한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본 그대로, 그렇게 감옥에 유폐된 기간이 간디의 LP(SN유형)에 당당히 포함된다. 반면에 네루는 간디와 달라 옥중생활은 독립운동에 지장을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10년간의 옥중생활은 DP(FS유형)로 나타나 있다. 간디가 그렇게 믿은 대로 3운법칙이 그런 식으로 책정된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책정되어짐으로써 간디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해야 옳은 판단이냐,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음 먹은 대로 나타나는 3운법칙이라면, 단명하는 사람 치고 오래 살기를 바라지 그 정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는 자살하는 이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니 다 장수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는 않다. 그러므로 3운법칙은 당자야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저런 욕구와는 상관 없이 철저한 하나님의 통치, 통제의 수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이상과 같은 사례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친히 개입하심을 입증함이다.



인간 생애를 일일이 주재,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그런 증거로서의 의미이다. 효봉 선사는 당시(일제 강점기)만  해도 쟁쟁했던 판사직에 있던 기간은 LP에서 제외된다. 승려가 되면서부터 LP기가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판사직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그 날부터 그의 LP가 시작된다. 당시 세계 무대를 주름 잡던 오페라의 여왕 Jenny Lind 역시 그의 명성을 드높인 11년간의 쟁쟁한 무대 생활이 그 LP에서 제외된다.


그 역시 그런 화려한 가수로의 부(富)와 명성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던진 그 때부터가 LP다. 인생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낀 효봉 선사나, 자기의 믿음 생활이 세속적인 무대 생활로 인해 손상을 입는다고 느낀 Jenny Lind나, 남들은 끔찍이도 위하는 그런 직업과 명성을 미련없이 내던진 바로 여기에 그들의 생애의 특점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생애의 색깔을 3운법칙이 유감없이 그대로 집어내어 나타내주고 있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리요.



그러니 두 사람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했고 원하지 않는 것은 미련없이 버렸으므로 당사자들에게는 진정한 '활동기(LP)'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기간을 '비활동기(DP)'로 불러 하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활동기, 비활동기라는 명칭 대신 '트리니 호모'의 성격에 맞게 LP, DP로 부르는 것이다. 가령 Jenny Lind의 생애에 대한 3운법칙(trini homo) 다이어그램(diagram, 도표)은 Lind 본인만이 그릴 수 있는 다이어그램이라 할까.


만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령 Jenny Lind의 '트리니 호모'를 작성한다고 할 때에는 백이면 백 사람 다 그의 11년 가수로서의 활동 기간을 그의 LP에 포함시키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면 이것을 보고 각자의 3운법칙은 본인 당사자 스스로가 나타내는 것이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음을 위에서 이미 단언했다. 왜냐면 나폴레옹의 경우 그의 '트리니 호모'상의 LP에서는 싸우면 싸우는 족족 이기나, 그 기간이 종료되고 DP가 시작하면 싸울 때마다 패하여 결국 망망대해의 고도에 유폐되는 것이다.



스스로 정하는 '트리니 호모'라면 LP를 더 연장시켰을 것이 아닌가. 처음 유폐될 때는(엘바 섬) 보란 듯이 탈출하여 불사조처럼 황제 자리에 다시 나래를 펴고 올라 앉았으나 재차 전쟁에 임했을 때는 이미 그 LP는 끝나고 이미 DP에 들어선 기간이다. 결국 그는 패하여(워털루 전쟁)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갇힌 후로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고 거기서 죽고 만다. 탈출하여 황제로 복귀한 그 짧은 기간이 정확히 DP, LP 어디에 속하는지 계산해보지는 않았으므로 이 점은 누구든 그 다음 분석자가 가려줄 몫이다.


