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중국 송상절 박사 작사 찬미곡

Tayseek Kwon 2019. 3. 29. 20:07

 

 

 

 

 

중국 송상절 박사 작사 찬미곡

성경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에게 안내 말씀을 드리자면 맨먼저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 다음에 3개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나머지를 읽어가시면 됩니다. 신약을 중점적으로 읽고 구약은 한 번씩 훑어가는 식으로 읽으시는 것을 권합니다.
 
구약은 순서에 나오는 대로 창세기, 출애굽기 등 , 되고 그 다음에 계시록과 구약 성경의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 등 역사서/歷史書를 훑어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를 훑어가시고 으로 차례대로 나기시는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은 맨 나중에 읽으
 
 

처음부터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도록 만드셨다면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라고 하실 리 없다. 그냥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을 "죽음"이라 지칭하셨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정도로만 그칠 뿐이지 "영생하도록" 구원하신다 함도 역시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의 범죄도, 인간을 애초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말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또 인간의 범죄를 계기로 인생들을 영생하게 하신다는 것도 조리가 맞지 않게 된다.
그런즉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초자연계적 존재로 아담을 만드셨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몸이 됨으로써 '죽는 자' 혹은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다. 실상 성경의 관련 대목들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한사코 자연계 몸이라는 편견과 선입관을 고집하는 통에 성경 이해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아담이 영생하는 즉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었다고 설명한 예가 없다. 오직 성경밖에는 없다. 성경에 꼭 "신령한 몸이었다"고 명시해야만 하는가. 다 같은 에덴낙원의 동식물인데 왜 식물만 선악을 알게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게까지 하는 신령한 나무였겠는가. 그 때 당시 창조된 동물 역시 신령한 존재라는 것쯤이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도 능히 판단하고 남을 일이다. 
바울이나 요한도 명백히 사탄을 "그 옛 뱀"이라 명시하였고 아담의 죽음이 오직 범죄 때문이었고 범죄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는가. 죽지 않으면 영생하는 존재가 아닌가. 성경에 관한 사탄은 인생들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라는 사실만 빼놓으면 이상 사실은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 될 것이나 사탄의 존재를 설정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지사가 된다. 
사탄의 초능력으로 아무리 천재라도 멍청이 만들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구원 얻는 데에는 사랑의 순종이 핵심이므로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것을 괴거에는 몰랐어도 되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우선이므로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안된다. 다니엘의 예언(단 12:4)대로 "지식이 더하는" 때이므로 모든 사람이 "제법 아는 체하는" 시대로서 최소한의 기본 지식은 정확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이 세상을 이 세상 신/神(그는 "온 천하를 속이는 자"라고 성경은 명시했다-계 12:9)인 마귀의 농락에 넘어가 정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사리 판단이 헝클어지는 것이다. 정상이 아니라 이상/異常 상태요 직립해서 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顚倒ㅡ거꾸로 뒤집혀져 있는)돼 있는 것이다. 온갖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며난무하는 곳이다. 이 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나타내는 "진리 대/對 거짓의 구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 성경이 진실이 아니라는 이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일체의 문물/文物이다. 사탄이 자기 세상을 한 번 만들어 꽃피워보고자 해서가 아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인생들을 멸망시켜 구원되지 못하게 하자는 오로지 그 한 가지 목표뿐이다. 

 

