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소년 다윗이 천하 장사 골리앗을 쳐 이긴 비결

Tayseek Kwon 2019. 4. 1. 12:28


돈을 보고 결혼하려 하므로 신문왕 히쓰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미국의 신문왕(新聞王) 히쓰는 부자이므로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고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외롭게 죽었다는 것처럼 영생 하나만 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으나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으면 영생도 구원도 없다는 것......)도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두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을 알았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정상적인 생명 곧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해야 제대로 된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비슷한 의미 같으나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자아중심이고 후자는 그 반대인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나의 관심사(생각)가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상대하는 나의 사랑에게 완전히 옮아 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사랑 관계는 둘이 하나됨이므로 서로 마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이 평범한 사실에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항상 나의 상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대에게 가 있지 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것ㅡ 자연히 그렇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으니까. 원래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이렇게 하나님과 그 피조물 개체와 둘이 하나되는 관계로 지으신 것입니다. 왜냐면 피조물은 각각이므로 여럿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여러 피조물과 개별적으로 한꺼번에 일일이 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영이 아닌 피조물은(비록 천사와 같은 영물로서 성경에서 "영"이라 하는 존재일지라도) 이런 일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관계가 '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에게 복원된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정상적인 모습은 혼자 계심이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 즉 애초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 하나하나와 일일이 개별적으로 대하시던 바로 그 모습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육체로 계시던 모습 역시 바로 그런 모습이시되, 육체로 계심을 인하여 육체적인 제약을 받으심으로써(내가 현재 육체의 제약을 받고 있음과 같이 되시려고)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난을 받으시는 일을 이루셨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이시니(비록 육체로 계시지만) 다시 말해 만약 천국에서 A지점에서 갑이라는 사람과 육체로 함께 계셔도 멀리 떨어진 B지점에서 을이라는 사람과 똑같이 육체로 계실 수 있다는(지금은 영으로만 그러하시지만)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아무리 초자연계("신령한"-성경의 표현) 몸이 되어 있어도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로 있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으신 '한 사람', 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앞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되어 항상 서로 마주 보며 나는 그를 보아주고 그는 나를 보아주는 그런 양면성과 동시성의 영원한 관계로 서로 사랑 가운데에서 사는 이것이 구원 받은 확실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몸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늘에만 계심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사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삶, 일상생활이 구원 받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다르게 인식해왔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만 머물고 있어 여전히 생활은 자아중심이요 기껏해야 특정일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 의례대로 종교 행위를 함으로써 "나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나는 구원 받았다, 왜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했으니까ㅡ" 이런 수준에서만 항상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원 받은 것으로 세뇌시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고후 6:17)이 구원임을 간과하였고 배제한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의 모든 기록은 한 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이 사랑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임을 재차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이 초점에서 벗어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랑 곧 생각 즉 생활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마주 보는 것 즉 주님을 의식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물론 주님은 나의 일을 영원히 하고 게시는 것ㅡ자신을 내게 영원불변의 선물로 주셨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을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요 20:21,22)는 말씀으로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 받음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성령 충만하여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행 2:25)라는 다윗의 예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처럼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 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는 함께 아버지의 품 안에ㅡ이것이 "그 날에는(성령이 너희 안에 있게 되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요 14:20) 하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요 17:2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항상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는"(요일 5:12) 것입니다. 즉 구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함과 같습니다.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ㅡ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는지"(롬 14:7,8/고후 5:15) 여부를 스스로 알 수 있고 확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 단언하지 못하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고후 13:5)라고 아주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5) 했으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서, 부단히 부절히 시험하고 확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오늘, 이 시간"의 특성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사랑의 특성을 무시하고 과거(선지자가 되어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었고, 큰 능력을 나타내었고 등)에만 안주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음으로 천국에서 탈락되고 불법을 행하는 자로서 영원히 낙인 찍히게" 됩니다(마 7:21-23).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앚어버리고(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오늘 이 시간)"(빌 3:13,14) 한 것입니다. 











