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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진실성(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
요한 사도가 그 복음서 말미에 유별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삽입해 놓았다. 왜 이런 특이한 대목이 끼워져 있을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간략하게 거두절미해서 요점만 기술하는 성경 기록의 특성으로 보아 필요없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성경이 모두 진실 그 자체라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다.
요한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볼 수밖에 없으니 따라서 이는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또 한가지 사례가 됨을 우리는 주목한다. 즉 그런 뜻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이 요한복음서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작용하는 관계로 그렇게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서 감히 더 이상의 군소리를 보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의 말미에 적힌 바와 같은 그런 잣단 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끼어 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기록한 모든 것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던 사실뿐이었음을 강력히 방증하는 것이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웅변으로 나타내는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이런 식으로써, 요한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에서 기술한 내용이 진실 그대로임을 서명 날인하시는 그런 형태인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서만 서명 날인해놓으시면 요한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복음서 그리고 기타 사도들의 서신들 모두가 같은 내용이므로 모두가 진실됨을 인(印)치시는[날인하시는] 것이 됨이다. 즉 요한이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꾸며대어 기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 기억력이 비상했던 것 같다. 30세쯤 되셨던 예수님의 품에 가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12 제자 중 가장 어린 아마 20세도 채 되지 못한 십대였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이종간이었다고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주 젊어서 그런지 또는 남달리 기억력이 좋아 그런지는 모르나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그 행하신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특점이 있다. 물론 모두가 다 요한 자신의 기억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기록한 후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나서 "그것만이 아니고 이런 말씀도 그 때 하셨다" 하고 지적해 주면 요한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어 끼워 넣는 그런 과정도 거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친히 약속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 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설교도 그렇다. 상당한 장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요한 이하 모든 사도들이 들었을 것이요 그런 사도들의 기억들을 살려내어 그렇게 스데반의 명설교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요한이 듣고 기억한 것을 누가가 직접 전해 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누가 역시 듣고 그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그 내용대로 옮긴 것일까. 물론 성령께서 친히 그 기억을 되살려 주시는 등 역사하신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 그대로다.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기록해두고 있는 "잣단"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했으니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려고 이런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나 할 정도다.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두고 그런 "자기 과시[자기중심으로서의]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만큼 이 말미의 기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만세반석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스며 있으니 곧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베드로가 수일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난 다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으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그런 순간이었다 하겠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고로 주님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신 주님도 역시 같은 사랑으로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한 역시 듣고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약간의 질시(嫉視)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말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또한 평소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될 만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베드로에게는 요한에 대하여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도 옳다.
질투란 것은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왜냐면 내가 '그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 하면 너무 억단일까. "성령께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헛된 말(빈 말)인 줄로 아느냐"(약 4:5) 하고 성령의 사랑을 가리켜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물론 이런 데에서까지 굳이 "질투"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이 "질투"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과 나와의 사랑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아주 반대로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남녀끼리의 사랑보다 더[삼하 1:26] 진한 개인적 감정이란 사실임을 이런 용어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는 못하리라.
이미 이에 대해서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 곧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내가 어떤 이를 나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정도의 사랑을 기대함은 인지상정이니 왜냐면 그럴 충분한 사유가 되는 까닭에 그렇게 기대함은 무리가 아니요 이것은 자기중심과는 별개의 의미이다.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이 시기나 질투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속성으로도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으로써 각 육체에게 영혼처럼 위치하시어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유(類)의 욕구에 대해서는 이의 없는 100퍼센트 만족도다. 고로 그런 점에서는 더 다시 그런 감정이 믿는 형제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는 더 여기시고 누구는 덜 여기시고 하는 것 없이 전부가 완전한 사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물음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역시 언뜻 보기에도 동문서답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든 그런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사랑 즉 개별적인 사랑-요한과 주님과의)이고 너는 네 나름대로의 너만이 가진 너와 나만의 관계(사랑 즉 '또 하나'의 별개의 사랑-베드로와 주님과의)가 중요하고 그것만이 네게 중요하고 한도 없이 충분하고 다른 것은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시는 뜻이라 하겠고, 그래서 다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을 통하여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게 지극히 만족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사적(私的)이고 개별적인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도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없다. 당장 삼각관계가 되어 버리고 질투와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한 면으로만 바라보는 얼굴을 지니고 있음과 같다. 그 쪽을 보면 다른 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가운데에서의 일대일의 사랑이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다른 제삼자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시다. 