이런 진실과 거짓의 양자 대치 구도일 뿐임에도 사탄은 이를 물타기 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칸을 만든 후 문화 안에다 "종교"라는 별도의 울타리를 치고 그 한 쪽 옆에다가 "기독교"라는 방을 하나 얽어놓고 온갖 쓰레기 잡탕들을 구겨넣은 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저만치 뒷전에다 앉혀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해서 신학자들까지도 성경을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시킨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은 항상 이 세상 신/神이요 왕/王인 악령 사탄을 연계시켜야 제대로 인식될 수 있는 것. 
SBP(Supernatural Beings Proved) pix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도 흥미 유발에 도움이 되거나 또는 이를 즐기려 함이 아니라 3위1체의 원리가 가리키는 "대칭적 존재"의 의미를 우리가 마음에 각인해 둠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감에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있고 이 세상이 또한 자연계에 속해 있는 까닭에 너무나 심각한 제약(초자연계를 넘겨다볼 수 없는 일방적인 열세)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이와 대칭(대립, 양립)되는 초자연계가 존립하고 있음을(인식해야 함에도 전혀 알지 못하는) 확증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널리 홍보하고자 함이다. 
자연계가 있으매 초자연계가 있듯이 이 세상이라는 결과물이 있으니까 의당히 이런 결과에 대한 원인(제1원인)이신 하나님께서 계심은 말하나마나요, 우리의 생명(또는 죽음)이 한시적인즉 영원한 생명과 죽음이 필연적임이 아울러 드러남이므로 인 것이다. 
그러므로 3위1체의 원리로 말미암아 이런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사실로 확정되는 것이요 이를 의심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방식을 두고 몰상식이라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몰상식" 취급을 받아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 만 인간이 모두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을 알아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을 안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을 사랑해야 구원인 것이다.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은 믿어도 성경대로의 하나님은 믿지 않고 다른 말을 하는 즉 속이는 자가 가리키는 지어낸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이다(살후 2:12). 오늘날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의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고 자아중심을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라는 경고를 외면하여 무시할 때, 그러한 속임수의 "창조신"을 신봉하게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사고방식의 주류이었고 대세였다면 차후부터는 창조자를 시인하지 않을 때 따돌림을 받게 되어 있는 세대이다.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악령 사탄 곧 이 세상 신(神)의 꼼짝없는 노예가 되어 있음의 당연 결과다. 이제까지는 그 자 스스로 창조자로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럴 경우 무신론을 퍼뜨리는 것이 상책(인간들을 멸망에 빠뜨리는 일에)일 것 같아서 무신론을 퍼뜨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 때가 되어 얼마든지 창조자 하나님으로 가장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제까지의 무신론을 걷어내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 3위1체의 원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짐으로 해서 모두가 유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3위1체의 원리가 악령 사탄의 그와 같은 악한 계획의 일환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초자연계와 초자연계 존재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으로 가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초능력만 나타내면 당장이라도 무신론은 봄 눈 녹듯이 녹아 버릴 터이기에. 3위1체의 원리는 그런 악마의 속임수가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이전에 다시 말해 가시적인 결과물로서의 기적이 아닌 순수하게 이성적이고 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베푸시는 차원에서 나타난 것이다.
영상물을 지금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온갖 것을 온갖 장난질(비디오 조작을 통한)과 쓰레기 잡된 것과 함께 노도처럼 밀려들어 휘감기 시작하는 시대라 초자연계에 속하는 초능력의 실체들에 대한 정보가 범람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들은 넋이 빠져 있을 정도다. 성경에 밝히는 대로의 악령의 소행임을 인지하지 않는 한에는 그러한 "외계 문명", "외계인" 소동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성경은 3위1체의 원리에서 보이는 대로 오지 두 가지 세계의 양립 현상만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하나는 이 자연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대가 되는 초자연계이다.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자연계에 대칭되는 초자연계로서의 에덴낙원을 창설하신 것이다. 인간을 위해 초능력의 초자연계 동식물을 창조하신 것인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런 여러 가지 형태의 정보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유발하거나 또는 당황하여 의아해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니, 왜냐면 처음부터 자연계 존재와 초자연계 존재를 구별하여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인간이 애초 초자연계 몸으로 있다가 악한 영물에게 속아 범죄하여 이 자연계 존재가 됨으로써 그렇게 하여 원수가 되어 있는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믿으면 그런 여러 가지 초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놀랄 이유가 없게 됨이다. 악령의 초능력은 상대적으로 미약해진 우리의 이 자연계적 한계성에 비하면 신과 같은 것으로서 그 앞에서 한 마디로 불가항력인지라 이럴 경우 악령의 기만 행위 내지 농락 행위라 치부해 버리고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고 현책인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게 되어 백해무익일 수밖에 없음이다. 그런즉 youtube 등에 나오는 각종 괴이한(초자연적 현상) 일에 대해서는 악령들의 짓거리라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괘념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오직 인간 구원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그냥 버려두는 것이 옳다. 인간 구원을 장애가 될 경우에는 그들과 맞서 마지막 아담의 권위로서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악령들에게 속을 때는 우리는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한다면 알고서 속아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휘둘린다는 이것이 비극이다. 이렇게 어두운 가운데 있어 보지 못하고 사탄에게 매여 있는 상태에 있는 것과 눈을 떠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 있는 것과 둘은 대칭되는 위치다. 후자는 능동적이고 전자는 피동적이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악령에게 종 살이 하고 있는 인간 현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런 여러 가지 악령들에 속한 초능력의 현상들을 소개하는 것이고 이렇게 일단 결론을 내려졌으면 더 이상 여기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실상을 알았으니 오직 이 진리대로 행하여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해서만 전력을 다할 것이요 여기에만 오로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임은 더 이상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3위1체 원리의 대립(양립)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악령들의 초능력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만 있는 것이고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계신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아담은 그들 영물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했던 것이고 영물들은 그 수하에 있어 아담에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후 모습은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으로써 종결되었고 이제 부활하신 다음의 위치는 옛 영광의 아담의 모습 그대로이시므로 얼마든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악령들을 호령할 수 있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고난 받음으로써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역시 고난 받으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고난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므로 자진해서 받는 것이니 이 양면성(악령들 위에 군림해 있음과 동시 악령들 앞에서 약함으로 고난 받음)은 그리스도 친히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실 때의 상황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셨음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으로는 모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능력을 행하셨으나 끝까지 십자가로 나아가 고난 받으신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양상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악령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위상 그대로이므로 일방적인 싸움으로써 악령들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을 상대하리요. 고로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천하무적의 우리들이 약한 가운데 있어야 평형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 "약함"은 우리 스스로 취하는 것으로서 인생 구원에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송상절 화학박사(Dr. John Sung)의 작사 찬송가

