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간증(증언)

인생 항로(航路)의 폴라리스(북극성)ㅡ한 간증자의 동영상

Tayseek Kwon 2016. 2. 28. 23:10


각종 사이비 간증들이 난무하는 때가 되어 간증을 듣는 편이 아니나

불교 신자로서 믿음에 들어 온 계기 그리고 죽음의 실상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므로 여기 기꺼이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간증자에 대해 전연 아는 바가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PeAXL6V3T8

유투브(위의 주소)에 있는 것을 스마트폰을 거쳐 옮겨 온 것 










행복하게 사는 최고 지선의 방법은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으로써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법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몇몇 극소수에 한하여 남들이야 어찌 하든 나만은 그런 사람 사는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뿐 대부분은 범인들로서 대세를 따라 남 따라 나도 하는 식으로 나갈 뿐이지 공동체 의식을 앞세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만은 그렇게 하리라는 일관된 사상으로 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대개 의인이라 불러주는데 그런 공동체 의식이 일구어낸 공적이 많지도 않거니와 사례를 들기도 힘들기는 하지만(대개 음지에서 그리고 남 모르게 진행되므로), 참으로 희귀한 역사적 사례로 우리는 항상 임진란의 이공 순신을 예로 드는 것이다. 사례가 드문 것은 이공과 같이 전쟁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예가 좀처럼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데에는 서로 약속이 있어야 하고 그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완벽한 이상향 구현이 되는데 서로 믿을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이를 부정적으로 증명한다. 남이야 이행하든 않든 나만은 그것이 옳은 일이므로 지키겠다는 사람이 혹 가뭄에 콩 나듯이 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가 아담 이후 3운법칙과 같은 강제 수단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정글의 맹수와 같은 자아중심의 인생들이요 또 그런 인간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잘도 굴러간다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인력으로 잘 안된다는 말들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 실체는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혹 말하는 이는 있지만 그저 막연하여 바람 잡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막연하던 실체가 현실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제 그 비밀 혹은 실체의 하나가 드러난 것이니 곧 3운(三運)법칙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삶을 옭아매어 옥죔으로써 한 치 빈 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구조이다. 우주의 신비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 많은 인생들의 삶이 차질없이 운영되어 나가는 이 바로 '인간 우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주 천체보다 더 정밀하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고로 한꺼번에 몰살하는 돌발사태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개개인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세 가지 유형에 한정해서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이다.


때가 되어 죽으니 그러면 살인자에게 통하는 변명인가. 그렇지는 않다. 때가 되어 자기가 손을 대지 않아도 죽을 것을 자기 손이 일부러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죄가 성립됨이 당연하다. 차라리 가만 있었다면 자기는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로 천하의 살인귀들은 이 점 명심하여 한없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사 세상사가 물고 물리는 악순환이든 선순환이든 돌고 돌아드는 것이니 이 광경만 상상해도 절대자의 위엄 앞에서 심장이 멎어질 지경이다.


삶은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므로 머리 몸 관계인즉 각 지체는 머리와 개별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 신체 중 각 지체가 신경 세포에 의해 머리와 연락이 맞닿아 있어 직접 지령을 받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등 인격적 존재로서 지, 정, 의가 분명한 피조물은 머리이신 창조자 하나님과 직접 약속을 하는 것이다. 새 창조에서 회개가 바로 그 약속이고 이 약속을 액면대로 받아주시는 것이 성령 주심 곧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현재 내가 영생이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어 영생이 있지만(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 그것이다ㅡ요일 5:12) 동시에 성경은 천명하기를 "영생의 약속"(요일 2:25)이라 했다. 왜냐면 순종하기롤 약속하고 현재 구원되어 영생을 소유하고 있지마는, 이 약속을 잘 이행하는지 여부에 따라 또한 최종 결판이 나는 까닭에 영생이 약속임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음은 당연하다(히 4:1/6:17/10:23,36/약 1:12/2:5/벧후 4:1/요일 2:25).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저들 가운데 거하며(살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셨으니...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이여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6:16-7:1) 함과 같다.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는 설교를 과연 오늘날까지 강단에서 몇 번 들었던가.