우승하는 자는 하나뿐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달려가라(고전 9:24)

우승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어ㅡ














소년 다윗이 천하 장사 골리앗을 쳐 이긴 비결



(어른은 아무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고 소년의 단순한 믿음이 이긴 것.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ㅡ사탄을 이기는 변함 없는 요결이니 반드시 명심해야)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소식을 전달하는 예언을 하면서도 이사야 선지자는(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하는 탄식(아니면 경고)부터 먼저 합니다. 생명의 구원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영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인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준다는데 왜 그러냐 하겠지만, 당장 오늘 누리는 영생의 환락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인내를 거쳐야 얻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성경의 진실성은 역설같지만 이와같이 "영합되지 못하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나고 말도 되지 않는 미치광이의 소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 반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데에 있음이니, 다름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입니다. 이 역시 "말씀을 믿지 않음"에 속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탓입니다.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어"(요일 5:19) 그 장중에 놓여 있다는 실상을 밝히는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당시 홍수가 나서 모두 망하게 된다는 노아의 경고를 믿지 않음이나,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사위들이 장인의 경고를 믿지 않음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사야서의 그 대목은 탄식이기도 하고 경고이기도 합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는 교묘한 말의 아첨과 보기 좋은 모양새로 얼굴을 꾸미는 것)이란 말이 있듯이,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치고 달콤한 말을 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듣기 싫은 말로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농하는 자는 없습니다.

거짓말의 원조로서 사탄이 여자를 속인 경우에도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경고 말씀은 듣기 거북한 것이었습니다. "죽는다"고 하셨으니까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한 것이니 듣기에도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진실성은 바로 이런 듣기 거북한 경고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양약은 입에 쓰다는 말과 통합니다.  영생 자체야 물론 듣기 싫은 것이 아니지만 당장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의 내용이니까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 사실도 곧이곧대로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쉬쉬하거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감추는 것도 일종의 거짓입니다. 진실을 감추려 하니 거짓일 수밖에. 성경에 말씀하신 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이라 하심은 지금은 한 때 부끄러워하게 되나 장차는 온 세상에서 창대하게 되어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이 소수가 됨으로써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된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 반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에는 그렇다 따라서 너희 평생에 세상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게 만들 것이다 즉 믿는 이들이 소수로서의 학대와 서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고 나서는 죽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고 확실한 것은 살아 생전의 이 세상뿐이니 거짓말의 속성은 내 말을 들으면 지금 당장 또는 이 세상에서 좋은 효과를 보게 된다는 데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설혹 죽은 다음에야 빛을 보게 된다고 속일 경우에도 정작 그런 거짓말하는 본인은 결코 이 세상 삶을 부정적으로 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호의호식하고 잘 살지, 고생하면서 살지 않는 특점이 있습니다. 이 경우 사이비 종교로써 착취하는 경우가 되는데, 이런 사이비는 웬만하면 그 사이비성이 간파되므로 다수가 미혹되지는 않지만 엄연한 실재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도 그렇게 부정적으로 세상을 일관되게 지내면서 또한 부정적으로 세상을 지내라고 남들에게 역점을 두고 가르치되 그 내용이 결코 황당무계가 될 수 없는 경우 거기에는 거짓이 없고 진실뿐이라는 증명이 됩니다.

성경의 사도들은 그렇게 일관되게 지냈습니다. 또한 일관되게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 세상은 악마 용이 관장하기 때문이요 또 그런 사실보다도 복음 전함이 급선무인데 이 복음 전파를 악마가 방해하여 갖은 탄압의 수단으로 맞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이 상황이 해제되는데, 다시 오시기 전에도 그리스도(구세주)를  가장한 악한 자(사탄의 하수인)가 나타나 온 세상을 호령하게 된다고 했으니,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낙의) 누림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어 사람 살리는 일이 끝나면 지체 없이 세상(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전세계적으로 방해하는)도 끝난다 하셨으므로 이 세상 존속의 목적이 오직 구원의 말씀 전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전파를 한사코 저지하려는 용이 이 세상 신(神)으로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연계 육체는 살라고 있는 또는 살기에 적합한 육체가 아닙니다.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극도의 불확실성의 육체라는 사실에서도 이는 명백합니다.