그는 미국에 가서 독일에서도 초빙하려 했던

유망한 화학박사 학위를 딴 인재였으나

복음을 깨달은 뒤에는 복음 전파 외에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확신,

박사 학위증을 태평양 한복판에 수장시키고

중국으로 돌아와 유명대학 교수직 제의도 사절하고

동남아 일대에서 중국교포 상대로 종횡무진 뛰었던

복음전도 부흥사였다. 40대 중반에 일찍 타계했다.

이런 대중집회 복음 전도자가 이 땅에서도 많이 일어나기를ㅡ

 

 

 

https://www.hymnal.net/en/home

찬미가

 

 

 

https://www.youtube.com/watch?v=T00Mt6AhnyY&list=RDr0_5My9SZQ8&index=2

 

 

 

 

 

 

十字架上與主同死、同葬且同復活,       如今一同升到天上,活著不再是我。主住裡面,佔領一切,       看主所看,說主所說,求主所求,作主所作,祂是我主。
1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내졌고 부활했고함께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았네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내 안에 주님 사시네주님 보시는 대로 보고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주님 원하시는 것 원하고 주님 말씀하시는 것 말하네나의 주인이시요 나는 그 종이니까

2

나 홀로 발버둥치고 몸부림치지 않네 내 안에 주님 친히 맡아 일하시니까

주님을 흉내내려 함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으로 날로 자라(成長) 닮아가네

내 안의 주님 나의 모든 것 변화시켜 주님이 사랑하는 것 나도 사랑하고

주님 기뻐하심이 내 기쁨이네 주님의 근심 나의 근심 주님의 슬픔 나의 슬픔

주님의 마음 곧 나의 마음

2.不是自己努力掙扎,是主裡面動工,

   不是自己模仿基督, 是主裡面長大,

   主住裡面變化一切, 愛主所愛樂主所樂,

   求主所憂負主所負, 主心我心。

 