LP기간 중에 DP가 끼일 수 있고 DP 기간 중에 아주 짧은 LP가 끼어들고 있는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나폴레옹 자신이 정하는 그의 LP와 DP라면, 그가 죽을 때도 "나는 영국인들의 부당한 처우에 희생되어 억울하게 죽는다" 하며 54세에 병사(病死)했는데 그렇게 일찍 죽지도 않게 할뿐더러 아예 전쟁에 패하게 되는 DP를 아예 그의 생애에서 빼 버렸을 것이 아닌가. 전쟁 광으로서의 그가 싸움에 패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생애는 얌전하게 OT형으로서의 족적(足跡)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3위1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 표현된 성경 대목에서 "3위1체"라는 신학용어가 생겨났지만, 그냥 신학용어로만 인식되어 왔을 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써 성경이 바로 만유의 기본 원리(3위1체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했던 인생들이다. 3위1체 원리의 갑, 을, 병의 모양새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꼭 그대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에서 이 3위1체 원리가 발원(發源)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근거로 하여 이를 기본 원리로 삼아 만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때문에 "만유(萬有)의 법칙"이라 한다. 우리 구원의 새 창조도 바로 이 원리를 따르셨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내 안에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데(요이 1:9) '두 분으로 함께' 계시지 않고 '한 분의 모습'으로 계신다. '한 분'으로 계시는 것과의 완연한 차이다. ‘한 분’이 아니라 ‘한 분으로서의 모습’이신 것이다. 이것이 병(丙, c)의 개념이다.


아들이시기도 하고 아버지시기도 한 것이 ‘한 분의 모습’으로서의 의미이다. 때문에 아버지만이라 하지도 않고 아들만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한 분’, 아들 ‘한 분’이시라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두 분이 하나로 계시는’ 의미다. '두 분이 함께 계신다'는 것과 ‘두 분이 하나로 계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기에, "성령"이시라는 "이름"(마 28:19)으로 지칭되시는 것이다. 즉 빛은 ‘파동’으로서의 성격도 나타내고 ‘입자’로서의 성질도 나타내지만 항상 하나로서의 존재이니 즉 ‘빛’으로만 존재함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해서(요이 1:9)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어디까지나 한 분으로 계심과 같은 모습이시나 그 모습이 아들이시기도 하고 동시에 아버지이시기도 하다(요 14:9). 두 분 모두의 의미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면 그리스도이시고 아버지로 보면 아버지시다. 우리가 빛을 세밀히 관찰하면 어떤 때는 ‘입자’요 어떤 때는 ‘파동’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단지 ‘빛’일 따름이다.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위치를 확정하면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고 운동량을 확정하면 위치가 확정되지 않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의 조화를 가리켜 "상보적 관계에 있다" 함과 같다. 빛이나 전자 따위의 미소한 입자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실을 예로 든 것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 되어 계심을 가리켜 성령(聖靈, 거룩하신 영, Holy Spirit)이시라 하니,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지라 곧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 성령의 이름이 고유명사는 될 수 없고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 고유명사화할 이유도 없으니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신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을 성령이시라 하기도 하고 아들(그리스도)의 영을 또한 성령이시라 하기도 한다. 고로 호칭상의 "성령"이 아니시니 즉 "성령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고 또한 활동하시므로 이를 가리켜 나타내는 "이름"이신즉, 우리가 부를 때에는 "아버지" 또는 "주(主)"이면 족하다.


둘이시라 해서 각기 모습을 갖추신 것이 아니라 한 모습으로 계심이니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바로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형상"(고후 4:4)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인 그리스도의 모습이시다. 따라서 아버지께 구해도 되고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구해도 응답하신다(요 16:23/14:14).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들으심이요 주님(이 경우 대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께 구하면 주님(Lord,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라는 뜻으로서,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께서 들으신다.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도 "주님"이라 할 수 있음은 이런 주종 관계에서다(행 4:29). 아버지와 아들께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계심을 인식하면 족하다(요 14:17). 따라서 헷갈릴 이유는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서 하나되심이나,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구별은 엄연하다(요이 1:9). 영이신지라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고(마 5:16) 내 안에 계신다(마 10:20/요이 1:9).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사람이시니까)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모습이시나 하나님으로서는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심이니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항상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는 아님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심이지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일 수는 없다. 그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는 그리스도(하나님이시자 사람)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써(요 17:23)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심이다. 내 안에 아버지의 영이 계심으로써 그리고 아들이신 그리스도 친히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으로 내가 하나님(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때 항상 자기를 중심해서 판단하는 버릇이 있어 우리가 육체 곧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영이라 하면 우리 영혼만을 연상하는 경향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영이시라 할 때도 그런 식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원래 ‘영’이 온전한 것이고 실체이고 본질이며 ‘육체’ 즉 형태는 오직 피조물로서의 특징일 뿐이다. 즉 ‘실체’에 대한 ‘형상’의 의미이므로 피조물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에 불과함이다.