그렇게 일대일의 사랑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베푸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대목은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차이 혹은 하나님의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처럼 그런 완벽한 일대일의 사랑이심과 동시에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러하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이런 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 간단한 에피소드로써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는 주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것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처음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특성인 것이다. 단지 이 경우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시고 강조하신 것이다.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그저 담담하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는 의미뿐이었다고 일반적으로 그 복음서 내용에서 좀처럼 설명을 가하지 않았던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을 정도다. 왜냐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 풀기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 복음서 기록에 일부러 기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지내놓고 보면 다 사라지고 말 한낱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일개인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는 차원의 해명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령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고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너만을 사랑하는 내 사랑은 내가 너 외의 그 누구를 너처럼 사랑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 너만을 사랑하는 그 의미 그대로이니, 이 점에 관해서만은 네가 백 번 믿어도 좋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곧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너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단지 구원만 얻는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순간순간의 삶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랑이니 곧 내 생명의 핵이 됨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함이다. 이렇게 둘(주님과 나는 엄연히 둘이 아닌가)이면서도 하나요 하나로 보이면서도(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또는 주님 혼자만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둘[주님은 나와 함께, 나는 주님과 함께 존재하는]로서 존재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존재이기에 성경은 "새 피조물"이라 하고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린 결론에 좀 더 설명을 덧붙이면, 그 요한복음 21:18-25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순전히 베드와 요한에게만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수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왜 요한이 따랐을까. 그러면 또 베드로는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주님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가. 또 주님의 대답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언정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이었으니 왜 그럴까.
나중에 요한도 이를 설명하기를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단순히 주님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해 당시 자기에 관해 떠돌던 말들을 여기서 단박에 해명하여 해소하고자 이 대목을 일부러 삽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심경에서 그런 질문을 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간파하시고 그런 대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당시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필자는 그 초점을 베드로의 질투 같은 감정에다 두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필자 개인의 상상 즉 편견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던 주님의 대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점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지 않든 요한과의 관계는 요한과의 관계로서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이상으로 네가 관심을 둘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요한이 주님을 따르니까 [베드로 자기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도] 그렇게 여쭌 것이다. 요한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쭐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여쭐 정도의 그 관심이 요한을 위함이었던가, 주님을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자기를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부지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가. 그 어떤 심리 상태였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책망과 비슷하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만 강조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부질없는 관심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당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요한과의 사이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이다. 그토록 요한을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현재 요한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一여기에 베드로의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요한과 무슨 엄청난 일을 해 주고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말을 해 주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너는 오직 나와만 상관 있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시다.
필자는 이 베드로의 "관심"을 질투에다 관점을 두었다. 그럴까? 암암리에 그런 질투 섞인 감정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까.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 요한도 따라 나서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즉 베드로 자기 혼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분부이신데 요한이 말하자면 옆에서 끼어 든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라 판단해보았을 뿐이다. 이제 베드로는 요한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위치와 시각에서 그렇게 요한을 보았으니 말하자면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라 하면 역시 망상일까.
질투가 원래 그런 성질이 아닌가. 독점 의역이다. 그런 독점욕을 "질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요한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더러 "따르라" 하셨지만 이미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다. 필자의 판단을 유치한 생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독점이다. 남녀 부부간의 육체의 사랑 곧 둘이 한 몸이 됨에서도 상대에 대한 독점이다. 제3자의 개입은 전혀 용납 않는다.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지 더 다시 아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7:4]. 남편 외의 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의 몸 역시 똑같이 아내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점(獨占)임과 동시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유(共有)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고로 위의 설명에서 "질투"라는 용어에 대해 거북해할 이유도 실상 없겠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여기서 나타내려는 것은 베드로도 그런 감정[질투와 같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적하려 함이 아니니, 앞에서 밝힌 대로 오직 주님과 나와의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의 사랑을 밝히려 하고 강조하려 함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이고 사적(私的)인 사랑의 관계이니, 이는 한 몸된 아내 남편 사이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보이려 함이다.
