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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못보아서 못믿는다"ㅡ다른 각도에서의 조명

Tayseek Kwon 2018. 8. 20. 17:57








(이 글은 몇 년 전에 게재되었던 것이나 다시 한 번 더 올립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으므로 못믿는다고 한다.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창조자는 전지전능하시니 인생들을 위해서 자신을 보여주시도록 조절하실 수 있지 않으냐 하는 논리다. 아무리 우주보다 크시다고 해도 그래서 평상시에는 볼 수 없다고 해도 가끔 자신을 변형시키셔서 인생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지 않으냐 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의 의지가 문제이지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냐 하는 그런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그렇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인간에게 나타나시고자 하실 때에는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있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심을 인생들에게 보여주시고 확인하게 하심이다. 그렇게도 못하시는가 하게 된다. 안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 하게 된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 17:27)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인간에게 나타내 보여 주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냐 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발견하는 목적이 문제로 대두된다. 그냥 하나님 존재하신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 구원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면 인생 구원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인생 구원은 거의 인간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대두된 문제다. 다시 말해 초자연계 몸으로 초능력으로 있다가(현재의 자연계 삶에 비하면) 범죄함으로써 현재처럼 자연계 몸으로 전락하여 죽은 자(초자연계 몸의 죽지 않는 몸에 비하면)가 됨으로써 인생 구원이라는 명제(命題)가 시작된 것이다. 


초자연계 초능력으로 사는 영생하는 몸이었을 때에는 하나님과 대화도 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는 그런 요구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 '그 결과의 원인 인식'이라는 상식적 판단으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증인에 의한 증언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담 부부의 증언으로부터 알려진 것이요 노아 때까지 이른 것이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 3대(이삭과 야곱에 걸치는)때까지 이른 것이고 모세와 아론의 집안에까지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생 구원에까지 이르러야 그 지식(하나님의 존재를 아는)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이 장차 오실 메시아(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의 구원자 즉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분)라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적 모형이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그림자로 나타내어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아들)으로서 나 위해(왜냐면 내가 사람이니까 사람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되신 분이시다. 바로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이니 말 그대로 100% 하나님을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 빌립이 "우리가 하나님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청하자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막연히 어떤 사실에 빗대어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요 12:45/골 1:15/히 1:3/고후 4:4/빌 2:6) 하신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직언(直言)하심이었다. 하나님이 사람되셨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것은 완벽한 '앎'이요 '봄'이다. 


사람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함이 곧 구원이요 영생이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우리의 어버이(창조자)로서의 머리(우리를 소유하신 주인)로서의 하나님이시다. 가장 이상향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법칙에서 그 중심이요 핵심이요 구심력이시다. 그리고 사람이신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하셨던가. 인류를 위해 즉 나를 위해, 죄인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나 위하여, 죄인의 몸이 되시고 죽은 자로서의 형상으로서, 형벌 받아 죽은 하나님 앞 사형수의 모습으로서 사형 당하시는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죽으신 다음에는 어떻게 하셨던가. 이런 자연계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던가. 아니다. 인류(첫 사람 아담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엘리야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그런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목격한 엘리사 외에는)가 일찍이 구경한 적도 없고 상상하지도 못한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신 것으로써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역시 그 초자연계 몸으로 하늘로 오르신 광경이 500여명의 증인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몸이시니까 아담이 그렇게 죽어 다시 살아나 원래의 그 초자연계 몸으로 복귀하는 모습 그대로이셨다. 그런즉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사람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느냐 여부에 모든 인생 문제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 유일의 의미로 육박해 오는 현안 과제이니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유일한 생사 문제이기 때문이다. 메시아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느냐 여부, 이 하나에 모든 것이 달린 것이다. 


이를 위해서만 3위1체의 원리가 있고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있으나마나다. 그렇지 않고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함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실 것이요, 어떤 사람을 우리가 보듯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한번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람에게는 보이신 적이 없으신 것이다. 초자연계에서도 원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분이셨으니 본다는 것은 오직 빛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딤전 6:16). 그것도 '자연계에서의 빛'을 말함이 아니라 '초자연계에서의 빛'이다.


고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방법은 변함 없이 아담 당시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방법이니 ① 하나님을 알고 직접 체험한 증인으로부터 그리고 ② 그 만드신 만물로부터 얻는 정보다. 전자는 오늘날 성경(신구약)으로 대표되고 후자는 지금은 3위1체의 원리를 벗어남이 없는 만물을 통해 그리고 역시 그 영향을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는 인간 생애의 법칙(3운법칙)으로써다. 이 법칙들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을 믿고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발견된 것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했다면 학문은 무조건 자연계 일방적으로만 한정되어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ㅐ 영원히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신(神)들이 있음을 밝혔거니와 이 자연계와 양립된 초자연계의 존재들을 가리켜 성경이 "신"들이라 한 것이다. 초자연계의 실상은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려 하지 않는 한 볼 수가 없다. 나타내는 경우에만 볼 수 있으니 우월적 존재의 초능력에 따름이다. 


이런 악마가 인간 세상을 쥐고 흔들며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데 그리고 이 진실을 알리는 것은 성경뿐이니 당연히 하나님 외에는 이 악령들을 능가할 권위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다. 악령들과 맞수가 되는 세력이라야 악령들의 모든 활동을 제지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맞서는 세력이 피조물로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듯이 하는) 거룩한 천사들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천사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님 친히 활동하시는 것으로 인식됨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우리 인생들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과 같다(골 3:17).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악령들에게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고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조종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악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무지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마치 자유를 빼앗기는 것처럼 되는 양 착각하여 도리어 자유인이 될 수 있는(악령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길을 스스로 차단시켜 온 한없는 어리석음을 범해 온 것이 인류 역사의 실상이다. 


속아 온 문화사(文化史)요 생활사(生活史)이다.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인 성경을 지금까지 무시해온 모든 실상이 그렇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극소수 외에는 온 세상 모두가 그러하다. 이러한 현실을 똑똑히 직시하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다. 둘 중 하나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자유인이 되지 않으면 세상 신에게 여전히 장악되어 한 발짝도 자유로 움직일 수 없는 노예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둘 중 하나다. 양자 택일이다. 


자유가 속박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았으나, 어리석게도 이미 철두철미 노예가 되어 있는 실상은 알지 못한다. 이미 모든 자유가 박탈당한 채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나중에야 이 실상을 알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자유를 박탈당해 있으면서도 이 무서운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 철저한 압제의 철권 아래 있으면서도 자유인이라 착각하고 희희낙락하는 것이니 너무나 비참한 현실이 아닌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악령들 위에 군림해 계시는 마지막 아담과 하나됨으로써)는 스스로 차 버리면서, 이런 무지를 지혜라 지식이라 여기고 오히려 오만이 극도에 달해 있다. 이 모두 악령 사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