내가 지금 양자가 되어 있어 "아바, 아버지"(갈 4:6)라 하지만 동시에 이 또한 약속인 것이다. 왜냐면 내가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끝까지 나의 약속을 수행하지 않음을 인하여 파기되면 파양(罷養)이 되는 것이다. 육체로 난 자연계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양자 아닌 친 자식일 경우 말인즉 부자 인연을 끊는다 해도 자식은 엄연한 자식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양자 관계에 있음이니 양자 곧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는지의 여부를 묻게 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강제력에 의해 겨우 지탱되어 가는 세상이 한시적임은 마땅하다. 또 이런 세상일수록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하는데 도리어 사랑하여 영원한 세상의 생명과 맞바꾸려 하다니 이를 어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인간은 죽음의 실상을 너무나 모르고 지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을 임시에 가서 죽음의 실상을 뒤늦게야 알고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다가 숨이 넘어가는 사례가 너무 흔하다고 한다. 사탄이 이제까지 씌워놓은 죽음의 안대(眼帶)가 겨우 벗겨지는 순간 죽음의 실상을 보게 되나 보는 그 순간 이미 죽음은 인정사정 없이 낚아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죽음의 실상은 살아생전에 미처 보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무조건 신뢰하는 과학에서 그 최고 영역에 속하는 3위1체의 원리에 의한 초자연계 실상만은 인지하도록 3운법칙을 알리신 것이건만 사망의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 인생들이 과연 얼마만큼 이 소리에 소스라쳐 깰 것인가. 술에 대취하면 인사불성이다. 세상 술에 취해도 보통 취한 상황이 아니다. 19세기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4복음서와 똑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는데 그 중 색다른 것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내가 세상 한복판에 와서 둘러보니 모두가 세상 술에 만취돼 있어 이를 슬퍼한다"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듣지 않아도 오늘날은 사람 잡는 사람 홀리는 세상의 그 기세가 더욱 왕성하여 심하게 말하면 밥먹는 시간만 빼고는 잠잘 시간도 없이 눈은 컴퓨터, 스마트폰 화면에 꽂혀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처하는 데에도 좀더 자극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3운법칙에 의해 검증되는 3위1체 원리 곧 만유 창조의 법칙, 만유 존속의 법칙, 삶의 법칙(머리와 몸의 관계로 둘이 하나되는 불변의 이치를 따른) 따라서 구원의 원리(마지막 아담과의 둘이 하나됨)를 나타내어 주셨건만, 과연 얼마나 얼마만큼의 사람이 화답해 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인생들이 모두 자아중심이 되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세상은 용케 잘도 굴러간다 하지 말 것은 그 이유를 3운법칙이 드러냈다고 했거니와 그래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철저히 통제를 해놓으시기 때문이라 했지만, 이런 통제된 세상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에 무의미하므로 복음 전파만 끝나면 즉 믿어 약속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다 선별한 후에는 지체없이 끝나는 것이다. 약속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가려내시므로 그 작업만 완료되면 이 세상이 더 지체해 있을 이유가 없음이다.


사람 생기자마자 살인극부터 먼저 일어난 이 야수와 같은 세상이 오늘까지 지탱해온 그 원인이 하나님의 이런 제어 장치 때문인데 그 실상이 3운법칙으로 드러났다고 했거니와, 한 난파선이 닿은 곳이 어느 외딴 섬이었는데 거기 상륙한 십 수명의 선원들이 나중에는 하나만 살아 남아 여자와 아이들만 수두룩하게 되었다는 실화가 있다. 서로 응얼거리고 다투고 미워하고 죽이고 하다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일정한 법칙 아래에서의 통제 없이는 인간 세상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나며 큰 소리 땅땅 치는 인생들이니 참으로 한심하게도 미련하고 철부지하지 않은가. 단순하고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오히려 가장 논리적이라 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논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건만 소위 지식 있고 배웠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그런 미련함 축에 끼어 드는 것이다. 자아중심의 세계가 여태까지 지속되어 온 "신비로움"의 까닭이 드러났으니 이를 절대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과학자들은 부질없는 데에 신경쓰지 말고 이것부터 깨달아야 하는 것.


