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판단"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믿느냐" 하는데, 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경우, 이를 건전한 판단 혹은 논리라 한다.
"우주를 볼 수 있느냐, 없다. 그러면 우주를 만드신 이라면 우주보다 클 것인데, 우주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다고 그러느냐. 만약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라면 그 크기를 말할 때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 중의 먼지만도 못할 것인데, 저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어찌 우주를 만들었겠느냐 하고 더 믿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볼 수 있어도 못믿겠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못믿겠다 하니 범의 장단에 춤추기도 어렵다. 그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 외에 나열하게 되는 여러 가지의 이유들은 순수하게 그 개인적인 것으로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낱낱이 열거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의 빈약성이 단번에 드러나게 된다. 말 장난에 불과하거나 사사로운 편견이나 선입관에 좌우됨이 여지 없이 폭로된다. 예를 들면, 창조자가 정의로운 존재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부정 불법으로 득실대느냐 하는데, 성경이 그 해답을 명백히 밝히고 있건마는 성경을 굳이 읽으려고 아니하는 데에서 그런 무신론의 어쭙잖은 변명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세상에 이러한 끔찍한 불행이 있느냐 하는 질문도 스스로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재 과학자로서의 무신론보다 일개 평범한 상인이나 회사원의 유신론이 "상식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절대 다수라고 해서 그 주장이 상식적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극소수라의 견해라고 해서 비상식이라 단정할 수도 없게 된다. 콜럼버스나 갈릴레오나 자기 세대에서 극소수에 속했던 인물인 것이다. 또 유신론자나 종교인(여기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상식적이라고 일괄적으로 분류하지 못한다. 왜냐면 창조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데에서만은 상식적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서는 몰상식함을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안 별로 다루어 그 상식과 비상식을 논하여 가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의 주제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