정작 살 수 있는 살 수 있을 만한 육체는 초자연계에 속하여 죽지(썩지) 않는 육체입니다. 이 자연계 육체는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파생된 비극적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든지 그 원래의 생명 상태로 복원됨이 급선무이지, 이런 생명도 아닌 죽음의 육체에 매달려 살려고만 한다면 웃기는 일이 아닙니까. 아무 것도 실상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성경을 통해 실상이 알려져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살려고만 고집을 피운다는 것은 이 세상 신의 책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밤낮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은 이러한 성경의 내용 즉 의인들(그리스도를 믿는)이 이 세상에서 끝까지 약자로서 탄압의 대상이 된다고 미리 경고해두신 말씀을 희석시키는 의미에서도 가짜 복음, 바울의 말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인 간판만의 "기독교"인 강력한 세상 종교를 만들어 이를 활용, 세상에 군림하게 한 것도 이상의 성경적 사실을 왜곡, 희석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진실성을 방증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보라, 기독교가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여 창대해지고 욱일승천하고 있지 않느냐, 성경에 그런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냐, 틀린 말을 하는데 신뢰할 수 있느냐" 하여 넌지시 성경을 무기력화하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경이 그래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나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운 대목들을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하는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 해놓고는 그런 신학자들의 생각을 비틀어놓은 다음 그런 그릇된 신학자의 말을 듣게 만듦으로써 숱한 생명들을 파멸시킨 것입니다. 사탄이 속임수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역설 같지만 이런 변화무쌍 천차만별 능수능란의 속임수를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에 있으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것이고, "진리를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글줄이나 읽을 줄 안다고 여러 사람의 여러 연구 자료에 몰입하는 것을 자랑처럼 여겨 거기 탐닉하는 경우 사탄의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가 십중팔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성경밖에 모르고 그 이상으로는 더 생각할 줄 모르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이 강점이 되어 여러 간교한 오도된 신학적 견해들을 멀리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필자의 사형되는 이는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원에 들어가 졸업을 앞두고는 "믿음이 무엇이냐" 하고 학우들에게 물었다는데 그 길로 그만 변을 당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진실성을 확고하게 믿어야 장차 어지럽게 나타날 적 그리스도의 모든 흉계를 이길 수 있어 각종 소위 "과학적 논거"를 대면서 성경을 공격하는 것에 넉넉히 대비할 것인데, 그러한 성경의 진실성은 이상과 같은 자체 증명에 있으니 이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증명은 그 "외부적" 증거를 다른 그럴싸한(그러나 진실은 아니고 진리도 아닌) 논리가 공격해 와 와해시킬 정도가 되면 그 자체 권위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지만, 이 자체 증명만은 여하한 경우에도 흔들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있는 한 그 증명도 함께 존속되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입니다.

세상(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남은 생애를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직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마 7:21) 다른 사람들 구원해내기에만 골몰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다른 데에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복음 전파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는 말씀이 바로 이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아주 못박아버리고 있습니다.

안락한 세상 삶을 꿈꾸며 어떤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자청해 왔을 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심으로써 인간이 살 보금자리가 결코 이 세상 자연계가 아님(요 18:36)을 명시하신 것도, 이 세상이 죽은 자의 세상으로서 생명을 누릴 산 자의 세계가  아닌즉 "너는 세상에 나가서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산 자가 되는 방법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일생의 소임을 다하라 하신 것도, 손에 일단 쟁기를 잡았으면 일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른 일에 한눈팔고 관심 두고 신경 쓰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도(눅 9:57-62) 이런 사실을 두고 경고하신 것이니 마땅히 마음에 아로새길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