이를 깨닫지 못하면 천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된다. 이 세상 돌아가는 그 얼개가 밝혀진 것이니 곧 절대자의 통제로서, 도토리 키 재기로 똑같은 인생들이 모여 사는데 이를 어느 인간이 통제한단 말인가. 국가가 하는가? 국가도 사람이 하는 일. 전쟁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절대자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필연임을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세상에 가르치신 것. 그 선원 이야기도 수가 작아 한 명이라도 살아남았지 수가 많으면 한꺼번에 전멸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것도 그 남은 식구 먹여 살리라고 3운버칙이 작용했기 때문. 이와 같이 자아중심의 세상 벌써 망했을 것이나 가까스로 지탱해가는 비밀의 실체가 바로 3운법칙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탄 곧 용이 이 세상 신(고후 4:4)이요 임금(요 14:30)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히 1:14/욥 1:7)으로서의 위치인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을 천사들이 전담하여 봉사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다(마 18:10). 그래서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 받은 이들에게 전혀 손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요일 5:18) 주님께 손을 대어 죄수 취급하여 포박해 가서 법정에 세우고 사형에 처한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으로 주님께는 이 역시 일종의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신은 시험하는 자로서 우리로 온갖 고난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나, 욥기에서 보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지는 것으로서, 그렇지 않고는 문자 그대로 한 손가락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넘어가 아담 부부가 그 말을 들었듯이 우리도 아담처럼 되는 경우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즉 현재의 인간 세상 곧 만인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얼개가 3운법칙이다. 그 복잡 다단한 관계에서 천사들과 악령들이 어떻게 해서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요, 단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렇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3운법칙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려는가. 어떤 것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데에는 그만한 충분한 확증이 있지 않은 다음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50:50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려는가.


그것은 또 더 없이 미련한 짓이 된다. 원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가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3운법칙의 경우 초자연계의 실존을 증명하는 3윈1체 원리를 검증하며 이상 설명과 같이 초 정밀한 인간 생애의 관장(管掌)을 의미하므로 너무나 거창한 것이다. 이런 사실 앞에서 가도 부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있기에는 사안이 워낙 심각한 것이다. 부정할 수 있는 무슨 단서가 없는 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적응하는 것이 지혜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정쩡하게 양 다리 걸치기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때이다.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 스스로 대응하지 않고는 거센 물결에 어느 틈에든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깨닫게 될 터인데 그렇게 인식할 때에는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거센 물살에 몸을 그대로 맡기느냐 아니면 재빨리 판단을 내려 거기서 즉시 빠져 나오느냐 역시 여기서도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지구는 정밀한 기계와 같다는 바다 사나이 마도로스 캡틴이 쓴 수상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언제나 보이는 것은 수평선, 더러는 지겹기까지 한 수평선, 나는 또 거기다 육분의로 태양을 끄집어 내렸다. 정오의 위치를 내기 위해 정중시(正中時)의 고도를 잰 것이다. 태양이 측자의 자오선상에 정중해 있을 때 즉 천의 극 정점 천체가 자오선 상에 일직선이 되었을 때 육분의로 고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구하는 자오선 고도 위법이란 항해술이다. 지구는 정밀한 기계와도 같다. 아니 모든 우주의 원리는 일정한 법칙 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기계가 제작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듯이 대우주의 모든 천체는 그 법칙에 의해서 오늘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우주의 창조자는 누구일까. 제각기 정밀한 기계와도 같이 일정한 법칙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나는 천측(天測)을 할 때마다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하게 대우주를 만든 창조주 - 즉 신(神)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같은 믿음이다. 나는 항해를 배우기 전에는 무신론자였다기보다는 막연하게 우주의 자연 발생설을 믿고 있었다.


