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Tayseek Kwon 2019. 4. 1. 12:11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요 21:20-22). "네게 상관이 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에만 착념하라"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일 외에 그 무엇을 알고자 하든지 궁금해 하든지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 된다.


하나님 주신 힘이요 시간인데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약속한 마당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것이 되어 있는 것을 왜 마치 내 것처럼 내 시간처럼 그런 소용 없는 일에 신경을 쓸 것인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닌 것에 대한 범법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을 내가 상전(주인, 나의 소유주)으로 모신 이상 주님을 따름이다. 주님을 섬김이다. 그 외에 우리가 관여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주님을 섬길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주님 친히 그리고 먼저 나를 위하시고 자신을 바쳐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 즉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그리고 갑은 을과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에 있으므로 먼저 본을 보이시고 내가 따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본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바로 이 사실을  토대로 하고 근거를 삼아 주님만을 섬기고 나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


실상 더 따질 것도 없이 이것 하나만 해도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전부가 아닌가. 이 외에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주님의 부활하심은 여러 증거가 있지만(행 17:31), 여기서 눈을 돌리는 것은 바로 위의 구절이 나타내는 사실 즉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다. 실제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리 천하 없는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즉,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같이 입증되어 있는 마당에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한 마땅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의 주기도문 서두에서도 보듯이 '하나님'과 '그 나라' 그리고 '그 뜻' 이 세 가지만 알면 족하다. 하나님은 3위1체로 계시고 그 3위1체 원리에 의해 자연계가 있으면 초자연계에 속한 평화의 나라, 생명의 나라, 지상(至上) 행복의 나라가 존재함을 알 수 있어 오직 그 나라를 목표하며, 또한 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영원한 생명 세계의 구조를 알아 그대로 따르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괘념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외의 일은 지엽적인 것이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알아도 얼마든지 충분히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니 당장 발 등에 불부터 꺼야 하는데 그런 것에 생각을 돌릴 여유도 없거니와 그런 데에 마음을 씀으로써 우리의 집중력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령 고난 받음으로써 영광을 얻게 되는데 십자가 강도처럼 임종시에 믿게 되는 이들은 그러면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라든지, 베드로가 언급한 대로 죽어서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다면 굳이 이 세상에서 믿으라고 강권하듯이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는 것 등으로 인해 갑론을박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적당히 상식 수준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해석 차이로 분위기를 요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명백한 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 이 세상 생명이 끝이 아니고 반드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있어 생명과 반대되는 상황이 영원토록 전개되든가 아니면 이 지상에서의 삶보다 한정도 없이 행복한 생명의 세계에서 삶의 낙을 누리게 되든가 할 것이니, 이 아주 심각한 현실에 눈 떠 생명의 한 몸 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힘써 권유하고 보살피는 일밖에 시급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상관이 없는"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으니 즉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것이나"(롬 14장) 재세례니 침례니 세례니 하는 것 모두 지엽적인 것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든 죽든지 한다"(14:7,8)는 데에 있다. 이것만 확실하고 그 열매가 분명하면 즉 "말에 있지 않고 능력(행함)에 있으면"(고전 4:20) 모두가 내 형제요 한 아버지를 모신 식구요 한 몸의 지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는"(엡 4:3) 일이 빈번할 줄 알고 그 경우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준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형제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베드로도 경고한 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멸하는"(벧후 3:16) 사례만 남길 뿐이다. 안식일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주님을 비판할 때에도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 말씀하심으로써 사람 삶이 "하나님과 동행함(walking with God)"에 있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과 머리와 몸 관계를 유지하여 "그 뜻대로 행함"(마 7:21) 즉 순종함에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임시로 정하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갈 4:10) 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뜻을 행하는 것"을 그런 지엽적인 것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다"(갈 4:9)고 한 대로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고전 8:1-3)"는 사실로써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을 어떤 제도나 형식을 무조건 따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는 자기 부인에 있는 것이다. 그런 것도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아무리 충실히 지켜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아 중심은 본래 그런 형식을 좋아하고 그 틀에 따라 행하면 되는 줄로 아는 경향이 있다. 그 형식에만 맞추면 "육신" 타령이나 하며 자기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한 몸 체제로서의 영생하는 삶,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방책으로서의 이 둘(머리와 몸)이 하나되는 이치에 있으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그것이 선이요 의이며 거룩함인 것이다. 형식을 지키고 그런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이 정작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그 누가 그런 것을 막으리요. 그러면 그렇게 형식에 유념하는 이는 그렇지 않은 이들을 판단하고 비판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요지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롬 14:5)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면 천하 없어도 이를 지킬 것이다. 그 지키는 바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데에 있을진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 역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비판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긴가민가 "의심하고"(롬 14:23) 행하는 이는 죄가 성립됨을 경고한 것이다(:23/고전 8:12). 고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까닭에 "형제로 거리끼게 하지 않는" (:21)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형제로 근심하게 만들면 사랑으로 행치 않음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롬 14:15/고전 8:11) 죄가 되기 때문이다. 술이 약주라 하여 마시는 이도 그러나 술에 약한 형제가 이로 인하여 담대함을 얻어 술로써 자신을 망치는 예가 허다하므로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과 같으니(고전 8:9) 바울이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전 8:13)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