 

3

내 생각대로 하려 않고 주님의 뜻만 이루려네

내 소원대로 하려 않고 주님의 말씀만 이뤄지기 원하네

 

 

3.不是自己想作甚麼,只願主旨成就,

   不是自己奢望甚麼, 只顧主話成全,

   主住裡面實現一切, 聽主所許信主所許,

   求主所許望主所 許,主話必成。


not what I want to not what I want to Not what I want to e expect
expect
only take the lead
Lord living in everything
listen to what the Lord has promoses
Ask the Lord to hope that the Lord will
the subject will become
3. It is not what you want to do, but only the main achievement, 
   not what you expect, just to fulfill the main words, to    live in the Lord to fulfill everything, to listen to the Lord's promise to the Lord, and to      ask the Lord to hope that the Lord will make the Lord's Word.


 

4.不與世同負一軛,樂在主內同工,

   不是自己單獨追求,也愛彼此建立,

   主住裡面聯絡一切,同心合意恆切禱告,

   求主合一愛裡同工,主內一家。

( Bearing not the yoke with the world ) ( enjoy coworking in Him ) ( Not just seek Him by myself ) ( but build up one another ) ( He lives in us to direct us all ) ( so we can pray with one heart one mind ) ( one in Spirit , cowork in love ) ( one big family in the Lord )
4. Don't yoke with the world, be happy to work together in the Lord,    not to pursue alone, but also to build each other, to     live in contact with everything, to pray with    one heart and one mind, 

to  seek the Lord to unite in love, the Lord one.


 

http://gutenberg.net.au/ebooks10/1000351h.html

E.H.Broadbent

 




교회는 초대교회 이후 모진 핍박 중에서도 줄기찬 명맥을 유지해오던 중 갑자기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세상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 거대한 집단이 새로 형성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이전 국가권력이 교회를 탄압하던 일을 대신 맡아 세상 집권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이 거대한 종교 집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사단의 지배권에 있기 때문이니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 사정은 변할 리가 없다. 당시 그런 핍박의 표적이 되어 있던 교회 중의 하나가 이른바 '발도[또는 '왈도'一Waldenses]'파[派]였다. 당시 대표적으로 알려졌기에 그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고 그 외의 이름으로 혹은 이름도 없이[그들 스스로 자기네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 곳곳에 "적은 무리[little flock]"[눅 12:32]를 이루어 활동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복음의 기본되는 가르침을 숙지하지 못한 탓으로 박해가 극심해지자 무력으로 자기 방어를 하게 되는 오류를 빚기도 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서 명백히 벗어난 일이었다. 교회가 무력으로 자기 방어를 할 양이라면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세상 종교처럼 세상 권력을 등에 업으면 간단한 일이다.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는 말씀으로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이 명백한 뜻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것이 위에 지적한 그 거대한 종교 집단이니 곧 세상 권력을 등에 입은 모양새로서 정작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는 적대시하는 것으롤 시종일관했다.

핍박이 나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본을 보인 것과 같이, 무력을 동원하는 육신의 생각을 하거나 겁을 집어먹고 믿음 이탈을 할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그 기본 틀을 적시해 주는 대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 되는 것이다. 핍박을 면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을 전도 곧 세계 선교의 호기로 삼는 지혜이니 주님 친히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다[마 10:23]. 핍박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하지만 그들 초대교회는 목숨이 아까워 그렇게 피해 다닌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대로 복음을 전달함이 일차 의무요, 이차, 삼차 연이어 가는 메시아(그리스도) 교회의 이 세상 존립의 유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각지로 다니다가 복음을 받지 않거든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라 하신 것이다. 핍박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하여 같은 자리에 죽치고 앉아 순절하기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든 고장과 산천을 떠나기 싫어할 까닭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삶 즉 생명을 누리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므로 가족 단위, 혹은 적당히 무리를 이루어 타고장 또는 타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한다는 일념으로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하고 모든 것 버리는 자세로 한결같이 줄곧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성령으로 권했던 것이다[고전 7:1-40]. 그러다가 주님의 뜻이면 언제 어디서든 달게 죽음을 맞으면 되는 것이다. 
 