이는 바울이 그 편지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즉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뉘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2-34] 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자식이라 하면 우리를 낳은 부모의 체질 그 육신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즉 하나님 자신을 나의 것으로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신성"(神性-신의 성품)이라 했다. 육신의 부모는 육체이기 때문에 그 육체를 내 것으로 하여 내가 태어나 그 자식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 곧 성령을 나 자신의 일부로써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선물로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셔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니까) 영원토록 모시기 때문이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하나님으로서 요한만의 세계로써 만족하고 너 베드로는 나와 너 베드로만의 사랑의 세계로서 너와 나만의 세계인즉 내가 요한에게 어찌하든 너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너는 나와의 사랑의 관계만 진척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소관사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최고, 최선, 최상, 최신(最新)의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항상 새롭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새롭다는 감격 가운데에 있으므로 싫증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一오늘이 어제가 아니었듯이 내일은 오늘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생명에서 배어 나오고 우러나오고 생명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대로 혼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요 혼자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니, 사랑이 삶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 남녀 창조에서와 같은 우리말의 오역(誤譯) "배필"은 남녀개념이 아니라, 단지 돕는 자["helper"]라는 단어이다. 이제 요한의 그 복음서 말미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의 모든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이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을 가리켜 요한복음에 보혜사(保惠師-흠정영역의 Comforter)라 하고 있는데 그런 '보혜사'란 거창한 이름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는 역시 똑같은[창세기 기록과 같은] 의미의 그런 "조력자"(helper)로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구조(構造)에서의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대방' 즉 짝의 개념으로서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 그 '영'이시라는 의미는 우리의 '육체'와는 그런 현격한 차이의 의미로서 앞에서의 설명대로 전체를 상대하시면서도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개인적인 의미로 통하시는 각 피조물과의 관계다. 이것을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 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요한에게 무슨 일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 아무 상관도 없다.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한시도 떠날 수 없어 너와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살지 않느냐. 사람인 나로서 너를 위해 이 이상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람이 되어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가 동시에 하나님인 줄을 알라. 하나님으로서 나는 요한이나 기타 모든 사람 그 어느 누구든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육체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되 육체가 아니라 영인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또한 요한을 비롯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 곧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네게 내가 한 말이다. 네게 다시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의 뜻대로 해 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을 누리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마시고 먹을 때에 느끼는 낙만큼이나 큰 낙인 것이니 생명의 근원적인 낙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능히 측량할 수 없는 굉장한 낙일 수도 있다. 사랑은 이런 모든 육체의 낙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것이고, 또한 영계에서의 사랑은 이런 자연계에서의 사랑보다 훨씬 뛰어넘는 쾌락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가 누리고 느끼는 그 쾌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낙을 느끼게 됨이니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과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신 데에서 잘 드러난다.
단지 이 세계는 그런 정상적인 생명의 낙이 통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낙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생명에서 느끼는 낙만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작 영적인 생명의 낙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의를 행함으로 인한 보람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 정도이나 이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극대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그 사람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그것으로써 결정되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니다. 오직 각자의 믿음 나름이요 사랑 나름이다.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8-58] 하실 때 바로 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낙이 되면서 또한 삶의 법칙을 준수함[먹지 않으면 죽으므로]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고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낙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오직 그 일이 옳기 때문에 즉 사는 법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비록 그런 자연스러운 낙을 현재 이 시간은 느끼지 못해도 의지력으로 (이것이 자연계의 법칙을 따르는 육체의 낙만을 따르는 동물 같지가 않고 지, 정, 의로 행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할 일을 하게 됨으로써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요 13:34]이요 율법[고전 9:21]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면의 색다른 낙을 느끼고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순종"[히 5:8,9]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낙이 아닌 낙과는 정반대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명시하기를, 주님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주인들이다. 주인답게 격조 높은 품위를 갖춘 말하자면 검증된 자들임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야 함은 당연하다. 왕으로서 겁약(怯弱)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스스로의 왕다운 품격, 왕으로서의 품성, 체통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검증을 받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딱 한번의 삶 뿐이다.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 역경 가운데서 그런 품성을 검증받는 것인데 주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선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의 한번으로 끝난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금(正金)이 시뻘건 불에 연단되어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 인생사에서도 이런 일은 항다반사로 일어남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서 이런 일이 없으랴. 하나님이시라도 사람되신 후에는 이런 사람의 과정[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을 통과하셔만 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개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네 활개 펴고 마땅히 나타낼 우리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대로의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오간 문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런 설명에 있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베드로를 "질투"니 하는 따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아주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해본 것은 다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왜 성령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런 "잣단" 기록을 남겨 놓게 하셨는가 하는 그 근본 핵심 의미이다.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이와 같은 특이한 끝 마무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아주 확정적으로 인(印)쳐 주는 것이다. 왜냐면 이상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와의 대화가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꾸며서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대목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 결론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진실 그대로의 가감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고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 후에도 '필요 없고 객쩍은 사사로운 소리'라고 하여 나중에 삭제하려는 생각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요한 자기 딴에는 자기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퍼져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말쟁이가 이런 말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삼아 지어내려 했다면 왜 이것 하나만 만들어내겠는가. 내친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만들어 냄 직하지 않은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이 자세하게 분석해보지 않고 언뜻 들으면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요령 부득이 된다. 최소한 이 요한의 복음서를 읽게 될 수많은 독자 개개인에게는 전연 상관도 유익도 없는 대목임은 분명한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사사(私私)로운 필요 없는 멋적은 이야기를 중요한 복음서 기록에다 덧붙여 놓은 것인가.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했으니, 우리에게는 당연히 멋적기만 당시의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기록하도록 요한을 감동시키신 것은 분명하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었으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이 대목의 핵심이다. 즉 그리스도 부활의 증명이다.
