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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의 구조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3과 7의 숫자는 뿌리 깊은 영원 불변의 것

Tayseek Kwon 2016. 10. 1. 17:46











그러므로 창조도 6일 동안 일하시고 제7일에 쉬셨고(안식) 그리스도께서 3일만에 부활하신것이라든지 그리고 대칭을 나타내는 2라든가, 또한 만법귀일(萬法歸一)을 나타내는 1. 모두 1始(시)2元(원)3位(위)1體(체) 법칙(간단히 3위1체의 법칙)으로 요약된다 할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도 양쪽으로 가지가 7개씩이다. 아래에는 특별히 2가지가 쌍을 이루어 역시 좌우 대칭을 이루어 있다. 제사장인지 사르곤 왕 자신인지 옆에 서 있는 인물도 손에 하나로 된 가지의 세 열매인지 무엇인지를 들고 있다. 3과 7을 "신성수(神聖數)"라 부를 만도 다다. 


대칭으로써 하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3위1체"이다. 하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면 그냥 양자로써 끝날 뿐이지 그것이 3이 될 수 없고 더군나 1은 더더욱 될 수 없는 것. 둘이되 처음 하나에서 나머지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같은 본질의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로서 존재하고 또한 움직이되 둘이(양편이) 함께 동시에 움직이니까 대칭을 이룬 둘과는 별개처럼 인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다 제3의 "位"격을 부여하여 이를 가리켜 "3위(位)라 하는 것. 즉 3'위'는 둘로써 따로 따로 존재하거나 활동하지 않고 대칭(인과, 주종, 대소, 선후의 母子 관계)을 이루어 하나로써 존재하고 활동하는 경우에만 쓸 수 있는 용어다.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을 잘 나타내고 있는 3운법칙의 구조에서 '병'을 가리키는 FS(Four-Sevenths, 4/7, 아브라함을 대표로 하는 아브라함 유형 생애의 LP 즉 활동기간)에서도 3과 4로 배열이 되어 있다. 즉 3/7이 DP 곧 생애의 비활동기(또는 침체기)이고 나머지가 4/7인데 이 4는 대칭을 상징하는 2의 배수. 3/7으로 정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4/7 즉 4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또 OT(One Third, 1/3. 모세가 대표형 생애이어서 "모세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나 몇 분의 몇인가 기억하기 좋도록 영어 머릿글자를 따 와 이름을 지은 것, 역시 모세형 생애의 LP 즉 활동기를 대표적으로 가리킴), SN(Seven-Nineteenths, 7/19, 노아형 생애의 LP)에서 LP, DP가 대칭형으로 되어 있다. FS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OT, SN이 상호 대칭 관계임을 훌륭히 상징하고 있다. 대칭 관계로써 당연히 그 성질이 정반대가 되는 것을 역시 나타내어 3등분(OT)과 19등분(SN)은 상호 도치(倒置, inversion, reversion)되고 있어 19라는 수치가 그래서 탄생된 것.


수치로써 이상의 내용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기로는 이 외에는 있을 수 없는 아주 절묘한 구성인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에서 짝을 이룬 두 미립자가 하나는 "down spin", 다른 하나는 "up spin"이 되는 현상도 이와 똑같이 아주 보란듯이 회화(繪畵)적이다. 대칭성의 "도치성"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하거나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며칠 전 누가 읽어보라고 주기에 100쪽 짜리 "환단고기" 완역본의 가이드북이라는 책자를 들쳐보니 흥미 있는 데가 있어 소개하는데, 우리 배달 겨레의 뿌리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의미로 기술되어 있는 중에 그 중심 사상으로서 "신교(神敎)"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바, 여기에 執一含三(집일함삼), 會三歸一(회삼귀일)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42장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는 문구가 이를 토대로 하여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노자는 이 문구만 무뚝뚝하게 적고 나서는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아무 토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창조자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설명하며 하나님과 관련시켜 3과 7을 말하는 데에 주목하면서 필자는 아담→에녹→노아→아브라함→모세 대략 이런 줄거리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통(法統)"을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부지런히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이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시므로 굳이 법통이라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의 선조들이 가르쳐 온 바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산 자로서 하나님이 데려 가심을 입은 에녹과 대비되는 아담의 죽음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남으로써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려 하신 것이다. 즉 의인(에녹)과 죄인(아담으로 대표되는)의 서로 다른 생의 결과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처럼 에녹을 의인의 표상으로 삼아 그 생애의 종국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이신 것이다.


이 얼마 후(불과 몇 십년)에 노아가 태어났으니 아담의 죽음과 에녹의 불멸(不滅)을 노아는 깊이 명상하기 시작했음에(에서와 대조되는 야곱처럼) 틀림 없다.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에게 가르쳤고 이 세 아들이 현재 인류의 조상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능지수가 제일 높다는 한민족의 조상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이 가르침을 명심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개중에는 아브라함이나 욥 등이 있었음을 성경을 밝히고 있다. 아담은 초자연계 몸으로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했고 따라서 하나님께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후손들에게 전달해 준 여러가지 중 하나가 "3"과 "7"의 숫자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환단고기에 나타난 대로의 성경과 유사한 유일신관을 지속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동쪽으로 말달려 왔다는 것도 아담의 가르침을 받아 "에덴의 동쪽"을 염두에 두어 동쪽에 대한 친근감을 가진 것이 그 동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덴과 같은 이상향이 동쪽에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막연히 그런 동경심에서 동으로 민족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노아가 아직 생존하면서 인생들을 교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대 후손들이 곁 길로 나가 악령들의 선동에 놀아나 악령들을 섬기고 있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바울 사도가 "너희가 신속히 이와 같이 바른 길을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긴다"고 탄식한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 정도나마 지속해 왔다는 것이니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런저런 여러가지 가르침이 용납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정확히 밝히시고 가르치신 이상 여전히 그런 미숙한 과거의 "깨침"에 연연한다는 것은 악령들의 속임수에 말려드는 것밖에 더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던 이스라엘 민족도 "음녀, 음부"처럼 하나님을 떠나는 판인데 이런 악령들의 책동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고로 올바른 역사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작 문제는 각 개인의 구원이므로 그런 환단고기 같은 것에 붙들려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