당시 그런 핍박 받던 '발도'파 성도들이 그 박해지를 떠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면 아마 세계 선교는 좀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복음 전파가 끝남과 동시에 이 세상도 끝난다 하셨으니(마 24:14) 이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도 일찌감치 막을 내렸을 것이다. 물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한 치 어김없이 시계 바늘 돌아가듯 빈틈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최소한 우리의 임무는 다해야 한다.

바울은 그 서신에서 분명 성령의 지혜로 말하기를, "혼자 지내는 것이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좋다"[:26]고 했다. 이에 유의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는 성경이 다량 인쇄되지 못해 널리 보급되지 않아 각자 성경의 상세한 내용을 몰랐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혼자 있는 것보다 가족이 딸려 있으면 아무래도 주님의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다. 결혼하여 가족을 두면 바울은 "육체에 고난이 있다" 했고, 그래서 "교회를 아끼는" 충정에서 하는 권유라고 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은 "나도 성령을 받은 줄 안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분명히 밝힌 것이.

오늘날은 더더욱 이 권유가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권유에서 역시 성령을 따라 말하면서 "받은바 은혜가 다르다"고 했던 사실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고로 이런 일 가지고 누구는 믿음이 있다 없다, 열심이 덜하다 더하다, 낫다 못하다 식으로 편가르기 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금했다. <누구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표준은 아니니 즉 주님의 명령은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임의 사항으로 자기 사정과 형편에 가장 합당한 쪽을 택하는 것이므로 참고(參考) 정도로 이해하되, 매사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기준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냐 그것을 오직 행하겠다는 우리 자신의 결의에 있지, 나의 삶을 위주로 하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 개인과 더불어 주님께서 가장 잘 아시는 터이다. 판단은 주님께 있되 그러나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나의 의지 여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제하시지는 않는다. 강제라는 것은 "이리저리 하지 않으면 너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열매로 안다고 강조하셨듯이 열매가 그러하면 나무도 그러하다는 의미는  명백하다. 그래서 구원 얻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그렇지 못하면 또 그렇지 못한 열매가 맺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당시 '발도'파 교회의 형제들을 판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 무력을 사용하는 잘못을 택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에서 벗어난 일임을 밝히는 차원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성령의 인도를 갈망하는 자세로는, 항상 무슨 일에 임해서든 진정으로 주님 앞에 "주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든지 따르겠습니다" 하며 기도하는 습관을 가질 것이며, 100% 그 인도를 따르리라는 결심으로 임해야 함이니, 어떤 경우에든 자신의 호불호를 생각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15:1-3].

당시의 성도들이 모두가 그러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일부임이 드러난다. 아래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의 인도를 훌륭히 따른 교회도 건재(健在)했다. 다음의 영문 자료는 18세기 영어로 엮어졌기는 하나 초대교회의 순수성 그대로를 간직해오면서 믿음을 지킨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서다. 그들이 '발도'파인지 혹은 다른 집단인지는 모르나 당시 로마 카톨릭과 관련된 모든 종교 행위를 일절 배척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12세기 경 프랑스로부터 믿음의 자유를 위해 탈출해온 사람들로 시작하여 그 후로도 200년, 150년, 120년 간격을 두고 보헤미아 지방으로 내려 와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모인 수가 3, 4만명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이 보헤미아[현재의 첵코 일대] 지방에서 배출된 신앙의 인물로는 존 허쓰[John Huss, 1369-1415]가 유명하다. 그리고 ‘종교 개혁’ 이후의 혼란 와중에서 각처로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말미암아 인근 모라비아 지방에서 일어난 진젠돌프 백작 주도[主導]의 모라비아 선교 부흥운동 역시 교회 사상에 남긴 족적이 뚜렷하다.

