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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도 전문가로서의 명언명설(名言名說)이 있어ㅡ"건전한 판단"의 사례 1

Tayseek Kwon 2016. 4. 3. 03:05



"진화론, 무신론"을 체크하며 어느 카페에까지 들어갔더니 아래와 같은 댓글(타인의 블로그 내용에 대한)이 있기에 옮겨 놓았는데 이른바 "전문가"보다는 이런 댓글에서 번뜩이는 예지를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영어 권에서도 그런 것을 보게 되는데, 아래 댓글의 A와 B가(A와 B는 필자가 달았지만) 그렇다.


A. 진화론자들은 "관찰"에 의한 결론이 "진화"라는 것인데 말 그대로의 '자연계 관찰'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초"자연계를 말하고 있다. 아래 댓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비교 대상일 수가 없다. 이 둘을 모두 한꺼번에 놓고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그리고 이 의미는 3운법칙에 의해 절대적인 것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초자연적인 요소를 무시한 채 자연과학적인 의미만의 관찰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 외에는 더 되지 않는다. 자기 손이 접촉한 면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표현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을 고집할 때에는 이미 심각한 오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이다.


자연과학적 관찰 그 자체에서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옳다. 그러나 그것만을 고집하여 진화했다 즉 코끼리는 기둥과 같을 뿐이다(네 다리 중 하나만을 만져보았으니까) 하고 결론 내리면 그 때부터 왕창 진실 아닌 비진리로 빠져들게 된다. 가시계만 아니라 불가시계까지 볼 수 있게 되면 "기둥"이라는 관찰은 단지 일부분에 불과할 뿐 전체 코끼리의 모습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쉬이 이르게 되는 법. 즉 진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자께서 완벽하게 만물을 창조 완성시켜놓았다는 성경의 결론이 과연 진실임을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그런 관찰은 이 사실을 밑바탕으로 하여 전개되는 바 국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인데 이를 외면하니 여전히 그 장님은 자기 고집만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3위1체 원리는 그런 적절하고도 확고한 판단 기준을 우리 모두에게 제공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현재 등장해 있는 것이다. 가시계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불가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줌이다. 그러므로 3운법칙의 확실성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이 새롭게 세워진 판단 기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못할뿐더러 수용하느냐 않느냐 양자 택일만 있을 뿐이다.


3운법칙 자체가 창조신의 존재를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의 생애를 이렇게 저울질하고 있는 주체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인간 자신일 수는 없으므로 인간을 관장하는 창조자이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다. 진화론자들의 그 "자연 관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이런 새로이 나타난 사실을 기정 사실화하고 전제로 한 다음에야 오류에 빠져듦을 겨우 면할 수 있는 것임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존재가 실증되었다는 것 즉 유신론에 귀착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시는 그 메시지가 성경이라는 이 사실이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장차 나타나게 될 대단위의 속임수 즉 창조신으로 가장하는 적 그리스도의 위협적 요소는 이 성경(특별히 신약 성경)을 부정하는 데에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무신론과 진화론을 퍼뜨린 장본이 되는 악령이 다시 유신론을 꺼집어내어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에는, 먼저 이 성경의 권위부터 물타기 작전으로 희석시켜 놓는 것이 선결 과제임을 그 자신 잘 알고 있기 때문인즉, 이를 우리 인생들이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마우스를 누르면 전문을 볼 수 있음)



남녀 평등(대등하다는 주장)이 그런 예의 하나다. 성경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남자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주종, 인과, 선후, 대소 관계에서의 '질서'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반드시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생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이 점을 밝히지 못했다. 중국의 음양이원론도 그러했다. 대소 관계쯤이야 누구나 관찰로써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양자가 모자(母子) 관계에 있다는 것은 확증적으로 말할 수 있는 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근거가 밝혀진 것이니 3운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 3위1체의 원리다. 그러므로 부질없는 논쟁으로 귀한 시간만 낭비할 일이 아니라 이 시대적인 새로운 계시를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것만 확실하게 해둘 일이다. 3위1체 법칙의 핵심은 이 "모자" 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생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로서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골자다. 둘이 하나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어 그 둘과는 별개처럼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그 하나를 합쳐 둘이 아닌 셋(갑, 을, 병)이라 즉 3위(位)라 하게 되는 것. 작대기 하나를 두고 볼 때 이 끝과 저 끝이 둘로서 대립되어 있으나 작대기는 하나로 작용함과 같다 할까. 높음은 낮음을 동시에 연상하지 않고는 개념화가 될 수 없다. 높음이 있기 때문에 낮음이 있는 것. 이 경우 높음은 '갑', 낮음은 '을', 동시에 연상하게 되는 것이 '병'에 해당된다. '빛'은 병이요, 그 성질을 이루는 '파동성'과 '입자성'은 갑과 을이다.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선후(先後) 관계는 이 모자 관계를 가리킴이다. 


B. "동성"은 "동성 성행위"를 말하는 것. 제일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계를 정신문화적으로 선도할 책임이 한국에게 지워져 있음을 우리 각자 깨닫고 이 선두 주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일이다. 교회부터 각성해야 함이 마땅한 순서이다. 전국 전교회적으로 일대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날 때다. 중국의 송상절 박사를 부각시킴도 이 이유에서다. '송상절'류의 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일어나 젊음을 불태워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서방으로, 아프리까 아세아로, 세계로 "말달려" 나갈 때이다. 그 옛날 동으로 말달려 온 그 기개와 기세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기치를 높이 치켜 든 채 서방 공략에 나설 일이다.