이 경우 형상이라는 의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 필요할 때에만 한해서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터라 형상과 실체가 불가분으로 되어 있듯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구별로서 ‘형상’이 필수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그 형상이 되어 있는 만물(친히 창조하신)을 보고서 넉넉히 인지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는 하나님이 계시는 줄 몰랐다"는 핑계와 변명이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함이다(롬 1:20).


그것은 변명을 위한 변명이기에 이 세상에서는 억지가 통하는 일시적 장소요 또 그런 시기인지라 그런 말도 통할지 모르나, 실제 심판대에 가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는 그런 의미도 된다. 실상 무신론이라는 것도 무슨 근거가 있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이 세상 배후에서 세상의 지배자(王, 임금-요 14:30)요 "이 세상 신(神, 고후 4:4)"으로서 인생들을 노예화하여 조종하고 있는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사타나) 곧 이 세상 신(神)의 술수(術數)에 불과한 것이다. 
 

노자(老子)


그런즉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음양 이원론을 물리학적 현상을 통해 설명한 것이나, 철두철미 실험을 통해서만 확인되어야 하는 지금까지의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관계로 현재까지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음양이원론에서 주장하는 바 양이 음보다 크다는 사실에조차도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만물이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리했던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은 어떠냐 할 때, 그 역시 "하나가 둘로 나누어졌다"는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그 하나(一)가 "도(道)"요 이 '하나' 곧 '도'가 다른 하나를 파생시킴으로써 둘(二)이 되어 있는 이치는 말하지 못한 것이다.


고로 3위1체의 원리는 분명히 말해 "일시이원(1始2元) 3위1체(3位1體)의 원리"라 해야 제대로 된 명칭이라 할 수 있으나, 그냥 간략하게 말해서 또 일반적으로 "3위1체"라는 용어에 친숙해져 있는 터라 "3위1체의 원리"라 하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자의 창조물임을 밝힘이니 다시 말해 명백한 인과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창조자라 할 수는 있겠다. 그가 실제 그렇게 생각했든 않았든 그런 것과는 별도로 그렇게 "道生一"이라 표현했기 때문에 그 표현만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道生一"이라는 말은 "道"가 곧 "一"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을 것이나 노자는 그런 뜻으로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노자나 음양이원론을 주장한 기타 인물들이나 한결같이 창조자를 시인하는 데에서는 인색했으니 정작 진리에는 이르지 못하고 겉돌기만 일삼은 것뿐이다. 본질적인 것을 외면한 채 이런 피상적 관찰로만 일관할 때 그 어떤 만족스러운 결론에도 이를 수 없다. 이제는 3위1체 원리가 확증된 이상(3운법칙으로써) 더 이상 미망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어의 상보성 원리나 음양이원론은 만물의 양면성의 원리, 짝의 원리, 대칭 원리만 간파한 것뿐이다. 음양 사상은 그 양립하는 둘이 서로 대등하지 않다는 것까지는 말할 수 있었는데 반해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그 둘이 상호 보완하는 사실에만 머문 것이니, 원래 자연과학의 제반법칙은 물질(또는 육체)의 상호 관계를 실험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자연계와 대립되어 있는 영계의 일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한계 밖, 능력 밖이다.


따라서 자연계와 영계라는 상칭(대칭, 대립) 관계를 아우르는  3위1체의 원리가 자연계로만 한정되어 있는 과학 실험실에서 증명될 리 만무하다. 그런 증명은 3운법칙과 같은 초 자연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통해서만 취급될 수 있는 것이고, 3운법칙이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원리일진대, 3위1체의 원리 응용(적응)에서 예외일 수가 없어, 이러한 사실을 그 구조(structure)로써 선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기에 이를 '3위1체 원리의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3위1체의 원리를 "만유 대칭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기본형이 있으면 대칭형이 있으므로 이는 원인과 결과로서의  관계이니 바로 인과율이다. 우리의 새 창조 즉 구원 역시 이 3위1체 원리를 따름은 당연하니 그러므로 3위1체 원리를 가리켜 창조(만유 생성)의 원리, 존재(만유 존립)의 원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명백히 생명의 법칙이 된다. 새 창조는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구조로 특징 지어져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 즉 몸의 한 지체로서의 삶이 '머리'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머리 친히 나(우리 각자)에게 자신을 주심으로써 그 삶이 영원히 나를 위함 곧 '나' 중심이 되어 있으신 까닭이다. 이것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 이유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 임하여 계심을 말하고, 아버지 친히 나를 품속에 안고 계심 즉 아버지 친히 나에게 '선물'로서 와 계심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볼 수 없는 "영(靈)"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 피조물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정한 형체, 형상을 갖추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정 형태를 지닌 것은 모두 피조물이라는 뜻으로서, 피조물은 하나만 아니라 여럿이며 가지각색이다. 다시 말해 여러 형체를 지니고 있고 제각기 그 형상이 다르다는 의미이니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의 다양성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은 볼 수 있는 형체가 아니신즉, 본체로서의 영(spirit)이시라는 말이 옳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답은 아주 합리적인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아서 인지할 수 있는 고유의 특정 형상을 지니신다면 아주 아름다운 모양이실 터인데 아름답다는 것은 한 가지 형태를 고수하고 그 하나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깔이 여럿이 있어 그 여러 가지가 어우러져야 아름다움을 더하듯이 하나님의 모습도 만일 그 고유의 형상이 있으시다면 어느 한 가지에만 국한할 것이므로 그런 한 가지만을 택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도 부적합하다.