다시 말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지어낼 경우 이상과 같은 일견 무의미하기만 한 장면을 지어내야 한다는 고충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아무리 천재와 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후세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증명하여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요한으로 하여금[요한 자신은 자기에 관해 쓸데없이 나도는 낭설을 불식시키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런 무의미한[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시답잖은 내용을 기록해놓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눈 베드로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의 다른 모든 기록은 그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인 만큼 그런 의도하에서라면 아무 특이한 점이 없으나 이 대목만은 순전히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해명(解明) 차원에서의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모든 기록보다 독보적이고 그런 만큼 비중은 크고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리하기는 하지만' 그 대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투 운운" 하면서까지 억지로 해설을 시도해볼 정도였었다.
그리고 또한 부활하신 후의 일에 대해서도 다름 복음서 기자는 아주 간단히 기술해 버리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명백한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러 가지로 그 부활의 사실을 입증해서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그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모든 답은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독 요한만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 두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 때의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죽으시기 전의 그리스도와의 대화였다면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시답잖은 것으로써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모두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이 대목을 모든 이들에게 알려 줄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만 아니라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이제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간에 말이 퍼지게 하시고 그 해명 차원에서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이런 내용을 갖다 붙이도록 하셨다는 설명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후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설득력 있게 신빙성 있게 나타내 주는 증거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각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의 그 정도라면[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각종 서술] 거짓말하는 이들도[성경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조작해낸 것이라 가정한다면] 얼마든지 지어내어 끼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소한 무의미한 내용을 끼워 넣을 거짓말쟁이는 아담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천하에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신구약]을 그 어느 인간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내용을 가감하거나 가필(加筆)하는 등] 엄정히 간수하실 것은 말하나 마나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영생하는 자로서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왔다는 것이 그 뜻이다[롬 5:12].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요 6:45].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는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눅 13:1-9] 과정에 있는 "죽은 자"[마 8:22]의 몸부림일 뿐이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그대로, 현재 우리가 산다고 착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아 세상에 났기 때문에, 태어나는 인간마다 그런 삶[영원히 사는]의 안목으로 만물 만사를 대하는 데에 비극이 있다. 무슨 말이냐, 오늘 이 시간 어찌 될 줄도 모르고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되어 그런 자기 분위기에 휩쓸려 일종의 도취 감에서 사는 것이다. 자기만은 마치 안죽을 듯이 모두들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병이나 들고 죽을 사고라도 만나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듯이 그래서 그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양으로 우선 그 위기만을 모면하고자 기를 쓰고 덤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영원히 살기 위해 "회개를 해야"[눅 13:1-9] 하는 것인데, 회개할 생각은 일절 없다. 그렇게 스스로 영원히 살 것처럼 한다고 해서 죽음이 안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갓나서 죽기도 하고 10, 20, 30대에 짬도 없이 귀천(貴賤)도 없이 정직하게 바로 떠나 버린다.
이런 것이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음)의 우리 인생의 참담한 자화상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망하는 것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잊어 버린다. 언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듯이 태평으로 다시 머리를 싸매고 박이 터져라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같은 인생 삶, 내일도 기약 못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팔고 난 다음에 나 역시 그렇게 불시에 불의에 죽음을 만나면, "어이쿠" 하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죽음에게 끌려간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것'의 인생 진상(眞相)이다. 이 진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이 지혜다. 쉬이 잊어 버리지 않고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 슬기다. 인생이 사는 것은 천국 곧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靈界)에서 사는 것이다. 속으면서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인생들이다. 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서식처일 따름이다. 만물의 영장(靈長, 영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으로서의 인간이 거처할 곳은 영원한 세계 곧 신령한 몸으로서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하 만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다. 인생으로서의 최대 과제다.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라는 것이니 그렇게 사는 방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성경은 똑바로 가르치고 있다[빌 3:8]. 그래서 그 외의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돋아나고 광명의 세계가 비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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