"지구는 언제부터인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또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지구에 자연히 생겨나고 종족을 번식시켜 가고 있었다"-나는 막연하나마 이렇게 알고 있었고 또 신(神)에 대해선 별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배를 타게 되면서 항해술을 알게 되고 험한 바다에서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천체과학을 이해하게 되고 서양의 점성술에까지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관심은 차츰 대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神)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만약 인간이 알아낸 지구의 운행 법칙이 잘못되었다면 내가 지금 천측해서 낸 현위치가 틀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매번 목적항에 도달하고 보면 이는 한 치의 오차없는 초과학이 아닌가 한다.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이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있듯이 일정한 운행법칙을 갖고 있는 우주 속의 천체를 만든 창조주가 없을 수가 있을까.


"모든 별들은 움직이되 다만 북극성만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고 세기의 영웅 줄리어스 시이저가 좋아했던 별 - 꼭 물 국자처럼 생긴 북두칠성의 끄트머리의 MERAK와 DUBHE라는 별의 일직선 상의 밑에 위치한 북극성 - 북쪽 하늘에 떠있는 북극성의 고도는 항상 그 지방의 위도와 거의 같다. 그래서 뱃길을 잡을 때 북극성 위도법을 쓰면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해야 하는데 그곳의 위도와 같게 육분의로 재면 쉽게 관측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신(神)의 오묘한 섭리다.


언제나 변함없이 북쪽 하늘 어느 곳에나 그곳의 위도만큼의 고도로 항상 정좌하여 있는 별.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의 신비는 불가사의할 뿐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또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이 세가지의 명제를 아직껏 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영원히 풀지 못할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파라문교 등이 유일하게 그것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 다른 종교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종교에서조차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그 명제. 그러나 분명히 그 명제의 해답은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 해답을 풀 수 있을 때가 언제일는지 -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마치 죽음의 소리와도 같다. 1초가 흐르면 그만큼 우리의 생명도 줄어들 것이고 언젠가 마지막 1초가 다가오는 순간 우리의 생명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그 귀착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선박이 항해를 해서 목적항에 도착되듯이 우리 인생도 항해가 끝나면 목적항인 도착지에 과연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아직껏 이 명제를 푼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딘가 도착지는 있을 것이다. 오직 신(神)만이 알고 있는 곳 - 그곳을 향해서 우리는 지금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차츰 죽음에 순응되고 인생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 순응 - 그것은 마치 신(神)과의 접근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많은 문학가, 과학자가 끝내는 종교에 귀의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는 사실 그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을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그것만큼 사람으로서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솔로몬 전도서를 읽어보면 인생의 종말을 알 것만 같다. 솔로몬 대왕이 말했듯이 죽음 직전에 선 인간이 부귀, 영화, 권세, 미녀가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다고 했다.


그렇다. 인간사의 모든 행복이란 것도 한낱 헛된 것이다. 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신(神)을 찾아 알고 믿음으로써 사랑으로써 겸손해지는 것.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을 알고 그리고 조용히 우리의 최종 귀착지로 향해 가는 준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姜錫坤 지은 1992년 간행 '바다와 思索'에서 일부 발췌).


이 정밀한 기계와 같은 엄밀한 법칙 적용이 인간 생애에 나타나 있는 것이 '트리니 호모(3運법칙)'인 것이다. 지, 정, 의도 없는 그냥 물체인 천체의 움직임 즉 자연법칙에 의한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을 보고 만물을 지은 창조자를 생각하게 된다면 모든 인간을 이와 같이 정밀한 기계 이상으로 재어 다스리고 있는 인간 법칙, 인간 생애의 법칙을 보고서는 무엇이라 하려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또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간 항해술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