그래서 모든 아름다움을 총체적으로 조합하고 조화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론상으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현실로는 불가능하다. 그 형상이 수시로 변하지 않는 한 그러하니, 그리 되면 자기의 고유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인즉,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 고유의 형상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이시라 함이 옳다. 성경에서 "영(靈)"이라고(히 1:14) 하는 영물(천사)들도 자기 특유의 형상을 갖추고 있으니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형상을 지으시고 아우르시는 하나님은 영으로 계셔야 합당하고 또한 사리에도 맞다. 
 

3위1체 원리의 자체 증명


세상에 알려진 고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의 24개 질문에서, 맨 처음 물음이 "창조신이 과연 존재하는가?"이었던 것처럼, 창조신의 실존만 확인되면 인간에게 주시는 그 메시지가 성경임이 필연적으로 확증되는 까닭에, '성경의 창조주(조물주)'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살피는 것만 해도 이미 모든 문제는 풀린 것이다. 고로, 자연스럽게 이 '신의 존재'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래서 여기 반드시 덧붙여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소개하는 것은 다름아닌 만유 창조 혹은 생성의 원리다.


이는 또한 그렇게 창조된 만유의 유지 존속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가리켜 ‘3위1체의 원리(the law of Trinity)’라 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이 시작된 것도 불과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고 아직도 그 완전한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믿는 이들이 많은 현시점에서, 그 최후 종결 또는 결론으로 나타나 오늘날 입증되어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이다. "입증되었다"고 확언하는 것은, 이 3위1체 이론을 따라 구성된(실상 만물만상과 그 원리가 모두 이 3위1체 원리를 모태(母胎)로 하고 있다) "인간 생애의 법칙(trini homo, 3운(運)법칙)"의 구조(構造) 자체가 바로 그 증명이 되어 있기에 그렇다.


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하는 '인간 생애의 법칙' 곧 3운법칙(trini homo)에 대해 앞에서 우선 개략적으로 말했지만 조금 덧붙인다면 인간 생애가 오직 세 가지 형태로만 한정되어 정해져 있다는 것으로서 3위1체 원리를 따라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따라서 그런 구조가 3운법칙 자체의 진실성을 입증할 뿐 아니라 3위1체의 원리까지도 증명한다 함이다. 이런 사실들이 '하나님의 실존'과 '성경의 진실성'에 관한 한, 재론의 여지가 없도록 확고한 증명으로서 위치해 있음이다.


나폴레옹의 생애를 예로 들면 그가 한창 잘 나갈 때에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 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승승장구하던 그 때는 그 생애의 LP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침공 전후를 비롯해서는 싸우기만 하면 지는 것이니 싸우기만 하면 이기던 때와는 완연하게 달랐다. 그래서 이것을 그 LP(Lively Period)에 대립되는 DP(Dull Period)라 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인간 생애의 초창기(JP)가 따로 있어 3부분으로 그의 삶은 대별된다. 이 JP는 OT, SN유형에게만 적용되고 FS형에는 없다.