이들 교회 공동체는 사제직[당시는 로마 카톨릭 세상이었으니까]도 두지 않고 그냥 서로가 서로를 가르쳤고(골 3:16), 사유 재산이 없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무저항주의로 나갔고[핍박에 대하여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음], 오직 세례식과 성찬식만 거행하면서[진리의 근본이 있으면 형식이 있고 형식이 있으면 근본이 있는 법이므로 최소한의 형식으로서 이 세례와 성찬예식은 필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의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믿음을 지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오직 부지런히 일하여 그 소득으로 조촐하게 생활해 나갔다는 것이 아래 글의 대충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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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entic records in France assure us, that a people of a certain description were driven from thence in the twelfth century. Bohemian records of equal authenticity inform us, that some of the same description arrived in Bohemia at the same time and settled near a hundred miles from Prague, at Saltz and Laun, on the river Eger, just on the borders of the kingdom. Almost two hundred years after, another undoubted record of the same country mentions a people of the same description, some as burnt at Prague, and others as inhabiting the borders of the kingdom; and a hundred and fifty years after that, we find a people of the same description settled by connivance in the metropolis, and in several other parts of the kingdom. About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lower, we find a people in the same country living under the protection of law on the estate of Prince Lichetenstein exactly like all the former, and about thirty or forty thousand in number. The religious character of this people is so very different from that of all others, that the likeness is not easily mistaken. They had no priests, but taught one another. They had no private property, for they held all things jointly. They executed no offices, and neither exacted nor took oaths. They bore no arms, and rather chose to suffer than resist wrong, They held every thing called religion in the church of Rome in abhorrence, and worshipped God only by adoring his perfections, and endeavoring to imitate his goodness. They thought Christianity wanted no comment; and they professed the belief of that by being baptized, and their love to Christ and one another by receiving the Lord’s supper. They aspired at neither wealth nor power, and their plan was industry. We are shown how highly probable it is that Bohemia afforded them work, wages, and a secure asylum, which were all they wanted. If these be facts, they are facts that do honor to human nature; they exhibit in the great picture of the world a few small figures in a background, unstained with the blood, and unruffled with the disputes of their fellow creatures." [Robinson, in his Ecclesiastical Researches, p. 527.]

 

 

"It was their wisdom in their times not to come forward to deliver apologies to the world, and creeds with flattering prefaces to princes, the turbulence of the crowd would have caused the still voice of reason not to be heard. Gratitude to the noble defenders of the civil and religious liberties of Bo hemia, on whose estates in various parts of the kingdom people of all denominations had resided in peace, requires a few words to be added concerning them. After the defeat of Frederick, and the reduction of the country, about forty-seven noblemen and gentlemen were at one time imprisoned and tried. one of the first was count Andrew Schliki. When he was on his trial, and the judges had fatigued him with a string of impertinent questions, he tore open his habit, and exposing his naked breast, said, “ Divide this body into a thousand parts, and ransack this heart to the bottom, and you will find - nothing."



초대교회 전통을 이어 받은 이러한 형태의 당시 교회가 유무상통(행 4:32)을 당시까지만 해도 지켜 왔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서특필할 만하다. 이렇게 초대교회 가르침의 요체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아 성경을 입수할 수 없던 시대라 성경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형제의 도움으로 성경을 통째로 암기하고 있었다. 가령 욥기 같은 것도 거침없이 줄줄 꿰고 있었다고 그들을 핍박한 로마 카톨릭이 증언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에 친근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믿음은 말씀 중심이어서 빗나갈 염려가 없었다. 존 위클리프(1320-84)가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백여 년 뒤 윌리엄 틴들(1492?-1536)이 주위의 도움을 입어 자기가 번역 완성시킨 영어 성경을 간행 배포했다. 그 전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400?-68)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고안했기 때문이다. 그가 최초로 찍은 것이 성경이었다고 한다. 해서 1456년 이전에 활자 인쇄한 라틴어역 성경을 “구텐베르크 성경”이라 한다. 마틴 루터(1483-1546)가 또한 독일어판 성경을 간행했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각 개인의 손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틴들의 성경은 흠정영역의 원어 학자들이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거나 참고할 정도로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틴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 말이 있다. "어거스틴이나 오리겐도 오류가 있다. 이런 오류를 검증하려면 성경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지당한 말이다.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한 경고다.

