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마호메트)도 프랑스 애국 소녀라고 추앙되는 잔다아크도 초자연계 존재의 특별한 음성을 듣기 시작하는 때가 그들의 3운법칙상 나타나는 LP(Lively Period, 활동기간)의 시작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둘 다 모두 그 음성을 천사의 음성 또는 지시라고 믿는 공통점이 있다. 무조건 초자연계 현상을 신성시하는 무지몽매함은 성경을 처음부터 잘못 배운 탓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신이 사탄이라는 것을 성경대로 인식한다면 함부로 그렇게 억단하지 못하는 법.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를 두고도 설명한 바 있지만 예언 등 초자연계적 현상에 절대적 권위를 두는 일들은 앞으로는 시정되어야 한다. 99%까지 맞은 예언도 나머지 1%가 틀릴 때에는 악령으로 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
이상 두 사람은 그 음성을 듣고나서 취하기 시작한 행동이 무력(武力)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무력으로 세상을 요리하는 것이야 특별한 계시를 받지 않아도 누구나 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는 일들임을 3운법칙으로도 넉넉히 입즈되어 있지만. 무력을 사용하도록 하신 것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림자 시대인 모세 율법 시대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러한 전쟁의 타당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니 성전 건축의 일에 있어서도 다윗은 "피를 너무 흘렸다" 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맡기신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오신 후 모든 진리가 밝혀진 오늘날에 와서는 누구가 누구를 징벌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 같이 심판대 앞에서 인생들로서 오직 화급하게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하는 일만이 유일무이의 관심사다. 만일 무력에 의한 전쟁이 해결책이라면 초대교회 당시부터 당당히 무력으로 온 세계를 "기독교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창설되자마자 동네북처럼 두들겨맞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판이었다. 끝까지 그러했다. 물론 주님의 말씀처럼 "피한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기회"로 역전시키는 전화위복의 하나님 경륜이었다.
우리가 "약해서" 세상에서 모든 핍박과 탄압과 대상이 되어 있지만 이 모든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이 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생 구원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있음과 같다. 고로 이러한 명백한 차이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천주교나 희교(이슬람)나 똑같은 세상 종교인 것뿐이다. 무하마드를 가공의 인물이 아닌가 일부에서는 의심할 정도로 "짜맞추기" 식의 종교이기는 하나, 인물은 실제 기록된 그대로임을 3운법칙은 확증한다. 출생년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은 활동기의 시작 그리고 사망 연도가 일치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세상을 풍미했던 종교가 인(仁, 유교를 종교라고 하기는 무엇하지만 여하튼 공맹의 도) 또는 자비(불교)를 주창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장치하신 인간의 양심과도 부합하는 것으로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여기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악용하여 "악에 대한 응징"을 구실로 삼는( 표방하는) 폭압의 종교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이슬람이요 로마 카톨릭이다. 평화를 내세우지만 속인즉 증오요 복수요 전쟁에 의한 정벌이다. 인간은 한 몸 체제에서의 사랑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지 징벌과 심판의 대리자는 아닌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악령 사탄 곧 용이요 마귀, 마왕(魔王)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초자연계적 현상이라고 무조건 절대적 권위를 두지 말라는 것이니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다 시험하라"(요일 4:1)는 경고와 맥을 같이 한다. 성경에 부합한가 여부로써 그 진위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사리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나 다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세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법칙의 동시성과 양연성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 한해서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고"(약 4:8) 그렇지 않으면 가까이 하실 수가 없음을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