이렇게 사람마다 일정하게 LP 및 DP 등으로 나누어져 전개되어 나가는 일정 패턴(유형)이 있는데 그 유형이 꼭 3가지로만 한정되어져 운명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3운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운명적"이라 함은 인간 자신이 그러한  형태의 구조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데 따라 철저히 그 삶이 엮어지는 까닭이다. 단적인 예로, 위의 나폴레옹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3위1체의 원리’는 그런 ‘인간 생애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그 진실성을 그 자체만으로도 입증한다 할 것이니, 왜냐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심에서 이 원리가 비롯된 것이니만큼 바로 이 사실이 그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3위1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것은 성경에는 없는 신학 용어이지만 "아버지(聖父)와 아들(聖子)과 성령(聖靈)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성경 기록만 눈 여겨 살펴보아도 3윈1체의 법칙은 충분히 설명되고 그 자체 증명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면 만유의 창조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루어져 창조의 기본 원리가 되어 있음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창조의 원리이니까 이는 필연적으로 만유 존속의 법칙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유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가 됨은 당연한 논리요 귀결이다.


이 3위1체의 원리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그 아들(독자, 독생자)을 "낳으셨다(비로소 존재하게 하셨다)"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래서 이 원리가 만물의 생성과 존립의 원리가 되어 있다고 했거니와 이 이치를 따라 만유를 창조하신 까닭이다. 이 원리를 현대에 와서 그 윤곽이나마 나타낸 것이 보어(Bohr, 1885-1962)의 상보성(相補性) 원리다. 또 중국의 삼황(三皇) 중의 하나인 황제(黃帝, 기원전 4000년 경) 때부터 말해 왔다는 음양(陰陽) 이원론(二元論) 역시 이를 대충 지적하고 있는 터이다.


이렇게 '3위1체 이론'을 그들 나름으로 풀이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양면성의 원리(혹은 상칭(相稱) 원리, 또는 짝의 원리)를 증명할 수는 없었기에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지금까지 지속되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그 구체적인 증거가 3운법칙으로 나타나졌기 때문이다. 원래는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 증거가 이미 나타나 있었는데도, 기이하게도 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것을 표현한 것이 위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 나타내는 의미인 것이니 이것이 그 증거요 증명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둘이 하나 되어’ 계심이 3위1체 원리의 골격이요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이 서로 다르고 같지 않다는 것을 가리킴으로써 이미 3위1체 원리를 설명하고 있음이다. 둘은 둘이되 마치 하나인 것처럼 존재하시므로, '아버지', '아들' 및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나타내시는 또 다른 모습' 곧 성령, 이렇게 3자(者)로 나타나지심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둘이 함께 있으면 둘로서의 복합적인 의미일 뿐이지 그것을 하나의 개체(個體)처럼 취급하는 일이 없다.


둘은 둘이지 하나일 수가 없음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 '하나'이므로, 마치 그 둘 즉 갑(甲, a)과 을(乙, b)과 같은 동일한 개체로 다루어짐과 같아 이렇게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독립적으로 취급하여 이를 가리켜 병(丙, c)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3위1체 원리는 c=a+b, a≠b≠c, a>b로 표현된다. 빛을 두고 말한다면, 입자적 성질(a)에서 파동적인 성질(b)이 나옴으로써(派生) 둘이 혼연 일치로 빛(c)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되는 것이다.


a에서 b가 나온(派生된) 것이지 처음부터 둘이 양립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a와 b가 처음에는 c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c가 b를 낳음(派生시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자기는 a가 되어 있는 것이요 그리하여 현재는 a와 b가 되어 있지만 원래의(과거) a의 형태(c형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c이다. ‘c지향성의 a, b 양립’이라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일시(一始) 이원(二元) 삼위(三位) 일체(一體)"라는 표현도 가능해진다.


현재는 a와 b로 되어 있으나 처음에는 a혼자만이 있었는데 b를 파생시켰기 때문이며, a가 b를 내었으나(생성시켰으나) 그래서 현재는 둘로서 존재하지만 원래 a 혼자 있었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여 'b와 하나를 이루고 있는 상태'가 c이다. 그래서 이전과 같이 하나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현재 a와 b로 존재하는 둘의 복합체이다. 그러나 따로따로 a와 b로서 존재하지 않고 항상 이전처럼(둘이 존재하지 않고 즉 a가 b를 파생시키지 않고 a 혼자 있던 모양 그대로의 그 때처럼) c로서 존재하니까, 마치 c라는 것이 a와 b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여 따로 독립된 것인 양 보인다.