나라는 작고 따라서 인구도 그렇게는 많다고는 볼 수 없으나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갖추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옛날의 쪽박 차던 신세는 면했으므로 세계의 선도 국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결코 없다. 선각자 김구 선생이 일찍이 설파한 대로 문화대국은 얼마든지 될 수 있고 정히 그 주도 국가로 발돋움할 때가 되었다. 예로부터 우리는 정신 문화가 창달했던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자까지도 이 한반도를 흠모하지 않았던가.  


송상절(宋常節, John Sung) 박사는 의화단 사건이 벌어지던 1900년대에 한 개신교 목사 집안의 여섯째로 태어나 영특했다. 아버지의 "유고시(有故時)"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교회 설교자가 되기도 했으므로 "작은 목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가난하였으므로 꿈도 못꾸던 미국 유학을 한 미국인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다음 열심히 수학하여 20대 초에 전공하던 화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냈으나, 영적 기갈을 채우고자 다시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악명 높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당시에도 완전히 물들어 있던 학교라 믿음의 성장은커녕 퇴보만 가져왔다. 


따라서 신학교에서조차도 영적 안정을 맛보지 못해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심지어 노자의 도덕경 같은 데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아볼까 생각하기도 했고 때로는 밤늦도록까지 불경을 외우기도 할 정도로 타락했다. 어릴 때부터 믿어 왔었고 성경의 기초 지식은 있다고 자신해 왔지만 여러가지 학문에 몰두하고 여러 서책에 골몰한 결과 그 모든 "믿음"이 밑둥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원 형벌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공포 속에 떨었다.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다시 출생하는 체험은 맛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영적으로 방황하던 어느날 한 정통보수주의적 교회에 나가(정통보수주의라고 다 건전한 것이 아니지만) 설교를 ①듣고 그리고 확인차 성경을 스스로 다시 펼쳐 ②읽고 ③기도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받아 크게 각성하여 진정 죄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새 창조를 경험한 뒤로는 완전히 삶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①과 ②와 ③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런 계기를 이루었다기보다 ①, ②, ③을 통해 성령의 계시가 나타났다고 보아야 옳은 설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계시가 나타나게 된 것은 그가 그런 영적 방황 가운데 부지런히 찾고 구하고 두드렸다는(진리의 문을)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에 나갔다는 것은 그런 두드림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니 그 세계는 지금까지 인식하던 것과는 완전 별개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죽음이었다면 지금 발견한 것은 생명 그 자체였다. 그래서 만나는 학생마다 교수마다 이런 생명의 광명으로 통해 다시 나는(거듭나는) 필요성을 역설하고 권유하기에 이르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교 당국은 그를 강제로 정신 수양원에다 193일간이나 감금시키기까지 하게 된다.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안 송박사는 거기서 성경을 40회나 통독을 했다. 이것이 훗날 복음 전도자로 맹활약을 할 때 큰 밑거름이 되었다. 송박사 자신의 말대로 바로 그 정신병자 수용소가 그에게는 진정한 신학 수업이 실시된 "신학교"였던 것이다. 한 미국 친구와 주미 중국 대사관의 주선으로 거기서 풀려난 송박사는 귀국하는 뱃길에서(1927년) 세속적인 박사 관련 증빙 일체를 미련 없이 태평양 한 가운데 던져 수장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그 여생을 오로지 하나님 나라 전파에 바쳤던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과 매일 발간되는 신문지를 대하는 것 외에는 일절 다른 데에 눈을 두지 않았으니 오직 영원한 생사가 인간의 유일의 주제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송박사는 철저한 회개, 삶의 완벽한 180도 전환을 주문했고 강조했다. 그리고 믿은 다음의 자기 부인, 십자가 지는 삶을 역설했다. 세상 사랑이 멸망과 직결됨을 청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주기 위해 한번은 설교 강단 바로 앞에 관(棺, 널, coffin)을 갖다놓게 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부자되시오! 부자되시오" 하고 외쳤다. 이거 웬 소리인가 어리둥절해할 때 "멸망하시오!' 하고 다시 외치고는(딤후 6:9) 단하로 내려와 준비해 둔 그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입이 벌어진 청중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사를 짓고 곡을 붙였다는 아래 구절에서  "Not trying my best to look like Jesus" 즉 "예수님 같이 되기에 전력을 다한다"는 대목을 보고 혹 오해하실 분이 있을까 하여 사족을 단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믿은 이후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기 부인의 표본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구원의 의미가 없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 완전성을 강제(요구)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100프로의 열매라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단지 주님을 닮고 따르고 본받겠다는 의지 하나는 필수이다. 삶은 사랑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0, 60, 100배라는 임의성을 두신 것이다(마 13:8,23). 두 번 연달아 말씀하셨으니 강조하심이 역력하다. 각자 100프로의 열매 맺음을 지향하되 다시 말해 완전을 목표하되(마 5:48/고후 7:1/10:6/13:9/엡 4:3) 그 뿌리가 되는 '사랑'에 집착해야지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행위'에 두는 위험을 경계하심이다. 송박사의 가사도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직 내 기준이 아닌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따라 그 뜻에 맞추도록 우리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이다. 사랑은 최고도에 항상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지 30, 60, 100이라는 계산을 하면서 행해지는 법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결과를 두고 볼 때 그렇게 나타나지는 것은 불가피하니 그런 데에 개의치 않고 오직 사랑 하나에만 전신을 바쳐 불사름이 진정 보람찬 삶이기에 그러하다.  



不是自己努力掙扎

( Not by works of righteousness which I have done )

是主裡面動工

( Jesus is in me and guides me )

不是自己模仿基督

( Not trying my best to look like Jesus )

是主裡面長大

( Jesus is in me and leads me )

主住裡面變化一切

( Jesus shed on me abundantly pardon )

愛主所愛樂主所樂

( love Jesus loves , please Jesus pleases )

憂主所憂負主所負

( grieved Jesus grieved , bear Jesus bears )

主心我心

( My heart as Jesu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