이런 말을 한 틴들 역시 어느 모로 보면 그 가르침에 오류가 있었으니 예를 들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를 적대시한 천주교에서는 그가 인간의 자유의지까지 부인한다고 비난했었다. 루터에게도 비슷한 정도의 오류는 있었다. 칼뱅에게도 있었다. 고로 틴들의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의 오류 여부를 알려면 성경으로 검증하는 것이 유일하고 또 안전한 것이다. 성경은 이를 베뢰아 사람들의 예로써 경고하고 있다[행 17:11,12].

그러므로 최종 판결은 성경을 통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로 내려 주시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을 각자 부지런히 읽지 않으면 안된다. 왜 자기 운명을 남의 손에 의탁하는 못난 짓을 하겠는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충분한 판단력과 건전한 양식과 상식을 주셨다. 고로 오직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자기 영원한 운명을 정할 수 있다. 성령께서 그 스승이시기 때문에 그 정확한 가르침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고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이나 눈물로 밤낮 가르치고 아무 것도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면서 떠날 때 한 말이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주님(성령)과 그 은혜의 말씀에 맡기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실 것이다"(행 20:32).

 

 

 

 
 

 

 

페북이 5천에 달했을 경우

https://www.facebook.com/help/116067818477568?helpref=faq_content

 

https://www.youtube.com/watch?v=mcHLRqEbCXQ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1천500년 전의 일이다. 5세기 초, 신라 눌지왕의 아우인 미사흔이 왜에 볼모로 잡혔다. 왕은 박제상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했다. 왕명을 받은 박제상은 왜왕을 설득해 미사흔을 구출했지만 정작 그는 탈출에 실패해 화형을 당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박제상의 아내 김 씨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동해가 가장 잘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 무사귀환을 빌었다. 치성은 그리움이 됐고, 절절한 그리움은 바위와 새로 둔갑해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그 바위가 망부석이고, 새는 국수봉의 작은 바위굴로 날아가 세상을 등졌다. 굴은 나중에 '새가 숨은 바위'라는 뜻의 은을암(隱乙巖)이란 이름을 얻었다.

WE DIE ALONEhttps://erenow.com/ww/wediealoneawwiiescape/


https://en.wikipedia.org/wiki/Unity_of_oppositesUnity of opposites

In physicscomplementarity is both a theoretical and an experimental result of quantum mechanics, also referred to as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It holds that objects have certain pairs of complementary properties which cannot all be observed or measured simultaneously.

https://www.britannica.com/science/complementarity-principle
omplementarity principle, in physics, tenet that a complete knowledge of phenomena on atomic dimensions requires a description of both wave and particle properties. The principle was announced in 1928 by the Danish physicist Niels Bohr. Depending on the experimental arrangement, the behaviour of such phenomena as light and electrons is sometimes wavelike and sometimes particle-like; i.e., such things have a wave-particle duality (q.v.). It is impossible to observe both the wave and particle aspects simultaneously. Together, however, they present a fuller description than either of the two taken alone.
In effect, the complementarity principle implies that phenomena on the atomic and subatomic scale are not strictly like large-scale particles or waves (e.g., billiard balls and water waves). Such particle and wave characteristics in the same large-scale phenomenon are incompatible rather than complementary. Knowledge of a small-scale phenomenon, however, is essentially incomplete until both aspects are known.
 
https://www.britannica.com/science/physics-science#ref406801
 

The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asserted by the Danish physicist Niels Bohr, who pioneered the theory of atomic structure, states that the physical world presents itself in the form of various complementary pictures, no one of which is by itself complete, all of these pictures being essential for our total understanding. Thus both wave and particle pictures are needed for understanding either the electron or the photon.

 

 

 

http://www.freerepublic.com/focus/chat/2323246/posts

위와 같은 내용ㅡ이 방면에 대한 자료가 흔하지 않다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