여기서의 특징은, a와 b가 함께 있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어 문자 그대로 '하나로서' 움직인다는 데에 있다. '하나'로서 움직이지 않고 '함께 하나인 것처럼' 움직인다면 결코 c라 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하나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하나로서 움직이기' 때문에, a로서 움직이는 것이 따로 있고, b로서 움직이는 것이 다르고, c로서 움직이는 것이 또한 달라 이 a, b, c를 삼위(三位)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c는 애초 a 홀로 있을 때의 바로 '그 모습'이다. 현재 a와 b로 분리되어 있지만 모습은 애초 홀로 있던 때의 그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이를 a라 할 수도 없고 b라 할 수도  없어 부득불 c라는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마치 3자(三者)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되어 있어 이를 "삼위"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짝(a와 b로서)으로 되어 양립 구조(양면성의 이치)를 취하고 있지만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a와 b가 아닌 a 단독으로 있던) 모습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므로 그래서 조화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c라 함이다.


따라서 애초의 '일시(一始)'가 이제는 '이원(二元)'으로서 '일체(一體)'가 되어 있다. '일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원'이니, 이 '일체' 및 '이원'을 아울러 '삼위(三位)'라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소위 이원론(dualism)은 처음부터 둘로 양립해 있다고 하는 주장인데 이는 논리적으로도 부합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이 자연법칙이 질서 정연한 하나의 일관된 법칙과 원리로 운영되어질 리 만무하다. 왜냐면 그리 될 경우 상호간의 알력과 마찰 때문에 질서 정연한 통일성을 볼 수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우주 만물의 진행 양상을 보라, 하나 같이 하나처럼 '하나'로서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양립이 아니라 오직 하나였는데 그 하나가 모습을 바꾸어 다시 말해 또 하나의 자기를 파생시킴으로써 양립되어 '이원'이 되어 있음이다. 고로 이 상칭성에서는 반드시 대소, 주종 , 인과(因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니 절대로 대등하지 않다. 대등 즉 동등하다면 절대로 하나를 구축할 수가 없음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당연히 크고 나중 존재하는 것 즉 큰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작으며, 전자가 주도하고 후자가 전자를 추종하는 관계다. 그래야만 하나를 이룰 수 있음이다. 
 

3운법칙의 구조


‘3운법칙’의 구조가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한다고 했거니와, ‘3운(運)’ 법칙이라 함은 이미 지적한 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애가 꼭 3가지 형태로만 한정되어 이 규격에 맞추어져 나타나는 것을 철칙(鐵則)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로 한정된 구성이, 아래 그림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 '3위1체 원리의 삼각(三脚, tripod) 구도(構圖)'로서 a(갑), b(을), c(병)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희한한 도식(圖式) 형태다.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은 이상 그림과 같은 3각(脚)(tripod) 형태를 이룬다(위 그림에서의 A, B, C, D). 이는 하나님은 영이신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시니(만드시니) 이제 비로소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甲, a)와 아들(乙, b)로서 계시나 하나님은 영(성령, 丙, c)이시라는 점에서 공통이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도형으로 표시된다(A). 따라서 이 삼위(三位)를 셋으로 나누어 표현하는데, 본질이 같다는 사실을 같은 색깔(여기서는 분홍색)로 표시한 것이다.


아버지 홀로 계실 때의 모습이 '병(c)'이고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심을 각기 달리 표현한 것이 '갑(a)'과 '을'(b)인데 같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별개의 존재이시므로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의미로 표시한 것이 각각 반쪽의 분홍색으로 나타내되(홀로 계시던 '병'의 모습은 전부가 분홍색) '갑'은 분홍색을 왼쪽(그림을 향해)에, '을'은 반대로 오른쪽에 위치시켜 나타낸다. 이상이 3위1체 원리의 도식이다.


즉 본질은 같으므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뜻에서 '병'으로 통일되게 나타내나 실상은 '갑'과 '을'로서 둘이므로 위와 같이 표시하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를 그 상징하는 의미를 따라 모양새로 나타내려면 이보다 더 적절하게 나타낼 수는 없다. 여기서 '갑'이 '을'보다 크다는 것도, 을이 갑에서 나왔음을 나타내는 위의 그림으로(화살표 방향) 충분히 나타내어지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이 3위1체의 원리를 나타내어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trini homo)인가.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


위의 그림에서 나타난 대로 3운법칙의 도식이 3위1체 원리의 도식을 일부러 짜 맞추어 놓은 듯한 꼭 그 형상 그대로 회화적(繪畵的)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3위1체 원리의 도식을 특징 짓는 것으로서 앞서 ①과 ②와 ③으로 설명한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음이다. 3운법칙에서 인간 생애를 반드시 3가지 유형으로만 분류해서 나타내므로 3위1체의 원리와 같은 역시 3각(tripod) 구도다.


