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이 실상이 가장 중요하건만 지금까지 아는 자만 알았다

Tayseek Kwon 2019. 3. 30. 10:54



이 실상이 가장 중요하건만 지금까지 아는 자만 알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명령 불이행시는 전투가 되지 않는다. 

군은 전투가 목적이다.



"저들 앞에서 변형되시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 말을 들으라"(마 17:2,5).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니 심히 두려워함이었다.

이것이 범죄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의 영광과 위엄이었던 것.





  •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 다 때가 있으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전도서 3:1-8)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25절의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기억하기도 좋습니다

ㅡ"메리 크리스마스"의 12월 25일).


말의 제대로 된 순서가

"고진감래"ㅡ이야말로 누구나 바라는 것.

거꾸로 감진고래/甘盡苦來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저주. 

성경의 경고는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성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가 후자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른 길에다 출입구도 크고 넓어

많은 사람이 이 길로 행하여 멸망에 이른다고

주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생명과 멸망의 식별법을 알면서도

그래서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나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으니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

그래서 "힘쓰라" 하셨습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힘쓰라 하심이 아니라

(구원문제는 해결했으므로)

사랑의 고/苦의 측면을 힘써 지킴으로써

나중에 오는 사랑의 감/甘을 누리라는 

자상스러우신 말씀이신데도

이를 무시하니

상관의 명령 불복종 차원에서도 

가차 없는 처분을 당할 것인즉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신의 구원을 이룰

일입니다(빌2:12/딤전 4:16).

......................

"구원받았음"과 "구원 이룸"을 혼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담이나 악령들은 영생을 누리면서도

그 영생을 생명의 법칙을 준수 않음으로써

상실한 선례가 엄연히 있는 이상

우리라고 해서 특례가 될 수 없다는 그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은혜로써(우리의 행한 공덕 없이)

복귀하였다는 그 의미입니다. 

......................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겠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왜 은혜만 받아놓고 그 은혜 보답은 싫어하나요?

거액의 빚 탕감을 받고도

자아중심의 욕심에서 자기의 채무자에게는

인정사정 없던 자는 마침내(마 18:32)

그 탕감 받은 빚 잔치가 취소되어버렸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양식에 어긋나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비단 찰스 스펄존(Charles Haddon Spurgeon-1834-92)만 아니라 

오늘날까지의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에덴낙원이 자연계 동산이고 
아담이 자연계 육체의 존재로 범죄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말씀 혼잡"(고후 4:2)의 하나.

이런 일화가 있다.

스펄전이 열차 1등(특등)석에 앉아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입이 촉빠른 집사 하나가 스펄전에게,"목사님, 교역자로서 화려한 특별칸 이용은 

좀 뭣하지 않습니까?"

이 때 스펄전의 즉답은 이러했다고 전한다.

"하나님의 사자(하나님의 종)로서 이만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이 정도면 성경에 대한 무식이 평균 수준을 넘는다. 

"집사"가 "목사"보다 더 성경적이었다고 할까.
집사가 아는 대로는 교역자는 양떼의 본으로서

겸손의 고난의 종 주님을 닮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이비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이런 화려함과 장중함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께 속한 권위"라 신봉함에 있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자세는

위풍당당 하나님의 아들들의 풍채와 풍모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나아가는 마음 가짐, 몸 가짐이다.

이렇지 않고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선언하셨으니

이 말씀 어기고는 구원은 물건너간 것이다.







한국에는 구미 제국과 같은 좌, 우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공산꼭두각시(사람 인형) 또는 북한 김가3대 끄나풀과
자유민주 진영으로만 갈라져 있을 뿐입니다. 
좌우 또는 보수 진보 등등은 그런 끄나풀들이 
자신을 미화, 은폐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지어 부른 데에서 유래되는 것이니 
그런 것에 휩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진보"라면 젊은이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은 부인 못하는 사실입니다.


러시아 10월혁명(1917)에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심취하고 
속으로 축복해 빌어 마지않았던 싸르뜨르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환멸의 비애를 느껴 마지않았던 공산주의는 

이미 소련 붕괴와 더불어 사장/死藏되어버린 이념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는 지조가 없어 미련하게 포섭되어버린 경우이거나 

골이 비어 IQ 함량미달이라 사리분별력이 미약한 경우이거나 둘 중 하나다. 

아니면 싸르뜨르보다 더 우월한 지성인이라는 자기도취자이거나. 

어쨌든 쓰잘데없는 그런 자들이 아직도 이 한반도에 준동하고 

정권까지 탈취했다는 것은 불행하다기보다 

세계인 앞에서 부끄럽기 한량없는 민족사적 오점인즉 국민적 대오각성이 요망된다. 

희대의 독재자들이 우매한 대중들을 선동하여 야욕을 채우는 도구로만 전락해버린 

환상, 공상, 망상에 불과한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와 1당1인독재와의 대결 이외 전연 의미가 없다



이런 소동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정답이 나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대칭 아담에 의한 재차 출생, 인간 신창조. 

그리고 진리 사랑이 원동력이 되는 생명(삶)의 법칙대로의 "무소유의 만유 소유"의 과감한 실천력이다. 

모름지기 교회는 이 막중한 가치의 초대교회 유산(행 4:32-35) 환수 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런 혁명적인 인간 개벽은 유사 이래 초대교회가 처음이었는데 

그 영광을 상실한 오늘날까지의 교회, 

마땅히 이를 되찾아야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처하리요




어느 사이비 이단 집단에서 이런 "통용"을 실천했다느니 어쨌다니

하는 말이 있는데 그 교주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하니까

성경의 본질적 내용과는 동떨어진

"공산주의"식 종교(기독교 이단의) 독재일 뿐이다.

또 그 집단 내에서만 그런 상호부조, 유무상통이라면 
단순한 집단이기주의로 끝날 뿐이다.

목적이 "빈궁한 자 구제"(엡 4:28)에 있음을 성경은 강조한다.

이는 신자건 비신자건 간에 차별 없는 구제 행위를 뜻하고

그 기반은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 있는 것이다.

즉 한 지체가 고통 당하면 모두가 고통 당하고

한 지체가 자랑거리가 되면

그 자랑은 모든 지체가 함께 향유하는 자랑이어야 하는 것.

고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이 죽음의 고통의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절대 다수이니

시종 가난한 자로서 이 세상을 거쳐 간다는 각오라야.

때문에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런데 예의 그 교주는 "돈이 좋기는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담 범죄로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므로

오직 장차 오는 사활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에

교회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그러므로 이 사이비 집단의 소위 "통용"은

칼 마르크스가 시도한 공산주의 시행착오와 하나도 다름 없으니

일개인의 야욕을 채워주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정치적 독재나 종교적 독재나 독재는 독재일 뿐이다.


영생과 존귀와 영광을 앞두고 있는

메시아 예수님 즉 대칭 아담께 속한 사람은(롬 2:7)

이 세상에서는 역시 대칭 원리에 따라 상대적으로 삶의 열악함을 만끽해보는 것이 정석이니,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히 13:5)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 아는(딤전 6:8) 것이

정상 궤도에 위치함이다.

왜냐면 이런 초라한 육체 건사한다고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 몇이라도(고전 9:22) 구원해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 유일한 보람이기 때문.

바로 이를 위해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요 20:21,22)

이런 구차한 자연계 몸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은 즉이

초자연계 몸의 영광 가운데 화려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