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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최고도의 완성된 미학(美學)이 무엇인지 아는가

Tayseek Kwon 2016. 4. 10. 13:41

전지전능하신 이의 어버이 사랑의 아름다우심이여!


머리와 몸이 한 몸 체제가 되어 동고동락하는 것ㅡ이 이상으로 이상적인 삶의 구조는 없다. 전지전능하시다 하여 그냥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을 다시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저주에 동참하시고 함께 고통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고 함께 하나되는 이치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드라마나 소설로 꾸민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주제가 된다. 이 모두 한 몸됨의 하나되는 원리원칙대로 하나님 친히 따르심이니 이렇게 원리원칙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시다. 여기에는 모든 의(올바름), 선(좋은 것), 그리고 공평공정함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역시 자주 독립성을 100프로 보장하심이니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덥석 받아 챙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사랑의 주인 의식으로써 시종 일관하여 하나님의 이 새 창조 작업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다시 말해 마치 우리 스스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그런 형식을 닮게(밟게) 하심이니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다운 것이다. 피동적(수동적)이 아닌 적극성으로 주체 의식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심은 나중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의 나라에서의 능동적인 풍성한 삶을 누림에 한없는 보람을 느끼게 하심이다. 나도 천국 건설에 한 몫 했다는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시도록 하는 배려이시다.


지금까지 창조자 하나님께 대한 그릇되고 막된 인식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신(神)" 사탄이 인생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것으로서 그래서 퍼뜨려진 것이다. 모든 인생의 자연계 존재로서의 무기력성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물(靈物)로서의 막강한 위력의 초능력 앞에 허수아비와 같은 것으로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위치일 수밖에 없다. 물론 동일하게 막강한 "거룩한 천사"들의 맞대응이 있으나 우리 인간의 이 배후 세력은 우리 자신 정확히 말해 나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강조되는 것은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한 몸됨에 나 자신 얼마나 부응하고 호응하느냐, 여기에 달린 것이다.


사탄과 맞설 수 있는 거룩한 천사로서의 상대는 미가엘이라는 천사다(계 12:7/단 10:21). 우리 인간들 때문에 맞붙은 대규모 전투로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이 하늘 전쟁(우주 전쟁)에서 성경대로(계 12:7) 패퇴한 사탄은1908년 6월 30일 지구상에 영구 추방당함으로써 지금 세상은 이들 악령들로 가득 차 있다. 소위 "외계인" 또는 "ufo" 소동이 오늘날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것도(물론 이 이전에도 조금씩 나타나기는 했어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사가 시작된 이후 연대별로 따지면 바로 지금 이 때가 비상 시국이 되고도 남는다.


사탄 등 악령 일당은 패전으로 인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는 더 이상 자리를 확보 못함으로 인해 상처 받은 결과로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는 처지에서 또한 그렇다. 그래서 지금까지 에덴낙원에서의 "뱀"이라는 그 정체가 효과 있게 숨겨져 왔지만 지금은 대대적으로 폭로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좌냐 우냐, 생명이냐 영원 멸망(멸망은 존재의 인멸이 아닌 생명의 낙과는 상대성을 이루는 고난 고통 일색뿐임을 의미)이냐 양자 택일의 결단만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가장 합리적인 이치에 따른 인간 구원은 악령이 감히 모방 못한다. 초능력으로써는 거짓된 것과 합쳐(살후 2:9-11) 전무후무한 것으로 과시할 수 있어 여기에 무지무식한 이들이 많이(거의 전부라 할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이와 같은 진리의 합리성으로 따져서는 감히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 점에 착안하여 그 모든 태풍 같은 위세의 시험과 유혹을 능히 이길 일이다. 가령 모방한다 하더라도 이미 기정 사실화한 것을 베끼고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거짓됨을 그로써 자체 증명함이 될 것이기에 이에 자세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점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 욕됨을 당함(그래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를 주셨지만) 그리고 죽임 당함은 우리가 기피할 일이 아니라 받아 마땅하고 사모해 마지 않을 "은혜로 주신 것"(빌 1:29)이라는 사실이니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기뻐 뛰놀라 하시면서 아이들 같이 껑충껑충 뛸 정도의 것임을 밝히셨으니(눅 6:23) 이 또한 마음에 새길 일이다. 사랑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원리에서 내 생명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시니(그 대신 고난 받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어)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도 상함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눅 21:18).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모시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우리의 삶이니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실천적 미학(美學)이다. 그 시절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사자의 밥이 되기 위해 줄 지어 향하던 발걸음의 그리스도 사람들의 행렬에서 어린 아이를 안고 가는 한 젊은 엄마의 희망과 기대와 사랑의 순수함에 한껏 겨워 노래 부르며 가는 그 찬미가를 듣고 너무나 놀란 한 구경꾼은 그 자신 믿음에 들어가 후세에 그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능욕(reproach)을 지고 영문 밖으로(세상 사랑과 삶의 낙 밖으로) 그 분을 따라(사랑의 실천으로 당하신 고난이요 지금도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나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사랑의 송가(頌歌)가 가득 차고 넘치며 끊이지 않는 것이다(히 13:13-15). 시편 139편, 시편 23편도 그런 송가 중의 하나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노래 가사 아닌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