3운법칙에서 3가지로 한정되어 나타나는 인간 생애의 유형은 FS유형(類型), SN유형, OT유형인데, 3위1체 원리 도식에서의 '병'에 해당하는 것이 FS 유형임이 드러나는 것이니, 왜냐면 FS유형의 축소판으로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JP(혹은 JP기간)를 SN유형과 OT유형이 똑같이 대동(帶同)하고 있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3위1체 원리의 도식에서 '병'과 같은 색깔의 바탕을 '갑'과 '을'이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형태 그대로를 이루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둘은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음을 색깔을 서로 엇바꿔 나타냄으로 표시하고 있다.


'3위1체의 원리' 도식에서 '병'은 기본형이고 '갑'과 '을'은 대칭형을 이룬다. '갑'이 원래 '병'이었으므로 '병'의 정체는 '갑'인 것이다. 그러나 '갑'에게서 '을'이 나옴으로써 '갑'과 '을'로서의 대칭형을 새롭게 이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을'이 생기기 이전의 '갑'의 모습을 '병'으로서 여전히 그대로 설정해 두고 있는 것은, '갑'과 '을'이 둘이서 대칭을 이루어 있어도 결국 '갑'의 원래 모습인 '병'으로서 하나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3운법칙의 FS유형(類型), SN유형, OT유형이 꼭 그런 모습을 취하여 그 구조(構造)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구조'라고 하는 것은, 인간 생애에서 그 LP와 DP가 반드시 일정 비율로써 형성되어 나타나게 하는 것이 3운법칙인데 그렇게 3가지 유형으로만 한정시켜 나타내고 있는 그 각 수치(數値) 및 배분율을 형성하고 있는 짜임새를 두고 말함이다. 3위1체 원리의 갑과 을을 상징하는 SN유형, OT유형이 그 중 특별히 두드러지니, 이미 설명한 대로 '3'과 '19'의 도치(inversion) 형태가 그것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 도식(圖式)에서의 '갑'과 '을'이, '병'의 바탕(색깔)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어도 좌, 우로 서로 엇바꾸어 나타냄으로써, 같은 본질이기는 하나 별개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꼭 그대로, 그 '갑'과 '을'에 해당되는 3운법칙의 OT형(갑)과 SN형(을)이 그렇게 '갑'과 '을'이 엇바꾸어 나타내고 있는 그 형태를, 위의 그림에서와 같은 구조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인생 활동기(LP, Lively Period)와 비활동기(DP, Dull Period)의 비율을 나타낼 때 이를 서로 엇바꾸어 나타내어 OT형은 3X19로, SN형은 19x3이 되도록 하고 있다. '3X19'나 '19x3'이나 똑같은 57이다. 그러나 그 3과 19가 두 유형(SN과 OT)을 서로 도치(倒置, inversion)시켜 그 짜임새를 이룸으로써 나타내어지는 숫자라는 데에서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왜냐면 바로 3위1체 도식의 형태 그대로의 도치(倒置)를 답습하여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OT형은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대로 19 마디사이(internode, 結節)를 3묶음(束)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SN형은 반대로 3 마디사이를 19묶음으로 나타내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3위1체 원리'의 도식에서 '병'의 검은 바탕을 '갑'과 '을'이 서로 엇바꾸어(도치시켜) 나타내는 형태 그대로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 도치 즉 엇바꾸는 형상을 주축으로 해서 3위1체의 원리 도식을 ●(병), ◐(갑), ◑(을)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 도식에서 ◑과 ◐은 병의 검은 바탕을 엇바꾼 것이 된다. 이는 위의 설명처럼 3과 19를 엇바꾼 바로 그 형태다. 검은 바탕을 엇바꾸어 있는 둘의 현재의 모습이니 곧 이원(二元)으로서의 대립(대칭, 상칭) 구조다. 그러나 ●이 반드시 더불어 존재해야 하는 것은 그 둘(二元)이 처음에는 홀로 있는 하나였기 때문이다(一始). 그래서 그 하나가 현재 둘로 갈라졌으니 원래의 검은 바탕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 그 반쪽의 검은 바탕을 서로 맞추면 원래의 검은 바탕 ●이 된다. 고로 병(●)은 갑과 을이 애초 홀로 있던 모습을 나타냄이요 또한 현재 둘이 서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대립(대칭)되어 있으나 그 본질은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현재 둘은 둘이되 항상 하나로서의 본질로서 그들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다. 따라서 내용은 갑과 을이지만 스스로를 나타내기로는 항상 병으로만 표현하고 있으니 마치 갑과 을과 병이라는 3자(者) 구도처럼 되어 있기에 이를 '3위(位) 일체(一體)'라 하는 것이다.


