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으니 그가 출가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 하나님께서 이러한 안나 여 선지자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몇 안되는 영접자들 중의 하나로 선정되는 은혜를 입도록 하신 것이다.
오늘날 금식(禁食, 단식)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망된다. 초대 교회는 금식 기도하였다. 사이비 집단이 금식 기도를 강조하는 바람에 이를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렇게 되면 사탄의 궤계(책략-고후 2:11)에 말려듦이 된다. 장시간의 기도를 꺼리게 하고 금식을 달가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의 노림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사시는데(거-居-하시는데) 둘이든 셋이든 그 이상이든 그렇게 하나님을 모신 이들이 모이면 당연히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심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그 곳에 나도 있다"고 일부러 강조하신 것인가. 거기에는 분명 뜻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계시면 반드시 아버지께서 또한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그 어디서나 성전(聖殿)이다. 성령을 모시고 있는 각 개인의 육체도 성전이고 이와 같이 친히 "거기 내가 있다" 하셨으니 "거기"도 성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계 1:6/벧전 2:9)이다. 제물은 우리 자신이 고난 받는 것 자체가 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초자연계 몸(삶의 향락을 위한)이 되어 있지 않고 모든 연약에 휩싸여 있어 갖가지 고난 고통의 표적이 되어 있는 자연계 몸 그대로 있는 것 자체가 이러한 필수 필연적인 고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 그 자세가 바로 이러한 희생 제물로서의 마지막 아담과 하나가 되어 있음(다시 바꾸어 말하지만, 이러한 몸을 지니면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배반하고 있다는 증거)을 의미하는 것. 즉 성전(하나님), 제사장(주님 자신께서 친히 대제사장), 제물 이렇게 3대 요소가 골고루 하나도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