즉 갑과 을 외에 병이 하나 더 보태진 것과 같은 형상을 이룸이다. 그리고 ●(병)으로서 애초 홀로 있다가 ◐(갑)과 ◑(을)로서 분리되었으니 그 홀로 있던 것으로부터 다른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저절로 대등한 둘로서 나누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대등하다면 처음부터 하나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고 둘로서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양자 사이가 인과(因果) 관계 또는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병)이 있음으로써의 3자 구도이기 때문에 갑으로부터 을로만 흐르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을에서부터 갑으로도 흐르는 교차(交叉) 교류(交流)가 가능해진다. 또 OT형과 SN형이 FS형과 본질이 같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 병이 을을 파생시킴으로써 현재는 갑과 을의 대칭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FS형의 축소판인 JP를 똑같이 대동하여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이와 같이 서로 그것을 엇바꾸는 나타내는 모습으로써 양자간의 차별화를 나타내고 있음이 놀라운 것이다.


JP는 OT형과 SN형에서만 나타나는, 출생 직후의 유청소년기를 말하는데 백세를 하는 경우 청년기도 포함되나 단명하면 유소년기로 한정되기도 한다. 950세로 죽은 노아는 SN형으로서 250세가 JP가 끝났으니 그래서 정식 명칭은 "초창기"이다. 그러나 백세 장수하는 이는 드물고 대개 그 안쪽이므로 알기 쉽게 유청소년 기간이라 하기도 한다. JP가 FS형의 축소형이므로 FS형에는 없는 대신, FS형은 그 유청소년기가 DP 또는 LP와 함께 시작된다.


여기 소개되는 모든 그림(FS형, OT형, SN형을 막론하고)에서는 설명 편의상 비활동기가 먼저 나타나는 생애를 기준하고 있다. 그리고 도식(圖式) 자체를 말하건대, 3운 법칙의 그와 같은 특이한 구조에서 3위1체의 원리 도식이 확정되어 나타내질 수 있었음을 앞서도 지적한 그대로다. 3위1체 원리의 도식이라 해서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도식이라는 것은 그 원리의 내용을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 것이면 그 어느 것이나 도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OT, SN형은 왜 57마디이고 FS형은 56마디인가


56마디[節]와 57마디라는 56, 57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이냐 하면 SN형은 OT형의 도치형[倒置形]이니까 일단 젖혀두고 (倒置) OT형과 FS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OT형의 도치형이 SN형이라는 것은, OT형과 SN형이 57마디로 되어 있다는 전제를 근거하는 것으로서 OT형은 57마디를 3등분한 것이고 SN형은 거꾸로[그와 반대로] 57마디를 19등분한 것이다. OT형의 3X19=57이라는 수식[數式]은, 3[OT형의 3등분의 3]X19[OT형의 LP 기간 즉 1/3 다시 말해 19/57의 19]=57. 이를 기준하면 FS형 역시 7[FS형의 7등분의 7]X4[FS형의 LP 기간 즉 32/56 다시 말해 4/7의 4]X2=56.


FS형의 7X4X2=56에서 7X4는 설명이 되었으나 여기에 다시  2를 곱하는 이 '2'는 무엇인가. 이 '2'는 OT의 '3'에 해당된다.  OT의 '3'은 3등분되었다는 그 3과 더불어, 생애가 3기(期) 즉  예비기(대개의 경우 청소년기) 및 활동기와 비활동기 다시 말해 JP, DP, LP로 나눠지는 그 '3'을 함께 의미하나 FS형은 JP가 없이 DP, LP 단 2기로 나누어지므로 그 표시를 일부러 해야 하기에 바로 그 '2'가 표시됨이다. 그래서 7X4X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